소설리스트

47화. 훼방꾼 (47/120)

47화. 훼방꾼2021.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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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858742096.jpg“손수건은 미처 생각지 못했네요. 미안해요.”

16551858742103.jpg“아니에요. 변호사님이, 저 만나주신 그것만으로도 이미 큰 힘이 되었는걸요. 흑. 울지 않고, 잘 말하려고, 잠도 안 자고 연습했는데, 잘 안되네요. 흐으윽.”

울음을 삼키려 끅끅대다, 다시 터지기를 몇 번. 겨우 진정이 된 그녀가 짓무른 눈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죄송하다고, 보는 사람이 더 마음 아프게 웃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 둘 카페테리아로 모여들고 있었다. 세나는 김주희를 데리고 조금 더 구석진 곳으로 자리로 옮겼다.

16551858742096.jpg“지금 어디 살고 있어요?”

16551858742103.jpg“아직 아파트에서 짐은 빼지 않았어요. 갈 곳도 없고.”

16551858742096.jpg“잘했어요. 공동명의라도 실거주자가 김주희 씨기 때문에 법원에서 퇴거명령이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쪽에서 경매에 넘긴다는 둥 뭐라고 하든 버티세요. 그리고 또 하나. 혹시 남편분 앞으로 나온 보험금이 있나요?”

16551858742103.jpg“네. 삼억 정도.”

세나의 질문에 김주희는 시부모 되는 사람이 남편 장례를 다 치르기도 전에 사망신고부터 했다고 전했다. 아직 사십구재도 치르지 않았는데,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보험금이 지급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테니, 일단 법정상속인 선정과정에 문제를 제기해 지급정지 명령부터 받아야 한다.

16551858742096.jpg“이건 정말 실례되는 질문인데, 아마 저쪽에서 유전자 검사를 하자고 나올 거예요. 아이의 아빠가…….”

16551858742103.jpg“걱정 마세요. 이 아이. 허니문 베이비예요.”

탁하기만 했던 그녀의 눈동자에 생기가 어렸다. 아직 태도 나지 않는 배를 조심스럽게 감싸는 손과 입가에 서린 미소가 세나에게 확신을 주었다.

16551858742096.jpg“이제부터 제가 김주희 씨 법정 대리인이 될 거예요. 저쪽에서 막무가내로 연락 오는 거, 사소한 것부터 전부 다 저에게로 돌리세요.”

사실혼 관계에서 유산을 주장하기는 힘들어도 일단 배 속의 아이가 법정상속인 1순위였다. 5주 된 태아를 유가족으로 인정해 줄지는 판례를 확인해봐야겠지만, 세나는 그보다 이들이 사실혼으로 6년이나 함께 살면서 형성한 재산에 대한 기여도를 꼼꼼히 따져, 김주희를 상속인으로 인정받게 하는 쪽으로 계획을 세웠다. 낳아 줬다고 다 부모가 아니다. 자식의 목숨보다 돈이 더 중한 자들에게 아까운 청춘의 목숨값을 십 원 한 푼도 주고 싶지 않았다. 급하게 사망신고를 한 것으로 보아, 분명 금전적인 문제가 있어 보였다. 헛된 곳에 돈이 쓰이기 전에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16551858742096.jpg“김주희 씨, 저 믿으실 수 있으세요?”

16551858742103.jpg“지금 제가 변호사님 말고 믿을 사람이 있을까요? 변호사님은 제 은인이세요. 우리 아이의 은인이고.”

세나는 자신이 준비해온 수임 계약서를 내밀며 그녀의 손에 볼펜을 쥐여주었다. 김주희는 계약서의 문구를 읽어보지도 않고 사인을 했다. 이 종이 한 장이 숨통이 꽉 틀어막혀있는 자신의 산소호흡기라도 되는 양 사인을 하고 나서도 한참을 꼭 쥐고 있었다.

16551858742096.jpg“김주희 씨는 해주실 일이 따로 있어요.”

16551858742103.jpg“뭐든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게요.”

16551858742096.jpg“아무 걱정하지 말고 잠 푹 자고, 밥 잘 먹고, 배 속의 아기만 생각해요. 나머지는 김주희 씨의 변호사인 제가 해결해 드릴게요.”

