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나 좋아해요?2021.11.27.
“왜 웃어요?”
“눈치가 없다고 해야 할지,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몰라서.”
“장난치지 말고 딱, 말해요. 나 좋아해요?”
“고차원적인 대답을 원해?”
그의 말투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세나는 저 혼자만 심각한 것 같아 갑자기 창피해졌다. 매번 이런 식으로 강현에게 휘둘렸다. 고차원적이든, 저차원적이든. 그의 대답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됐어요. 뭐가 됐든. 혹시 나 좋아하면, 좋아하지 말아요.”
“왜?”
“알다시피 제가 연애를 끝낸 지 얼마 안 됐잖아요? 그때 봤죠? 결혼식장에서.”
강현은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한동안 연애할 마음이 없어요.”
“그래. 그럼.”
일말의 아쉬움도, 미련도 없는 담백한 강현의 대답에 세나는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래, 그럼. 그래, 그럼? 저걸 지금 대답이라고 한 거야??’
맥이 빠지는 대답에 허탈함을 넘어 서운하기까지 했다. 이건 이거대로 울컥, 화가 치민다. 삼고초려라는 말이 있다. 유비가 제갈량을 자신의 책사로 영입하기 위해 세 번을 찾아가 겨우겨우 마음을 얻었다는 일화에서 비롯된 사자성어. 그러나 류강현의 뇌 속에는 그런 단어는 어디에도 없는 듯 보였다. 시니컬하다 못해 시베리아 벌판에서 발가벗고 춤도 출 수 있는 류강현이라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
‘아무리 고백을 한 게 아니라지만, 너무 심한 거 아냐? 정말 나 좋아하는 거 맞아?’
아니면 이것 역시 그의 농간질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최 알 길이 없어 답답했다.
“내 말 이해한 거 맞아요?”
“이해했어. 넌 지금 연애할 마음이 없고, 난 그런 기세나를 꼬시는 중이라는 거.”
“뭐가 그렇게 심플해?”
“뭐가 또 그렇게 복잡한데?”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빨리 결론을 내고픈 세나와는 다르게 강현은 여유롭기까지 했다. 세나는 제 허리춤에 손을 얹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제야 강현이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흑단 테이블을 돌아 나오는 걸음이 전장에서 돌아온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했다. 누가 먼저 좋아한 사람이 약자라고 했나. 그가 풍기는 위용에 마음을 고백한 사람이 류강현이 아니라 제가 아닐까, 착각이 일었다. 멀찍이 마주 보고 선 강현이 세나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세나 또한 지지 않고 맞섰다. 지금 여기서 눈을 피하는 사람이 지는 거다. 세나의 오기가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매일 얼굴 보고 같이 일해야 하는 사이인데, 어쩔 거냐고요.”
“그러게. 어떻게 할까…….”
자신의 책상에 기대어 선 그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뭔가를 잠시 생각하는 듯 검지로 미간 사이를 긁적이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기다리지, 뭐.”
“네?”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지금 연애할 마음이 없다는 거잖아.”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거예요?”
“결론이 마음에 안 들어?”
책상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킨 강현이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올수록 세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등 뒤로 딱딱한 나무 문의 표면이 닿았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자, 잠깐만요. 가까이 오지 말고 거기서 얘기해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확실히 해야지. 우리가 최초로 합의점을 도출해야 하는 사항인데.”
“합의는 무슨, 아무리 봐도 협박하려고 하는 분위긴데…….”
“흠……. 이해가 안 가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강현은 멈추라는 세나의 신호를 가볍게 무시했다.
“기세나가 나한테 넘어올 때까지.”
어느새 지척에 다가온 남자는, 넘치는 자신감으로 노크도 없이 세나의 마음속 꼭 닫힌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기다려주겠다잖아. 기다리는 건 자신 있으니까.”
낯선 이의 침입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세나가 더는 열리지 않게 문고리를 부여잡고선 강현을 바라보았다. 침입자를 바라보는 눈은 이미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자, 장난치지 마요.”
