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어디까지 넘어왔을까?2021.11.23.
보폭이 넓은 강현의 걸음걸이에 맞춰 총총총, 뒤를 따라 걷는 세나의 걸음도 빨라졌다.
“아, 가르쳐줘요. 네?”
“안 돼.”
그런 노련한 인재가 강현의 비서실장 겸 조사원으로 온다면, 류강현은 지금보다 훨씬 완전체가 될 것이다. 세나는 저만치 앞으로 쭉쭉 치고 나가는 강현을 따라잡지 못해도, 여기서 더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인재를 영입하는 그의 노하우가 꼭 필요했다.
“치사해. 선배, 선배의 사람은 건들지 않을게요. 나만 알고 있을 테니까 비법 전수 좀 해줘요. 네?”
“…….”
“아니, 나 같이 똑똑하고 예쁜 후배가 이렇게 귀엽게 조르는데 안 가르쳐 준다고?”
“너라서 더 안 돼.”
“아! 왜요?! 나 못 믿어요? 내가 막 선배 뒤통수칠까 봐? 제가 또 의리 하면 한 의리 하거든요. 김보성 다음으로 기세나 몰라요?”
“넌 별명이 도대체 몇 개야?”
묵묵하게 앞서 걸어가는 강현은 마구잡이로 졸라대는 세나 때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엔 보일 듯 말 듯 한 옅은 웃음이 걸려있었다.
“진짜, 좋은 곳에 쓸 테니까, 가르쳐 주세요. 선배도 제가 괜찮은 사람 영입하면 더 좋은 거 아니에요? 로펌을 지금보다 더 키우겠다면서요? 제가 도와드린다니까요.”
“안 되는 건 안 돼.”
“아, 왜 안 되는데요? 그럼 이유라도 알려줘요.”
2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참 앞에서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강현의 뒤를 따라오며 졸라대기 바빴던 세나는 그의 넓은 등에 부딪히기 직전 겨우 걸음을 멈춰 세웠다.
“아! 부딪힐 뻔했잖아요……. 갑자기 왜 멈춰요?”
“…….”
그녀가 투덜거리며 강현의 옆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누구라도 있을 줄 알았던 계단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세나의 귓바퀴 속으로 상냥한 강현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 방법으로 널 꼬실 거거든.”
“에이. 난 그런 기술 없어도 이미 선배한테…….”
세나는 나불대려는 제 입을 본능적으로 턱, 막았다. 그가 방금 뭐라고, 했더라. 그의 말에 받아치기 바빠서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내뱉다, 생각지도 못한 수에 또다시 덜컥,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지뢰에 발 한 짝을 올린 세나의 등줄기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짧은 적막이 흐르고 강현은 천천히 몸을 돌려 세나를 마주 보고 섰다. 홉뜬 그녀의 눈이 섬뜩하게 빛나는 새까만 눈동자를 피해 어색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강현은 아무 말 없이 세나를 뚫어져라 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하하,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와, 나 방금 딴 생각했나 봐. 못 들었어요. 뭐라고 했어요, 선배?”
지레 겁을 집어먹은 세나가 괜히 딴청을 부렸다. 그러나 강현은 타고난 사냥꾼이었다. 맹수는 사냥감을 사냥할 때 무턱대고 덤벼들지 않는다. 집요한 시선으로 사냥감을 탐색 후, 인내심을 갖고 목을 잡아챌 때를 기다린다. 지금처럼. 이만하면 많이 봐줬다.
“다 들었으면서 왜 또 못 들은 척하지?”
“…….”
“그거 습관 되면 곤란한데. 자꾸 놀리고 싶어지잖아.”
받아칠 말도 용기도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세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저 멀리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차를 발견했을 때, 다리가 얼어붙어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서. 기세나는 어디까지 넘어왔을까?”
느릿느릿하고 낮은 음의 보이스가 세나의 달팽이관에 콱, 박혔다. 불발탄이길 빌었던 지뢰가 예고도 없이 펑, 하고 터졌다.
