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수많은 가설 중 하나2021.11.20.
그런데, 남들보다 이성적이다 못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류강현이, 술에 취했다고 충동적인 행위를 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조차 매우 객관적이다 못해 철저한 사람이? 하물며 그가 술에 취했다는 건 세나의 가설일 뿐이었다. 여기서 하나 더. 술이란 사람의 이성을 비이성적으로 만들 수 있는 매개체이다. 그럼 술이 다 깨고 나서 차에서 한 살랑살랑한 버드 키스는 뭐였을까. 피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지만,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던 촉감은 불에 덴 듯 뜨겁고 생생했다. 세나는 손끝으로 그의 입술이 닿았던 아랫입술을 살며시 쓸어보았다.
“하아……. 미치겠다……. 이 남자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번뇌의 소용돌이와 씨름하느라 잠 한숨 자지 못한 세나는 새벽의 빛이 어스름히 깔릴 때에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 새겨진 키스타임에 대한 가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
“하느님 아버지, 저를 악에서 구원하소서.”
세나는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가 뜨며 믿음이 몹시 부족한 기도를 드렸다. 그녀의 집무실 위치는 2층 복도에서 조금 안쪽이었다. 그곳은 즉, 류강현의 집무실을 반. 드. 시. 지나쳐야만 했다. 평소 기세나보다 출근 시간이 이른 류강현은 그녀가 복도를 지나칠 때면 항상 자신의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등 뒤의 유리창에서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강현은 오늘도 완벽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문제는 그 모습이 오늘따라 너무 멋있어 보여 세나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방 앞을 살금살금, 기민한 움직임으로 빠르게 지나쳤다. 그러나 자리에 앉자마자,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인사는 좀 하고 가지. 안 잡아먹을 테니까.’
쿵, 이마가 집무실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접시 물이라도 있으면 딱 코 박고 싶네.”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세나는 노트북 켜고 검색을 시작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고 했던 최초의 사람은 누구인가. 미국의 심장전문의인 로버트 엘리엇의 저서에서 최초로 나온 말이라는 지식인의 답변을 보았다. 이분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다. 당신은 정말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즐기고 계시는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세나가 바짝 긴장을 한 채 대답했다. 혹시라도 류강현일까 봐.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김정한 비서였다.
“기 변호사, 표정이 왜 그래요?”
“제 표정이 왜요?”
“오늘 재판 있어요? 비장하네.”
쓸데없이 저를 긴장하게 만든 류강현에게 속으로 욕을 한 사발 건네며 쓰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쩐 일이에요? 김 비서님이?”
“대표님이 시간 있으시면 차 한잔하자고 하십니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은 류강현이 아니라 바로 제 아버지 기장수 대표였다. 세나는 콧잔등을 잔뜩 찌푸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녀가 싫은 티를 팍팍 내자 김정한이 다정하게 웃으며 ‘좋은 차가 들어왔어요. 마시고 가요.’ 하고 그녀를 달랬다. 접대용 찻잔에 담긴 국화꽃이 어여쁘게 피었다. 적당히 식은 차는 고유의 향긋함으로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왜 사람들이 명상을 하기 전, 커피가 아닌 차를 마시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 성인 남녀가 술을 먹고 키스 정도는 할 수 있지. 아무렴. 두근거리던 심장도 제 박자를 찾아갔고, 복잡했던 머리도 깨끗해졌다. 아, 상담자를 위해 다양한 허브차를 구비 해 놓을까.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계약조항은 언제 이행할 거냐?”
기대표의 말로 인해 그 마음의 평화가 와장창 깨지고,
“커흑……!”
심신의 안정을 도모했던 향긋한 찻물이 목구멍에서 역류했다. 찻잔의 둥근 손잡이를 들고 있던 세나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자, 찻잔 속 노란 찻물에도 둥그런 파문이 일었다. 그 속에 떠 있는 국화꽃이 풍랑에 흔들리는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잊고 있었다. 가사전담팀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제 아버지와 어떤 거래를 했는지. 계약서를 상기하자 돌연 가슴이 콱 조여들고 빡빡해졌다. 전에 없던 감정이었다. 세나의 낯빛이 어두워지는 것을 확인한 기대표가 눈을 세모나게 뜨더니,
“안 돼. 안 바꿔줘. 바꿀 생각 없어.”