“어떤 미친놈이 마음에 없는 여자에게 이딴 장난을 치지?”
퇴로를 차단하듯 세나의 뒤에 있는 문을 한 손으로 턱 짚고 선 강현이 시선을 내려 그녀를 직시했다. 세나의 앞을 막고 선 남자는 오만하리만치 당당했고, 언제라도 그녀의 문 너머로 들이닥칠 기세였다. 세나는 팽팽하게 맞서는 긴장감에 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축였다.
“절대. 절대. 절대. 제가 넘어갈 일 없을 거예요.”
세상에 절대란 없다. 강현은 제게 맞서기 위해 치켜든 얼굴과 동그랗게 부릅뜬 눈을 보며 입매를 부드럽게 끌어올렸다. 저보다 한참은 작은 체구의 세나가 바득바득 우기는 모습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 정말. 이렇게까진 할 필요가 없는데. 자꾸만 저를 자극하는 그녀가 못 견딜 만큼 사랑스럽다.
“내기할까?”
거만하기 짝이 없는 침입자는 되레 집주인에게 현실을 받아들일 기회를 주었다.
“만약 내가 진다면, 기세나가 시키는 건 뭐든 하도록 하지.”
“…….”
“그게 뭐든 말이야.”
책상 의자가 아니라 폭신한 상담 소파에 앉은 세나는 멍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치형 창문 너머로 따사로운 햇살이 나른함을 더해 내려앉았다. 무대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처럼. 그리고 그 연극은 언제나 그렇듯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방금 내가 뭔 짓을 하고 온 거지……?”
혹 떼러 갔다, 더 커다란 혹을 붙이고 돌아온 격이었다. 마음씨 착한 혹부리 영감은 도깨비가 혹도 떼주고, 금은보화를 한 보따리 안겨준다는데, 어찌하여 저 자신은 심보 고약한 혹부리 영감이 돼버렸는지 모르겠다.
“내기할까?”
“해요! 누가 이기나 보자구요! 나중에 저한테 제발 봐달라고 빌지나 마세요!”
“그거, 참 기대되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자라면, 이번에도 승자는 류강현이었다.
“아! 요 입! 요 입! 요, 입이 문제야!”
세나는 손바닥으로 한껏 오므린 입을 찰싹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왜 사니 기세나, 왜 살아! 거기서 왜 네가 자존심을 부리고 있어. 그냥 그러거나 말거나 흥. 하고 돌아섰어야지. 아이고, 기세나야.”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가슴에 콱, 박힌다. 그렇게 숱하게 당해 놓고도 또 이렇게 당하니까 말이다. 세상 어느 미친놈이 마음 없는 여자에게 이런 짓을 하냐고 했던 그 인간은 애당초 고백 같은 것을 해 봤을 리 없는 인간이다. 분위기 잡고, 각 잡고 고백해도 받아 줄까 말까 하는데 협박을 하다니. 고백도 받아 봤을 리 없다. 어떤 머리에 총 맞은 여자가 저런 인간에게 감히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 거울 속에 비치는 근심이 가득한 여자와 눈이 맞았다. 세나는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혹시나 제 이마에 총구멍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실성한 사람처럼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아주 안달복달하게 만들어 줄 거야. 나중에 가서 무릎 꿇고 비싼 선물을 내밀어도 그 고백, 받아 주나 봐라!”