***
“변호사님 그거 식초인데요?”
“응?”
세나는 고기가 푸짐하게 담긴 짜장면을 앞에 두고 고춧가루가 아닌 식초를 뿌리려는 참이었다.
“어우. 내 정신 좀 봐. 왜 이러지?”
“아까도 넘어질 뻔하셨잖아요. 무슨 일 있어요?”
그래. 일이 있지. 그것도 아주 큰 일. 이걸 누구한테 털어놔야 속이 시원할까. 아니 그 전에. 류강현이 왜 나를 꼬시려고 하는 거지? 혹시. 그도 나와 같은 계약서를 받았나? 아버지한테? 그러면 좀 말이 되는데…….
“변호사님?”
그래. 이제야 말이 되네. 늙은 호랑이도 발톱은 날카롭다 했다. 삼십 년을 넘게 부모와 자식 간으로 살아왔고, 칠 년을 넘게 그의 밑에서 일했기에 기장수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제 아버지 기장수는 절대 플랜 A만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기세나 변호사님?”
근데, 류강현이 플랜 B라 하더라도, 그가 과연 그런 계약을 받아들였을까? 콧방귀를 뀌며 자신을 뭐로 보는 거냐, 화라도 안 냈으면 다행이다. 또 모르지. K 로펌을 장악하려고 수를 쓰는 걸지도. 아니야. 어차피 이사진들이 알아서 류강현을 밀어줄 텐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기장수의 말에 따르면, 류강현은 다른 로펌에서 많은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이사진들이 그를 영입하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까지 걸었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인사권이었다. 현재 류강현이 K 로펌에서 단시간에 일군 것만 보아도, 그의 능력은 역대 K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었다. 이대로만 가면 가만히 누워있어도 입에 떡이 들어올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막말로 거기에 기세나를 끼워 넣는 건, 다 된 밥에 재 뿌리기였다. 그럼, 도대체 뭐야? 모든 가설을 제외하고 나니, 단 하나만 남았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한 가설. 류강현이 기세나를 좋아한다.
“말도 안 돼…….”
“저기 변호사님, 짜장면 다 불겠어요.”
“말도 안 된다고. 그거야말로 정말 말이 안 되잖아!”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 없던 그녀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이효원이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늘 도도한 고양이처럼 우아함을 뽐내는 그녀가 식당에서 큰소리를 내다니.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변호사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 여기 식당이에요.”
이효원이 세나의 옷깃을 잡고 끌어당기자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식당을 두리번거렸다. 식당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은 별안간 벌떡 일어서서 소리를 빽 지른 여자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머쓱해진 그녀가 그런 사람들을 향해 죄송합니다, 고개를 몇 번 숙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오늘 진짜 이상하신 거 알아요? 진짜 아무 일 없는 거 맞아요?”
“미안. 내가, 맡은 사건이 하나 있는데 남자가 되게 이상하거든. 어, 암튼 밥 먹자.”
세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살피는 이효원에게 크림 새우가 담긴 접시를 슬쩍 밀어주었다. 상아색 소스가 듬뿍 발린 튀김 새우를 한입에 넣고, 새콤달콤함을 음미하던 이효원이 ‘아, 맞다.’ 하고 말문을 열었다.
“기 변호사님, 류 변호사님이랑 사이 되게 좋아 보이시던데.”
불어 터진 짜장면을 입가로 가져가려던 세나가 고개를 들었다. 저건 또 무슨 소리인가.
“저, 류 변호사님 웃는 거 처음 봤잖아요.”
“누가, 웃어??”
“아까 류 변호사님이 변호사님이랑 대화할 때, 은근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던데요. 아, 혹시 두 분 썸 타는 사이? 어쩐지……. 그래서 류 변호사님이 저한테 되게 냉랭하게 구셨구나. 전 그것도 모르고 괜히 상처받았잖아요.”