선수 치듯 칼같이 거절 의사를 표했다.
“그런 말 할 거면 나가.”
그는 마치 법 봉을 내리치는 판사처럼 단호했다. 세나가 와락 눈썹을 구기며 기장수를 노려보았다.
“아무 말 안 했는데 왜 설레발이에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머리 아파 죽겠는데, 아침부터 불러서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계약서고 나발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아니면 아닌 거지, 제 아빠를 그렇게 노려볼 일이냐?”
지레짐작하기로 뭔가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머쓱해진 기대표가 큼큼, 목청을 가다듬었다.
“왜 불렀어요? 그거 물어보려고 불렀어요?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세요. 나중에 나한테 지분 뺏겨서 억울해하지나 말고.”
자존심이라면 63빌딩을 세우고도 남는 기세나였다. 어느새 낯에 어두웠던 빛이 싹 가시고, 호기로움이 넘쳐났다. 목표한 건 반드시 이루는 제 딸을 다시 한번 확인한 기대표는 흐뭇한 미소를 찻잔 너머로 감추며 옅게 웃었다. 부녀지간의 오붓한 티타임을 단숨에 정리한 세나가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키자, 기장수는 다급히 ‘혹시 이상한 전화 받은 거 없지?’ 하고 물었다.
“이상한 전화?”
어떤 이상한 전화를 말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없었어요. 이만, 저 가볼게요. 어머니께 안부나 전해주세요.”
그와 동시에 오전에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문건을 떠올린 세나가 바삐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세나는 자신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눈에 띄게 안심하는 기장수의 얼굴을 미처 보지 못했다. ***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세나는 책상 한쪽에 놓인 서류를 챙겨 나왔다. 복도를 지나치는 찰나, 류강현의 집무실을 살펴보았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그의 빈자리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녀가 찾아간 사람은 이효원 변호사였다. 이효원은 뚱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점점 자신의 자리로 가까워져 오는 발걸음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온 기세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세나는 모니터 너머로 서류뭉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가압류 신청서인데, 오늘 중으로 제출해야 할 것 같아요. 남편 쪽 움직임이 수상해.”
“네. 알겠습니다.”
이혼이 진행되는 순간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배우자의 재산조회이다. 재산분할이 진행되기 전 동의 없이 멋대로 처분할 수 없게 가압류 신청은 물론, 숨겨놓은 재산까지 찾아내는 것이 이혼변호사의 일 중 하나다. 현재 소송대리를 맡은 의뢰인은 40대 초반의 여성으로 결혼 생활 10년 차였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10년 동안 숱한 바람으로 아내를 기만한 것도 모자라 이젠 아예 대놓고 두 집 살림을 차렸다. 옛날에야 ‘서방 놈이 죽었더니 빈소가 다섯이다.’라는 우스갯소릴 하고 넘겼지만, 간통죄까지 없어진 마당에 당당하게 바람피우는 것들에게 받아낼 수 있는 거라고는, 재산 일부와 위자료가 전부였다. 그럼, 죄의 무게를 금전으로 환산해 합당한 대가를 받아내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세나는 자신의 의뢰인을 위해, 배우자가 은닉해둔 재산까지 탈탈 털어내는 쪽으로는 일가견이 있었다.
“그리고 상간자 소송도 하고 있으니 그 사람 계좌추적도 부탁해요.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친인척까지 할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
“응. 남편이 보통이 아니야. 직업이 재무 설계사라서 그런가, 재산을 은닉하는 수준이 아주 다람쥐 도토리 감추기 수준이야, 여기저기. 월동준비를 하시나. 특히 상간자 오빠 쪽을 캐 봐요.”
서류를 받아든 이효원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증거수집과 자료 정리 면에서는 K 로펌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그녀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정보 수집은 합법과 불법 사이. 교묘하게.”
“그럼요.”
“그러나 증거는 언제나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걱정 마세요.”