김주희와는 로비에서 인사를 마무리하고 헤어졌다. 돌아서는 그녀의 발걸음이 처음보다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회전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오자, 머리 위로 부서지는 오후의 햇살이 눈부셨다. 완연한 봄이었다. 손차양을 만들어 쏟아지는 햇살을 가리고 정갈하게 깔린 보도블록과 조경수,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회사원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일상에 평화로움이 한껏 스며들어있었다. 세나는 출입구 옆에 비켜서서 눈을 감고 고개를 한껏 치켜들었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켜 가슴을 부풀렸다. 어깨는 무거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게가 버겁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을 만큼 뿌듯했다. 자신의 날갯짓이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다는 건 한편으론 무섭지만, 한편으로는 보람차기도 했다. 변호사로서의 자부심은 이럴 때 빛을 발하는 걸까. 그저 작은 몸짓이었을 뿐인데, 이런 어마어마한 만족감을 주다니. 이 일을 진심으로 잘 해내고 싶어졌다. 수임료 1억짜리 일보다 더 최선을 다하고 싶다. 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삶을 지향했다. 남들 눈에 대단해 보이고 싶은 알량한 이유였다. 그러나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세상도 나쁘지 않았다.

16551858769257.jpg“세나?”

의아함과 반가움이 담긴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뜨자, 온화한 미소로 화답하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16551858769257.jpg“네가 우리 회사엔 웬일이야? 나 보러 왔을 리는 없고.”

봄 내음이 한껏 나는 로열 블루칼라 슈트의 채성민이었다. 밝은 갈색 머리칼이 빛에 반사되어 유난히 반짝거리는 그는 마치 대학생 때 세나가 한눈에 반했던 선배의 모습 그대로였다. 저를 보고 부드럽게 미소 짓는 채성민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지 않았더라면, 한참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을 뻔했다. 그가 지척에 닿자 세나가 자세를 바로 했다.

16551858742096.jpg“선배. 잘 지냈어요?”

16551858769257.jpg“나야 늘 잘 지내지. 너는? 문자로만 대화하다가 이렇게 보니 또 반갑네. 무슨 일이야?”

16551858742096.jpg“상담자 만나러 왔어요. 이제 막 나가려던 참인데 날이 좋아서 광합성 좀 해봤어요.”

16551858769257.jpg“오늘 날이 참 좋긴 하지. 아- 이런 날 데이트하면 참 좋은데.”

채성민과 대화를 이어가기에 어색함이 없었다. 꼭 오래 알았던 사람처럼. 참 싱그럽고, 딱 4월의 봄을 닮은 선배였다.

16551858769257.jpg“밥은 먹었어? 이렇게 만났는데 차라도 한잔할까? 데이트 대신에.”

‘데이트’라는 단어에 피식 웃었다. 세나는 그것이야말로 채성민의 장점이라 생각했다. 붙임성이 좋고, 부드러운 인상은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16551858742096.jpg“선배 회사에서 인기 많겠어요. 예전부터 느꼈지만, 여자들이 좋아할 말 엄청 잘하는 거 알죠?”

16551858769257.jpg“내가? 아닌데? 난 여자들이 좋아하는 말 말고, 세나가 좋아할 만한 말을 더 많이 해주고 싶은데?”

16551858742096.jpg“또 그런다. 저 이제 스무 살 대학생 아니거든요.”

16551858769257.jpg“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리 세나에게. 파고들 틈이 안 보이네.”

농담인지, 진담인지. 빙글빙글한 웃음 속에 세나는 또 웃고 말았다. ‘우리 세나’라는 말을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내뱉는 그의 다정함에 10년의 거리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16551858769257.jpg“다음 주 87기 동문회 한다던데, 연락받았어?”

16551858742096.jpg“아, 저야 당연히 연락받았죠. 동문회 연락 담당이 박정희거든요.”

16551858769257.jpg“올 거야?”

16551858742096.jpg“네. 저 동문회 개근이에요. 상 받으려면 열심히 참석해야죠. 선배는요?”

16551858769257.jpg“이번에는 참석해 볼까 해.”

16551858742096.jpg“졸업하고 처음이죠?”

매년 5월 중순 금요일. 같은 해에 졸업한 사람들이 모이는 대학 동문회였다. 채성민은 유학을 갔다 온 이후로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16551858769257.jpg“같이 갈까?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혼자는 어색할 것 같아서.”

16551858742096.jpg“선배가요? 다들 선배 보면 환영하기 바쁠 것 같은데? 특히 제 동기 여자애들은 난리가 날 것-.”

그때 채성민이 왼쪽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세나의 어깨를 감쌌다.

16551858769257.jpg“여기서 이러지 말고, 진짜 차나 한잔하러 가자. 부탁도 있고.”

