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치밀하고 유치한 남자2021.12.07.
“누구한테 얻어맞은 것도 아니고, 꼴이 왜 이래?”
거뭇거뭇한 다크서클이 드리운 눈가와 퀭하게 팬 볼. 거기에 바싹하게 마른 입술이 꼭 좀비 같았다. 어제 씻지도 않고 잤더니 더 심한 듯 보였다.
“이 얼굴을 선배가 봤다면, 좋아한다는 마음이 싹 사라질 텐데…….”
그럼 내기에서 바로 이길 수 있는데. 아니지. 수치를 팔아서 얻은 승리는 십 년 이불 킥이 아니라, 평생 갈 테니까. 새벽 일찍 사라져준 그의 배려심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세나는 얼른 양치질을 끝내고 세수부터 했다. 클렌징폼으로 꼬질꼬질함을 씻어내자 그나마 볼 만해진 얼굴로 돌아왔다. 샤워를 마친 세나가 부엌으로 들어가 포트기에 물을 올렸다. 사실 세나의 취향은 회사 휴게실에서 우아한 척 마시는 쓰디쓴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혀가 아릴 정도로 달달한 커피믹스였다.
“커피는 역시 막심 모카 골드지. 예쁜 언니가 괜히 십 년을 넘게 전속모델을 하겠어?”
생각보다 괜찮은 컨디션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으로 돌아왔다. 타이밍 좋게 협탁 위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철두철미한 류강현은 어젯밤 그녀의 핸드폰을 충전까지 해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른 아침 문자를 보낸 사람은 제 말 하면 나타나는 호랑이, 류강현이었다.
[일어났으면 밥 먹고, 병원 갔다가 출근해.]
어제 고마웠다는 답을 하기 위해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사이, 류강현에게서 사진이 한 장 전송됐다. 입을 헤벌쭉 벌리고 곤히 자는 한 여자의 사진이었다.
[걱정하지 마. 이 사진은 지금 바로 삭제할 테니까.]
[기품있는 기세나 변호사님 이미지는 파트너 변호사인 제가 지켜드려야죠.]
머리칼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그 사진은 제가 봐도 꼴사나울 정도로 적나라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침은 안 흘렸다는 점이었다.
“…….”
여기가 비무장지대 지뢰밭인가. 생각지도 못한 지뢰가 여기저기서 펑펑 터진다. 그러나 이 꼴을 보면서 류강현이 얼마나 키득키득 웃었을까를 생각하자 식었던 열이 다시금 차올랐다. 좋게 봐주려야 봐줄 수가 없는 남자다. 좋아한다며! 꼬신다며! 그런데 이딴 사진으로 기분 좋은 아침을 망쳐??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민망함과 분노가 기어이 잇새를 뚫고 터졌다.
“아악!! 이 호랑 말코 같은 인간아!!!”
세나는 핸드폰을 침대 위로 퍽, 던진 뒤 제 머리채를 잡고 절규했다. 발을 쾅쾅 구르는 건 필수 옵션이었다. 병원에 들렀다 출근하는 그녀의 옆구리엔 하얀 약봉지와 ‘신쥬린’ 작가의 ‘지뢰밭에서 살아남는 법’, 그리고 ‘흑역사,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책이 들려있었다. 책의 제목으로만 봤을 때, 이 작가는 아마도 베어 그릴스급 생존전문가일지도 모른다. *** 익명의 상담자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댓글로 번호를 남긴 지 사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몇 번의 문자 끝에 세나는 상대방의 점심시간을 이용해 그녀의 회사로 가기로 했다. 태블릿 PC를 챙겨 들고 사무실 문을 나서는 길. 류강현의 집무실에서 나오는 처음 보는 사람과 마주했다. 40대로 보이는 남성은 활동하기 편한 PK 셔츠 차림이었다. 그의 목에 걸린 사원증의 로고를 보고 K 로펌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지만, 세나에겐 생소한 인물이었다.
“누구세요?”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던 남자가 세나를 알은체했다.
“기세나 변호사님? 아이고. 반갑습니다.”
그리운 사람을 만난 듯 목소리와 표정에 한가득 묻어나는 반가움에 오히려 세나가 더 당황했다. 아는 사람인가 했지만, 전혀. 저 정도 덩치라면 제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저를 아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장철호입니다.”
“아! 그, 류 변호사님이 공들였다는 그 전설의 장 계장님?!”
세나는 장철호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법무법인 K 법률비서실장이라는 직함이 눈에 들어왔다.
“이젠 실장님이시네요!”
“네. 진작에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이제야 뵙네요. 오자마자 정신이 없어서.”
장철호는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마주 잡은 투박한 손엔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40대로 보이지 않은 몸집은 꾸준한 운동으로 다부졌고, 풍기는 이미지는 검사 수사관보다는, 범인을 잡기 위해 잠복하는 형사가 더 어울리는 남자였다.
상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손을 놓은 남자가 제 목덜미를 멋쩍게 쓸어내렸다.
“원래 경찰대 졸업하고 조폭 때려잡는 형사나 하려고 했는데, 상명하복인지 뭐 그런 규율이 저랑은 좀 안 맞더라구요.”
“……선배랑 친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하나같이 사람 마음을 읽나요?”
“사람을 관찰하는 게 습관이라.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장철호의 눈가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주름의 깊이로 보건대, 겉보기엔 서글서글한 성격이지만 한번 화가 나면 아주 무서운 사람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류 변호사님은 오늘도 자리에 안 계세요?”
“이번 주는 내내 외부 일정이랑 재판 일정 잡혀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저 뭐 하나만 알려주세요.”
그가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세나는 이때다 싶어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목소리를 낮춰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류 변호사님이 장 실장님, 어떻게 꼬셨어요?”
