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형법 제298조2021.11.30.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예전과 다르게 요즘은 동거하는 연인이 늘어나는 추세였다. 식을 올리더라도 바로 혼인 신고를 하지 않고, 아이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부부도 있었다. 젊은 부부들은 생활방식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1년 정도 살아본 후 혼인 신고를 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 사실혼 관계를 인정해 주는 쪽으로 법도 많이 변화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사실혼 관계의 부부가 헤어지게 되었을 때, 위자료나 재산분할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 부부는 사실혼 관계가 명확했지만, 남편이 신혼여행지에서 사고로 사망하면서 일이 커졌다. 사실혼에서는 유산상속 관련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부부의 재산이지만, 한쪽이 사망함으로써 그 재산의 일부는 유산이 된다. 하루아침에 든든한 버팀목이자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던 연인을 잃은 그녀의 사연도 안타까웠지만, 장례를 치르기 위해 남편 쪽 가족과 연락이 닿으면서 슬픔을 감당하기는커녕 더 괴로운 현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의절한 부모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남편의 유산을 죄다 가져가 버렸다. 법적 상속인이라는 명분으로 남편의 사망보험금, 회사에서 나오는 퇴직금까지. 남편의 이름으로 나오는 돈이란 돈은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탈탈 털어버렸다. 거기다 두 부부가 공동으로 구매한 아파트마저 가져가려 가압류 신청까지 걸었다. 돈에 눈이 먼 남편의 부모는 사실혼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고, 되레 자기 아들을 일부러 죽게 만든 거 아니냐며 또 한 번 아내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남편이 살아있을 적 그를 갉아먹었던 부모였다. 천륜을 끊었을 때는 여태껏 키워준 값을 내놓으라 모아둔 돈을 빼앗았고, 두 번 다시 연락도 하지 말라 으름장까지 놨던 그들이었다.
“이거 진짜 악질이네.”
사연을 읽는 내내 열이 뻗쳐 이마가 뜨끈했는데, 도덕심이라고는 개미 똥구멍만치도 없는 작태에 분노가 치밀었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 이마를 두 손으로 받치고 한참을 고민했다. 이 사연에 댓글로 조언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변호사로서 할 도리를 다한 거겠지만, 그녀 혼자 이 일을 헤쳐나가기엔 쉽지 않아 보였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상황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나의 시야 끝에 클라이언트들의 상담 일정과 법원의 일정이 적혀있는 캘린더가 눈에 들어왔다. 35칸의 박스마다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지만, 더러 빈 곳도 보였다. 일정을 조금만 조율한다면, 충분히 시간을 낼 수 있을 듯 보였다. 고민 끝에 세나는 그녀의 사연 아래,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적어넣었다. 도움을 주고 싶으니 연락을 달라는 말과 함께. 다른 사연을 더 읽고 싶었지만,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살갗이 따끔하기도 했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려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여덟 시였다.
“네.”
짧은 대답 끝에 문이 열렸다. 세나는 퇴근을 준비하던 몸짓을 멈추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아마도 신입 변호사가 자문을 위해 방문을 했으리라.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깔끔한 모양새였다. 헝클어짐 없이 셔츠 깃 아래에 자리한 넥타이 하며, 그의 넓은 어깨를 더욱 각지게 만들어주는 재킷. 그리고 한쪽 팔에 무심히 들려있는 카키색 봄 코트. 키가 큰 만큼 늘씬하게 뻗어 있는 다리는 슈트 팬츠에 가려져 있음에도, 모양새가 남달랐다.
“아직 퇴근을 안 했길래. 나가는 길이면 같이 저녁 먹을까 해서.”
“…….”
“기세나.”
어떻게 머리칼이 저렇게 새카말 수 있을까. 염색이라곤 해본 적 없나.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는 또 어떻고. 대체로 남자의 얼굴은 중심에 자리한 콧대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그 콧대마저 완벽했다. 눈매가 사납기는 하나, 전체적인 이미지로 보면 오히려 더 매력적이었다. 차갑기 짝이 없는 얼굴은 부드럽게 풀릴 때 더욱더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 갭 차이가 너무나 명확해서 저도 모르게 홀리듯 시선을 머물게 하고 만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머리는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보다, 외적인 부분을 더 상기시켰다. 세나는 그저 멍하니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눈에 담았다. 남자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돌연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너…….”
