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2021.12.04.
옷을 다 갈아입을 때쯤 되자 강현이 침실 문을 두드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두 손엔 약봉지와 물잔이 들려있었다. 오락가락하는 정신에 강현이 집 안에 있었는지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밥도 안 먹었는데, 약을 먹어도 될까 모르겠네.”
“그냥 줘요. 먹고 기절해버리게.”
언제 사 왔는지, 그가 한약 맛이 쓰게 나는 작은 병과 종합감기 알약을 건넸다. 세나는 없는 기운에도 피식 웃고 말았다.
“이거 먹는 사람도 있어요?”
“난 그게 잘 맞던데.”
한약이라면 인상부터 쓰고 보는 세나였지만, 그래도 사다 준 정성이 있어 그가 건네는 약을 모두 삼켰다. 그러는 동안 강현은 침대 밑에 떨어져 있는 세나의 옷을 주워 근처 소파 위에 올려두었다.
“내일 재판 있어?”
“네. 오후에요.”
“그럼 아침에 병원 들렀다 출근해. 상담 일정 조정해야 하면, 비서실에 얘기해 놓을 테니까.”
“네……. 오늘 고마워요.”
강현이 의외라는 듯 픽, 웃었다. 그리고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이불을 끌어다 목 끝까지 덮어주고는 잠시 세나를 내려다보았다. 강현의 행동이 생각보다 다정스러워 세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이불을 움켜쥐었다.
“가볼게.”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들었다. 괜히 더 목이 칼칼한 것 같아 마른기침을 몇 번이고 하다 조용히 그를 불렀다.
“선배.”
“왜?”
“나 목이 많이 아픈데……. 물 한 잔만 더 떠주고 가면 안 돼요?”
그가 흔쾌히 물잔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온 강현의 손에는 미지근하게 식힌 물 주전자와 깨끗한 잔이 들려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침대 옆 협탁에 내려두고 다시 돌아섰다.
“선배…….”
“왜 또?”
“불도 좀 꺼주고 가세요.”
“이때다 싶어서 아주 종 부리듯 하는구나.”
강현이 스위치를 끄자, 방안이 어두컴컴해졌다. 이상했다. 늘 혼자 지내는 집이고, 제 방 침실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휑한 느낌이 드는 게 못내 어색했다.
“선배.”
“기세나. 한 번에 시켜.”
“그게요…….”
세나가 손을 뻗어 스탠드 조명을 켰다. 노란 불빛이 침실을 은은하게 밝혔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 잠들 때까지만 있다 가면 안 돼요?”
“…….”
“이상하게 아파서 그런가, 혼자 있기 싫어서요. 아, 그 뭐, 혼자 잘 있을 수 있기는 한데, 그래도 누가 옆에 있으면, 뭔가 든든하기도 하고……. 그래서 간병인을 쓰나?”
세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되지도 않는 변명을 주절주절 떠들었다. 강현은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문가에 가만히 서 있었다.
“바쁘면 가셔도 돼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약도 먹었고, 금방 잠들겠죠. 뭐. 안녕히 가세요.”
기어이 강현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터졌다. 세나는 나약한 자신을 속으로 타박하며 이불 속으로 얼굴을 쏙 숨겼다.
“바닥에 앉기 싫은데.”
“네?”
이불 속에서 눈만 쏙 빼내 강현을 보았다. 그가 느른한 웃음을 입가에 걸치고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그리고 목깃 아래 단정하게 매여있던 넥타이를 한 손으로 끌어내려 재킷과 함께 침대 옆 소파 팔걸이로 툭 던졌다. 한결 몸이 가벼워진 걸 느낀 강현은 마지막으로 와이셔츠 소매의 커프스단추를 풀며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옆에 누워도 되지?”
강현은 한 손으로 뒤통수를 받치고 누운 채 한참을 천장만 바라보았다. 퀸사이즈 침대는 두 사람이 누워있기에 충분했다. 적당히 폭신하고, 적당히 아늑한. 그녀가 잠들기 직전 방패처럼 올려둔 이상한 인형을 제외하면 말이다. 원숭이인지 원시인인지도 모를 괴상하게 생긴 인형이 수호신이라도 된다고 생각한 걸까? 이까짓 솜뭉치쯤이야 손가락을 퉁, 튕기기만 해도 침대 밖으로 처박힐 운명이란 걸 모르는 건지. 아니면 옆자리를 꿰찬 신체 건장한 남자가 무척이나 신사적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빈속이라 약 기운이 빨리 도는지, 세나는 강현이 뭔가 제대로 이야기도 꺼내기 전에 금세 잠이 들었다. 아무리 몸이 안 좋다지만, 이렇게 쉽게 잠이 들 수 있는 사람의 신경 줄은 무쇠로 만들었단 말인가, 그래서 자는 척하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쌔근쌔근,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기 시작할 때쯤 정면을 보고 있던 강현이 세나를 향해 옆으로 돌아누웠다. 가슴을 꽉꽉 틀어막고 있던 긴 숨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잘도 자네.’