세나가 ‘더 말하지 않아도 알지?’ 하는 표정으로 눈을 찡긋거리자, 이효원이 죽을 짝짝 맞춰 엄지를 추켜세웠다.
“이거 뭐 검찰이 불법사찰을 했네 마네 말이 많더니, 변호사도 만만치 않네.”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세나가 몸을 홱 돌렸다. 언제부터 뒤에 서 있었는지, 강현이 비딱한 표정으로 세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쑥불쑥! 아! 진짜 깜짝이야! 사람이 왜 그래요?”
세나가 한 손으로 목 아래를 꾹 누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강현은 그런 세나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옅게 웃음을 흘렸다.
“어디 갔다 와요? 아까 방에 없던데.”
“인사는 안 하면서 그건 또 궁금해?”
꼭 그렇게 걸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지, 모른 척해줄 만도 한데 그는 바지춤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세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궁지에 몰린 티를 내고 싶지 않은 세나는 턱을 한껏 들고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웠다.
“아침에 못 한 인사 대신 묻는 거로 생각해 줄래요? 아시다시피 아침에 좀 바빴어요.”
“그래. 그렇다 치고.”
“그렇다 치고 아니고, 진짜 그랬다니까요.”
강현은 귓등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채 바득바득 우기는 세나에게 늘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더 괴롭혔다간, 저도 모르게 기세나 한정 못된 짓을 할지도 모르니.
“점심은 어쩔 거야?”
“점심?”
“같이 먹을까?”
“뭐 먹, 아뇨!”
다음 공격을 대비하던 세나는 예상지와 다른 질문에 긴장의 끈이 풀리려던 순간을 다급히 낚아챘다. 하마터면 뭐 먹을 거냐고 물을 뻔했다.
“오늘은 이효원 변호사랑 먹을 거예요. 그렇지?”
그러나 너무 티 나게 피한 게 아닐까 싶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핑계를 댔다. 세나가 멀뚱히 서 있던 이효원에게 눈치를 주자, 그녀가 더듬더듬 맞장구를 쳤다.
“아, 아 네. 오늘 점심-.”
“내가 사준다고 했잖아. 맛있는 거.”
“그 맛있는 거 나도 먹고 싶은데.”
주말 내내 이 인간이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느라 뭘 먹어도 얹힌 기분이었다. 그런데 오늘 점심마저 그와 먹게 된다면 스트레스성 위염으로 응급실을 찾을지도 모른다.
“다음에요. 오늘은 여자들끼리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세나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류강현의 얼굴에서 아쉬움이라곤 1도 읽히지 않았다. 그는 흔쾌히 거절을 받아들이고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흔들며 인사를 대신했다. 조금씩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바스락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작게 한숨을 뱉었다. 왜 또, 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알 수가 없다. 세나는 그가 더 멀어지기 전 강현을 따라나섰다. 하이힐을 신은 발을 빠르게 놀려 그의 뒤에 바짝 붙었다. 분명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 강현은 돌아보지 않았다.
“어디 갔다 와요?”
“인사과.”
“인사과는 왜요? 누구 스카우트했어요?”
“지난번 말했던 검사실 계장님.”
K 로펌에서 일이 가장 많은 강현이 비서실장을 공석으로 둔 이유는 원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전의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호기심이 발동했다.
“오오. 드디어 오시는구나. 경력이 얼마나 되시는데요?”
“십오 년쯤 되셨으니까, 급수로 치면 5급 정도 되시겠지.”
“5급? 5급이면 높은 거 아니에요?”
보통 검찰 수사관 5급이면 현장직 일보다는 낮은 급수의 수사관들을 후방에서 진두지휘하는 관리직으로 전향한다. 오랜 세월 수사관을 거쳐 5급까지 올라간 그 계장님의 경력도 경력이었지만, 수사관 일이 적성에 맞는다며 관리직을 고사했다는 말에 더욱 놀랐다.
“그런 분이 철밥통을 버리고 선배한테 온다구요? 대단하다. 어떻게 꼬셨대요? 하여튼 사람 꾀는 재주가 남다르다니까. 비법이 뭐예요? 나도 좀 알려줘요.”
“영업비밀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