은근한 미소였다고? 비웃는 게 아니었나? 다른 사람의 눈엔 ‘쌈’이 아니라 ‘썸’처럼 보였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세나가 입을 툭 벌리고 저를 쳐다보자, 제 추측이 맞다 생각한 이효원이 안심하라는 듯, 한 손을 둥글게 말아 입가에 가져대고 속살거렸다.
“기 변호사님, 비밀 연애하실 거죠? 아무래도 보는 눈이 있으니까. 그럼 제가 모른 척해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어딘가 신이 나 보였다. 세나는 본연의 도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효원 변호사.”
“네?”
“신부님이 고해성사 듣다 목탁 두드리는 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
“……넵.”
모든 결과에는 그 결괏값을 도출하게 만드는 원인이 있다. 재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범죄사실을 입증할 증거였지만, 이와 더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범죄 동기였다. 대개는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이거나, 복수 또는 금전적인 이득이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정신이상자거나. 먹은 듯 만 듯한 점심 식사를 끝내고 회사로 돌아온 세나는 곧장 류강현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 문제를 풀어야 할 땐, 정공법만 한 게 없다. 문 앞에 서서 제 뺨을 두어 번 두드려 정신을 차렸다. 일단 치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빠져나올 말들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한 뒤 똑똑, 노크를 했다. 방문을 허락한 목소리에 문을 열자, 류강현이 집무실 책상 너머 가죽 의자에 앉은 채로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안경을 쓴 채로 한 손에 펜을 들고, 서류 위로 쫙쫙 줄을 긋고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나마 콧등에 걸린 안경이 그의 날카로운 눈매를 가려줘서 망정이지, 그마저 없었다면 당장에라도 문을 열고 도망쳐야 할 분위기였다.
“재판 자료 가져왔습니까?”
여전히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강현이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사건은 기존 판례를 검토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일을 이딴 식으로 처리해서 시간 낭비를 합니까? 당장 내일모레가 2차 공판인데, 여태껏 이런 식으로 변론해서 재판에서 이긴 적은 있습니까?”
치밀어 오른 화를 애써 참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잔뜩 억눌려있었다. 그가 내뱉는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어찌나 찬 바람이 쌩쌩 부는지 세나의 입이 절로 다물렸다. 상대에게서 이렇다 할 답이 돌아오지 않자 강현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었다. 문 앞에 황망히 서 있는 세나를 발견한 강현의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왔으면 말을 하지. 왜 거기 그러고 서 있어?”
그가 안경을 벗어 책상 위로 탁, 던지듯 내려놓고 한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후우-’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쉰 강현이 제 얼굴을 가린 손을 치웠다. 찌푸리고 있던 미간 사이가 반듯해지고, 입꼬리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조금 전과 같은 사람이 맞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극적인 변화였다.
“또 뭐가 불만이라서 찾아왔을까?”
미세하게 풀어진 눈매는 날카롭기보다는 다정해 보였고, 뾰족한 고드름인 양 위협적이던 목소리는 감미로운 중저음으로 돌아와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저 남자의 변화가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세나는 철렁 내려앉은 심장을 추스를 겨를도 없었다.
“선배. 혹시 나 좋아해요?”
만약 제가 아는 류강현이라면, 눈살을 강하게 찌푸리며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라는 표정을 지어 보여야 한다. 그럼 저도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르는 체하고 지나쳐 갈 수 있다. 이 모든 게 저의 착각이라고. 술 취해서 한 행동과 그의 말에 너무 심각하게 의미를 부여했다고.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혼을 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강현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당황스러움도 불쾌함도, 그 어느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원래 하려던 질문이 뭐였더라, 세나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
강현은 세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책상 위를 덮고 있던 상체를 뒤로 물렸다. 거리상 멀어져야 하는데, 어쩐지 부피감이 더 커 보여 본능적으로 움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가죽 의자에 등을 기댄 그가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더니, 기다란 검지로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다음 수를 읽어내려는 듯 정적이었다. 곧이어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쓸어내리더니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