그가 성큼성큼 방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세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기다란 손가락은 요철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곧이어 시야가 까맣게 암전되고, 이마가 덮였다. 이마 위로 번지는 시원한 온도가 묘하게 기분 좋았다. 이마와 눈두덩을 한 번에 덮을 만큼 커다란 손바닥이 사라지자 다시 눈을 떴다.
“너 지금 아픈데?”
“……네?”
“얼굴이 빨갛길래 뭔가 했더니, 기세나. 너 지금 이마가 불덩이야.”
“아……. 그래요?”
내뱉는 숨에 열기가 섞여들었다. 숨을 쉬는데도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아서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긴 숨을 토하자 쿨럭 기침이 터졌다.
“어쩐지.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갑갑하다 했네.”
아프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까지 했다. 강현이 자신의 코트를 펼쳐 세나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품이 넓은 코트가 이불처럼 포근하게 세나의 몸을 감쌌다.
“챙겨야 할 거 있어?”
“……없어요. 가방만.”
강현은 옷걸이에서 핸드백과 트렌치코트를 한 손에 챙겨 들고 세나를 일으켜 세웠다. 의자에서 몸을 세우자마자 얄팍한 발목을 지탱하고 있던 힐이 휘청거렸다. 기우뚱 넘어가려던 몸을 강현이 받쳐 안았다.
“몸이 이 정도면 보통 스스로가 알지 않나? 미련하게 뭐 하는 짓이야, 이 시간까지.”
“누구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아픈지도 몰랐어요.”
세나는 가누기 힘들 만큼 무거워진 머리를 그의 가슴팍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하다 하다 이젠 아픈 것도 내 탓이다?”
강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도 세나가 몸을 제대로 기댈 수 있게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한 팔에 쏙 안기는 여린 몸이 바르르 떨리자, 반대 손으로 자신의 코트를 꼭 여며주었다. 세나는 자꾸만 풀리는 무릎에 억지로 힘을 줘 걸어보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네, 다 선배 탓이에요. 그거 알아요? 선배는 내 평화로운 마을에 침공한 외계인이나 다름없다고요.”
열이 오르기 시작하자 그녀의 양쪽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한기가 드는지 세나가 목을 잔뜩 움츠렸다. 그런데도 상대를 타박하는 말은 잘도 또박또박 내뱉는다.
“쯧, 입만 살아서는. 그 입은 키스할 때도 다물리는 법이 없었지.”
그녀가 제풀에 지쳐 강현에게 몸을 맡겼다.
“상대의 동의 없이, 키스하는 건 추행이고……. 형법…….”
“…….”
대학교 다닐 때, 그렇게 외웠던 형법이었는데. 막상 사용하려고 보니 퍼뜩 떠오르지 않는다. 강현에게 부축을 받아 복도를 걸어 나오는 동안에도 끙끙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형법……. 뭐더라.”
“제298조 강제추행. 협박 또는 폭행으로 추행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백만 원의 벌금형에 처한다.”
오, 역시. 걸어 다니는 법학 사전. 조항을 하나하나 다 외우고 있는 그가 신기했다. 박수라도 쳐주고 싶지만, 축 늘어진 손엔 힘이 하나 들어가지 않았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을 사발째로 들이키네.”
“뭐래. 떡은 내가 주는 거지. 선배야말로 나 아픈 걸 핑계 삼아 어떻게 해보려고 수작 부리지 말아요.”
힘이 풀린 다리를 휘청거리고, 말을 할 때마다 쌕쌕 밭은 숨을 내쉬면서도 절대 지지 않는다. 걸을 때마다 휘청대는 세나의 몸을 추스르며 강현이 물었다.
“정정당당 기세나라는 별명은 없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내기에서 오늘은 무효야.”
“알았으니까 다리에 힘이나 줘. 아니면 차라리 안아서 옮겨줘?”
“……걸을 수 있어요.”