어이없는 그녀의 행각에 확 선을 넘어버릴까 하는 마음 반, 그래도 무방비 상태의 그녀를 언제 또 볼 수 있겠나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강현은 세상모르고 잠이 든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죄질이 극악무도한 범죄자에게도 인권이 있고, 수사 도중 고문을 했다간 법정 판결이 뒤바뀌는 세상이 되었다.
“너 지금 이거 나 고문하는 거야.”
알고나 있냐 묻고 싶지만 아픈 사람을 두고 뭘 기대했나 싶어 회의감이 들었다. 볼이라도 콱 꼬집어서 깨울까 싶다가도, 휘청거릴 정도로 몸이 좋지 않은데 자기 일을 미루지 않는 그녀가 대견하기도 했다. 강현은 복잡한 심경을 담아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땀에 젖은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손가락에 감기는 감촉이 퍽 부드러웠다. 손끝마저 설렐 정도로. 세나는 제 이마를 간질이는 손길에 낮게 앓는 소리를 내더니 그 손을 잡아 내렸다. 잠에서 깬 줄 알았는데. 세나가 강현의 검지를 말아 쥔 채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별것도 아닌 신체접촉에 움찔 놀란 강현이 슬며시 손가락을 빼내려 하자, 그녀의 손이 미모사 잎사귀처럼 오므라들었다. 화한 열기로 가득한 손바닥은 그의 검지를 붙든 채 놔주지 않았다.
‘수작 부리지 말라더니, 아주 대놓고 수작 부리고 있는 게 누군지 모르겠군.’
강현은 입가로 번지려는 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그녀의 손바닥을 살살 긁자, 간지러운지 인상이 찌푸려지며 꼭 다물려있던 주먹이 슬며시 열렸다. 결국, 소리를 한껏 죽여 쿡쿡, 웃고 말았다. 방안 가득 번져있는 그녀의 체취와 뺨을 물들이는 붉은 열기가, 자꾸만 어딘가를 자극하는 것만 같다. 강현은 상체를 반쯤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었다.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큰 숨을 들이켜길 몇 번. 불순한 감정을 조금 진정시키고 나서야 강현의 고개가 제 쪽으로 돌아누운 세나를 향했다. 열이 조금씩 내리고 있는지, 전보다 편안해진 인상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강현의 검은 눈동자가 잠든 세나의 얼굴 위를 찬찬히 훑었다. 말간 얼굴에 선이 예쁜 동그란 이마, 눈을 깜빡일 때마다 파닥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긴 속눈썹. 적당히 높은 콧대와 앙증맞은 콧방울, 그 아래로 살짝 벌어져 달콤한 숨결을 내뱉는 도톰한 입술. 얼굴이 취향이 아니라 했던 말과 다르게, 이제는 그녀의 모든 것이 예쁘기만 했다. 강현은 딱히 사람과의 인연에 연연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2년마다 순환보직 생활을 해야 했던 평검사 때도 함께 동고동락했던 식구들과 헤어지는 데 별 감흥이 없었다. 아쉽지도, 서운하지도. 그저 기회가 있으면 다시 만나겠지. 으레 그렇게 넘겼다. 그런데 종종 생각나던 사람이 있었다.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던 기세나. 류강현의 기억 속의 기세나는 언제나 화가 나 있었다. 물론 저에게만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향해 방긋방긋 잘도 웃던 그녀는 강현의 앞에서만 유독 바짝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일에 집중하고 있다가도, 불현듯이 떠오른 그 얼굴에 저도 모르게 어이없는 웃음을 흐리고 말았던 순간들이. 뭐가 그리 특별한 인연이라고. 핸드폰에 연락처 하나 없는 그녀를 떠올렸을까.
“이상하지?”