*** 연이어 상담을 진행하고, 법원에 제출할 서류들을 정리하는 새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일반 직장인들처럼 9시 출근 6시 퇴근이라는 근무시간이 정해져 있다지만, 변호사들은 대개 탄력적으로 일을 한다. 말이 좋아 탄력적 근무지 실상은 퇴근 시간이 따로 없다고 보는 게 맞다. 큰 사건이 있을 때는 몇 날 며칠을 지새우기도 하고, 아무리 새벽에 퇴근했더라도 아침에 재판이 잡히면, 집에 들어가 씻고 옷만 갈아입고 다시 출근하는 일도 허다했다. 그나마 이혼 쪽은 조금 나았다. 소송으로 가는 사건도 많긴 하지만, 대개는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보기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이효원 변호사가 관리하는 가사전담팀 전용 블로그에 이혼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세나의 일도 함께 늘어났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가정을 이루고 살을 부딪치며 살아가다 보니, 소소한 일들로 마음이 상해 서로에게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당장 변호사를 찾아가기엔 부담스럽고, 별거 아닌 거로 고민을 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성당에서 고해성사하는 것처럼 하소연할 창구로 K 법무법인 가사전담팀 블로그를 찾아왔다. 익명의 내담자들은 저마다 각각의 사연을 안고 이혼이란 바다 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대부분 캄캄한 바다에서 정박도 못 하고 성난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나아갈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배들에겐 뱃길을 밝혀줄 등대가 필요했다. 개시한 지 2주도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도 길을 잃은 배들이 많다는 사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하루 일과가 얼추 마무리될 때쯤, 두어 시간씩 블로그에 들어가 무료상담을 해주곤 했다. 피곤함도 잊고 마우스 휠을 움직여 게시글들을 읽어내려가고 있는데,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글이 하나 보였다. [신혼여행지에서 사고로 남편을 잃었습니다.] 제목만 보아도 딱 보통 기구한 사연이 아닌 듯했다. 게시글을 클릭하자, 빠르게 화면이 바뀌고 까만 글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익명의 상담자는 자신을 스물여덟 살의 새신부라 소개했다. 그녀의 사연은 이러했다. 그녀가 스물두 살. 이제 막 사회에 나와 뭐를 해야 할지 몰라 한창 방황하던 시절,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났다. 여자는 갓난아기였을 때, 베이비박스에 버려졌다. 그녀의 부모는 이름 모를 어느 미혼모뿐이었다. 남자에게는 부모가 있었지만, 방치와 학대를 일삼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고아나 다름없이 살아왔다. 스물두 살의 여자와 스물네 살의 남자. 그렇게 두 사람은 운명처럼 만났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감싸줄 사람으로. 같은 직장에서 함께 일하며,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함께 밥을 먹는 사이가 되기까지 몇 개월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가난한 연인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에 감사했고, 함께 몸을 누일 수 있는 이 작은 원룸이 브랜드 아파트 부럽지 않았다. 차곡차곡 돈을 모아 조금씩 집을 넓혀가고, 어느 정도 여유가 되면 작은 결혼식을 올리는 꿈을 꾸었다. 그렇게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온 이 연인은 각자의 인생의 동반자이자, 부부나 다름없었다. 이를 두고 법률상으로 사실혼 관계라 칭한다.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지만, 일정 수준의 동거한 기간이 있고 주변인들이 두 사람을 부부라 인식하고 있다면, 이혼 시 법적으로 인정받아, 재산분할 또는 위자료를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연인의 사연은 단순 이혼과는 조금 달랐다.
“아…….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
눈썹 앞머리가 잔뜩 좁아진 줄도 모르고 집중해서 사연을 읽던 세나가 낮게 탄식했다.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끝까지 스크롤을 내렸다. 그들은 6년 동안 함께 돈을 모아 서울 변두리 작은 아파트 한 채를 분양받았다. 그리고 몇 명의 지인들만 초대해 조촐한 결혼식도 올렸다. 그들은 그렇게 혼인 신고도 미루고 부랴부랴 신혼여행부터 떠났다. 해안가에서 칵테일을 마시던 두 사람은 새파란 하늘을 수놓는 컬러풀한 낙하산을 발견했다. 패러세일링이었다. 모처럼 여행을 온 김에 즐길 수 있는 건 다 즐기자며 패러세일링을 함께 하기로 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뱃멀미가 심했던 신부는 보트에 남기로 했고, 신랑만 혼자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화창하고 날이 좋은 날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무더위를 식혀주는 맑은 날. 하늘 높이 떠오른 연이 되어 손을 흔들던 신랑의 주변으로 갑자기 돌풍이 불어닥쳤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며 여행을 떠난 두 사람은, 예고도 없이 찾아온 사고에 서로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