내 두 다리 멀쩡한데, 공주님 안기 같은 닭살이 돋는 모양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세나의 고집에 강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하 주차장까지 힘겹게 내려온 두 사람은 나란히 주차된 차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그녀의 상태로 보건대, 운전은커녕 시동도 못 걸듯 보였다. 검은색 세단에 깜빡깜빡 불이 들어왔다. 보조석 문을 열고 세나를 먼저 차에 태운 강현이 큰 보폭으로 차를 돌아 운전석에 올라탔다. 주차장까지 내려오는 동안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이미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이번에는 손등을 뺨에 가져다 대 열을 재었다. 확실히 조금 전보다 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
“그냥 단순 감기일 거예요. 워크숍에다 이것저것 무리하기도 했고.”
거기에 환절기였다. 세나는 이맘때쯤이면 항상 감기 몸살을 앓았다. 미리 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사무실 이전과 가사전담팀 준비로 바빠 때를 놓치고 말았다. 주말에 머리를 싸매고 답도 없는 문제로 고민할 게 아니라 푹 쉬었어야 했다. 이쯤 하니 정말, 이 모든 게 강현의 탓인 것 같다. 언제부터 이렇게 남 탓하기 바빴나. 따지고 보면 컨디션을 조절하지 못한 제 탓인데. 몸이 아파서 그런가, 그에게 자꾸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지다니. 그러다 문득, 이거야말로 저를 나약하게 만들어 집어삼키려는 수작이 아닐까 싶었다. 영업비밀이라는 말을 운운하더니, 생각보다 얄팍한 수작이네.
“집 앞에 24시간 하는 약국 있으니까, 약 먹고 푹 자면 돼요.”
제 뺨에 닿아있는 그의 손을 밀어내며 눈을 부릅떴다. 강현은 더는 토를 달지 않고 몸을 물렸다. 주차장을 부드럽게 빠져나온 차는 한적한 도로로 끼어들어 몇 분간 달렸다.
“혼자 들어갈 수 있겠어?”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나 보다. 걱정 어린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오피스텔 입구 앞이었다. 세나가 눈꺼풀을 깜빡깜빡, 상황을 인지하고 뒷좌석에 있던 자신의 핸드백과 트렌치코트를 챙겼다. 그러나 차 문을 열지 못하고 허공에서 손을 허우적대자, 강현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다시 시트에 앉혔다. 그의 차가 건물을 돌아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공간에 주차를 마친 강현은 세나의 만류에도 차에서 내려 보조석 문을 열고 그녀를 부축했다. 세나는 회사에서 나올 때처럼 강현에게 거의 반쯤 안기다시피 기대었다. 강현은 귀찮아하는 내색도 없이 그녀를 부축해 현관 앞까지 당도했다. 도어록 비번을 입력하기 위해 겨우 손을 들었을 땐, 손가락까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삑삑-삑, 몇 번이나 미스 나는 바람에 도어록은 요란한 경고음을 울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강현이 도어록에 손을 올렸다.
“번호가 뭐야.”
“혼자 사는 여자 집 비번을 함부로,”
“내일 일어나서 바꿔.”
“일팔…….”
삑삑. 번호를 읊조리던 세나가 잠시 머뭇대다 한껏 작아진 목소리로 나머지를 읊었다.
“일팔, 이, 일팔요.”
그녀를 대신해 번호를 눌러가던 강현의 손이 멈칫했다.
“……굉장하네.”
그가 고개를 얕게 치며 나머지 숫자를 입력했다.
“……술에 취해도 절대 까먹을 일은 없죠.”
세나는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저를 위태롭게 만들었던 하이힐부터 벗었다. 거의 기다시피 침실로 들어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바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이불 아래에서 바스락거리는 셔츠와 치마가 거추장스러웠다. 그러나 새 잠옷으로 갈아입기엔 무리였다. 자꾸만 가라앉는 몸뚱이는 더는 이불 밖으로 나가길 거부했다. 세나는 오늘 아침 침대 위에 벗어두고 간 파자마를 이불속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애벌레처럼 꼼지락거렸다. 허물처럼 옷가지들이 하나씩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 바닥으로 툭,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