그러고 보면 학과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녀가 눈에 밟혔다. 강의실에서도, 학생들이 가득한 교내식당에서도, 강의를 마치고 지나쳐 나오는 복도에서도. 얽히고설킨 흐릿한 형체들 사이에서도 꼭 그녀만은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랬을까?”
그래서 그런가. K 로펌에 처음 발을 디뎠던 날. 계단에서 마주친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가까이 있고, 눈에 보이기 시작하니 자꾸만 맴돌았다. 뭘 해도 신경 쓰이고, 뭘 해도 궁금해지고.
“정신 사납게 구는 네가 왜 자꾸 예뻐 보이는 걸까?”
불현듯 자신이 예쁜 건 지나가는 개도 안다고 허세를 부리던 세나가 떠올랐다. 예쁜 걸 아는데 이런 앙큼한 짓을 하다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겁도 없이 잠이나 자는 너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 걱정거리 없어 보이는 얼굴을 지켜보는 강현의 눈동자가 그윽하게 깊어졌다. 이 감정이 무엇에서 기인하는지, 이제는 그 답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어졌다. 이런 감정에서 근본적인 원리를 운운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니까. 그저, 그녀가 저를 보고 더 많이 웃어줬으면. 그녀가 저에게만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였으면. 그녀가 기대야 할 사람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저를 찾았으면.
“이런 말을 지금 입 밖으로 냈다간 기겁하겠지?”
그렇게 제게만 보이는 세나의 모습이 늘어갈수록 강현의 욕심도 점점 커졌다. 그녀와의 내기에서 자신이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네가 넘어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줄게.”
더 보고 있다간 아픈 그녀를 품에 안고 싶을까, 침대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와의 사이를 막고 있었던 인형을 집어 들어 자신이 누웠던 자리에 대신 앉혀두었다. 소파 팔걸이에 걸어두었던 제 옷가지를 챙겨 밖으로 나가려던 강현이 다시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때마침 그녀가 뒤척거리며 몸을 바로 했다. 강현은 협탁이 있는 쪽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그녀의 머리맡에 멈춰 섰다. 노란 스탠드 조명이 비추는 잠든 세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와 박힌다. 강현은 다시 한번 두근거리는 심장의 떨림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강현이 허리를 내려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가볍게 붙였다 뗐다.
‘그냥 가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잘 참아준 상이라고 생각해.’
*** 세나는 어제보다 가벼운 몸 상태로 아침에 눈을 떴다. 보통 이 박 삼 일을 꼬박 앓아야 했는데, 그 쓰디쓴 한방약이 효과가 있었나 보다. 나이가 든 사람 말은 잘 듣는 게 좋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니까. 그래도 팔 한쪽과 허리 쪽엔 근육의 통증이 자잘하게 남아있었다. 세나는 스트레칭을 하듯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왔다. 시원한 물이 마시고 싶어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식탁 위에 조촐하게 차려진 상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집에 먹을 거 하나 없었을 텐데 이건 어떻게 만들었대?”
세나의 집엔 전자레인지에 쉽게 데워 먹을 수 있는 레토르트 음식 빼고는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가서 사 왔나 하기엔, 어설픈 모양새가 딱 직접 만든 죽이었다. 새벽에 만들어 두고 간 건지, 다 식어서 꾸덕꾸덕한 참치죽을 한 수저 떠먹은 세나의 눈이 한 번 더 커졌다.
“맛있네……?”
한번 맛을 보니 허기가 몰려왔다. 벗겼던 랩을 도로 씌워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나서야, 그 옆에 붙어있던 포스트잇 메모를 발견했다. [반드시 데워 먹을 것.] 정갈한 필체와 말투가 딱 류강현스러웠다.
“보통은 ‘맛있게 먹어’나 ‘밥 챙겨 먹어’라고 써야 정상 아니야? 안 데워 먹으면 죽일 거야 뭐야? 협박이 일상인 양반이네.”
세나는 포스트잇을 있던 자리에 다시 붙여두고 적당히 데워진 죽그릇을 꺼내 식탁에 앉았다. 단순히 햇반을 물에 끓여 참치캔 하나를 넣었을 뿐인데, 뭐로 감칠맛을 냈는지 순식간에 빈 그릇이 되었다.
“선배님. 요리를 잘하는 건 좋은 수였지만, 그래도 안 넘어갑니다. 잘 먹었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꾸벅, 혼잣말로 감사 인사를 전한 세나는 찌뿌둥한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치약이 묻은 칫솔을 입에 넣고 세면대 거울을 들여다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