1층 로비에 있는 카페테리아로 갈 줄 알았는데, 그는 밖으로 세나를 이끌었다. 그러나 화단 사이로 들어서는 한 차량 때문에 두 사람의 걸음이 뚝 멎었다. 다급한 발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리더니, 차량 앞으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 여러 명이 줄을 섰다. 곧이어 은색 세단의 뒷좌석 문이 열렸다. 매끈하게 잘 빠진 두 다리가 대리석 바닥 위로 떨어졌다. 화려한 보석이 박힌 높은 하이힐을 지지대 삼아 차에서 내린 여자는 화려하다는 수식어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온몸을 휘감는 명품 원피스와 작은 얼굴을 가리는 커다란 선글라스. 목선에서 딱 떨어진 단발머리가 찰랑거렸다. 그녀는 손바닥만 한 클러치 백조차 무겁다는 듯 눈썹을 신경질적으로 세우며 옆에 선 수행 비서에게 툭 던졌다. 그러고는 주변을 살피지 않고 곧장 채성민과 기세나가 있는 방향으로 또각또각 걸어왔다. 세나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성민의 손이 스리슬쩍 떨어졌다. 이상을 감지한 세나가 고개만 돌려 성민을 보았다. 부드럽게 휘어졌던 눈썹 앞머리가 찌푸려져 있었고, 굳게 다물린 입술 사이는 잇속에 씹혀있었다.

16551858742096.jpg“성민 선배?”

세나의 부름에 눈을 마주쳐온 채성민이 ‘응?’하고 입꼬리를 슬쩍 올려세웠지만, 평소의 미소와는 달랐다. 어딘가 잔뜩 뒤틀려있었다. 그를 잘 알지 못했지만, 억지웃음인 것은 분명했다. 채성민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세나 바로 앞에 인기척이 드리웠다.

1655185882531.jpg“누구?”

도도하게 말을 붙인 여자가 새카만 선글라스를 벗고, 세나를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렸다. 시선은 거만했고, 호의로 받아들이기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1655185882531.jpg“채성민 팀. 장. 의 새 주인님인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상대를 얕잡아보고 깔아뭉개기에 여념이 없었다. 주인이라니. 여기가 조선 시대도 아니고, 신분제 폐지가 된 지 언젠데 시대에 동떨어진 헛소리를 일삼는 건지. 의전을 받는 걸 보니 오너 일가인가 싶었지만, 말투가 너무 재수 없었다. 이 여자 뭐야, 싶은 세나는 옆에 선 채성민이 신경 쓰여 구태여 말을 보태진 않았다. 그러나 불쾌함을 표출할 길이 없어 미간 사이를 와락 구기며 눈을 치켜떴다. 그러자 여자는 재밌다는 듯 입술을 비틀며 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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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858769257.jpg“황 상무님께서 회사까진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1655185882531.jpg“내가 회사에 오는 게 이상해? 이름뿐이라도 명색이 상무인데?”

16551858769257.jpg“…….”

쌀쌀맞게 응수하며 코웃음을 친 그녀가 채성민과 기세나를 한 번씩 훑더니 ‘놀고들 있네.’ 하고 짧게 읊조렸다.

16551858742096.jpg“이봐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여자이길래, 이따위로 행동하는 건지. 지가 오너 일가면 오너 일가지, 나한테도 오너인가. 보는 눈만 없었다면 똑같이 행동해 주고 싶었다. 대신에 이 회사가 뭐를 파는 건지, 소비자의 무서움을 보여줘야겠다 싶은 세나가 일침을 가하려 나서다, 덜컥 손목이 잡혔다.

16551858769257.jpg“무슨 일 때문에 오신지 모르겠지만, 가시던 길 가시죠.”

세나의 손목을 붙든 채성민의 손에 힘이 잔뜩 실려 부들부들 떨렸다.

1655185882531.jpg“나 채성민 팀. 장. 만나러 왔는데? 여기 너 말고 볼 일이 있을 리 없잖아? 옆에 있는 그 여자 손은 좀 놓고, 따라와.”

황유라는 몸을 휙 돌리며, 애완견을 부르듯 검지를 까딱까딱거렸다. 수행비서가 열어준 문을 당연하다는 듯 지나쳐 들어가는 그녀의 앞을 막아서는 이가 하나 없었다. 로비에 있는 모든 이가 홍해가 갈리듯 비켜서서 고개를 숙였다. 요즘 재벌 2세들은 예절교육을 따로 받는다는데, 근본부터가 글러 먹은 작태에 어이없는 웃음만이 피식피식 새어 나왔다. 세상에 뭐 저런 싸가지가 다 있을까.

16551858769257.jpg“뭔가 좀 해보려고 했더니 늘 훼방꾼이 등장하네. 더 오기가 생기게.”

낮게 중얼거린 채성민이 짜증이 뒤엉킨 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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