계단을 내려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까지 동행한 장철호가 눈썹을 움찔하더니,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왜 웃는지 모르는 세나가 고개를 갸웃대자, 그가 웃음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이래서 류 변호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군요.”
“왜요? 나 막 이상한 사람이래요?”
세나를 바라보는 장철호의 시선에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아닙니다. 책임감도 강하고 일을 아주 잘하는 변호사라고 하셨습니다. 아쉽지만 제 대답은 류 변호사님의 당부대로 영업비밀입니다.”
“허, 기가 막혀서. 선배가 비밀로 하라고 했다고요?”
그녀의 반응에 장철호는 입을 꾹 다물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게 뭐 국가 안보랑 관련이 있길 해, 변호사법이랑 관련이 있길 해. 도대체 뭔데 비밀이라는 건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뭐라 더 말을 붙이고 싶은데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장철호는 고개를 살짝 숙여 세나의 다른 질문을 차단했다. 머뭇대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그녀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직접 겪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생각보다 치밀하고, 은근 유치한 구석이 있거든요.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아, 제 방은 예전 기세나 변호사님이 쓰시던 방이니 부탁하실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친절히 지하 주차장이 있는 B2 버튼을 눌러주고 유유히 사라졌다. 며칠째 코빼기도 안 보이는 류강현은 아침 인사 대신 매일 세나의 책상 위에 수박 주스를 올려놓았다. 고맙다는 문자는 일부러 보내지 않았다. 또 무슨 말로 속을 뒤집어 놓을지 몰라서. 차라리 사다 준 수박 주스만큼 점심밥을 사는 게 낫지. 생각보다 치밀하다는 말을 들으니 이것 또한 작전의 일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게 만들려는 작전. 그러나 점심은커녕 저녁,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집무실은 비어있기 일쑤였다. 최근 뒤늦게 담당한 사건에 여기저기 얽혀있는 일들이 많아 골치가 아프다 들었다. 복도를 지나다 보면 강현의 집무실은 비어있거나, 다른 변호사들과 바글바글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회의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도와줄 거 없는지 물어보려다 전문분야가 다른데 딱히 자신의 손이 필요할 거 같지 않았다.
“만약 오늘도 밤이 늦도록 회의를 한다면 야식이나 사다 주지 뭐. 그럼 수박 주스에 대한 값은 치르고도 남는 장사 아냐?”
그만 사다 줘도 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아침마다 마시는 수박 주스의 달콤함에 벌써 중독되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출근해서 저를 반기는 분홍색 슬러시가 없으면 금단현상으로 다리를 달달 떨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 류강현이 이런 현상까지 계획하는 치밀한 남자라면, 자신이 그보다 더 치밀한 사람이 되면 된다. 빚을 그때그때 갚아서 더는 이자가 불어나지 못하도록. 상담자의 회사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주소가 낯익다고 생각했는데, 채성민의 회사였다. 시간 맞춰 도착한 세나는 상담자를 만나기 위해 1층 로비에 있는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탁 트인 공간은 군데군데 비어있었다. 아직 내려오지 않은 것일까, 주변을 둘러보다 어쩐지 자꾸 주변을 의식하는 한 여자를 발견하고 곧장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김주희 씨?”
그간의 고생이 훤히 보일 정도로 핼쑥한 얼굴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세나를 맞이했다.
“아……. 아, 기세나 변호사님이세요?”
“네. 안녕하세요.”
“뭐, 드실래요? 제가 사드릴게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김주희라고 불린 여자가 카운터로 가 두 잔의 음료를 주문했다. 세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여자를 가만히 살폈다. 구부정한 어깨는 왜소한 체격을 더욱 작아 보이게 했다. 이 정도 크기의 회사를 다닐 정도면 연봉이 나쁘지 않을 텐데, 구김이 가득한 블라우스와 계절에 맞지 않는 정장 바지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는 회사에서 살아남기 버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긴. 지금 상황에서 멀쩡한 게 더 이상한 일일 테지. 주문한 음료를 받아 돌아온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몸짓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의 손에서 음료를 받아들며 얼른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식사는 하셨어요?”
“……네. 억지로라도 챙겨 먹고 있어요. 임신…… 5주 차라고 하더라구요.”
알지 못했던 임신 소식에 축하의 말을 건네야 하는데,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아 한참 만에야 짧게 축복했다.
“도움을 받는 처지에서 제가 가야 하는데, 여기까지 오시게 만들어서 죄, 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
세나를 기다리며 얼마나 불안과 초조함에 떨었는지, 그녀의 엄지손톱 옆 거스러미는 죄다 뜯겨 피딱지가 맺혀있었다.
“집을, 사느라 모아둔 돈을 다 써서, 수임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 좋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지만, 무기계약직이고. 아, 죄송해요. 만나자마자 이런 이야기로 시작해서.”
세나는 그녀를 만나고 제대로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했다. 김주희는 꼭 죄를 지은 사람처럼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떨구고만 있었다. 양심을 쓰레기처럼 쉽게 던져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데, 어째서 슬픔도, 상처도, 책임도, 이 가녀린 여자만 이토록 버겁게 짓누르는지. 법이란 게 참 불공평하다.
“김주희 씨. 제가 떼인 돈 받으러 온 거 아니잖아요. 전 김주희 씨의 사연이 안타까워서 뭐라도 도움을 드리려고 온 변호사예요. 그러니 고개 드세요. 얼굴 보고 이야기해요. 우리.”
“그렇지만, 저 때문에 시간을 쓰시는 거니까.”
“수임료 부분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저 다른 곳에서 돈 잘 벌어요.”
그제야 고개를 든 그녀가 울먹울먹하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테이블 위의 티슈를 한 움큼 쥔 채 얼굴을 가리고 펑펑 우는 그녀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