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우린 공범이야2021.11.16.
쾅쾅쾅! 주먹으로 문을 세차게 내려치는 소리가 호텔 복도를 가득 울렸다. 때아닌 소란에 객실의 손님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와 현장을 목격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 다가섰던 사람은 독이 바짝 오른 한 남자의 흉흉한 기세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다시 객실 안으로 들어가 혹시나 있을 사태에 대비하듯 단단히 방문을 걸어 잠갔다. 채성민은 목구멍을 울컥 틀어막는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열리지 않는 문에 대고 연거푸 주먹질했다. 차마 안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는 게 분통스러웠다. 오 분이 넘도록 지속하는 주먹질에 드디어 문 너머에서 비척대는 인기척이 들렸다. 띠리릭, 도어록이 해제되기 무섭게 채성민이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아……. 시끄러워서 잠이 다 깼잖아……. 너 때문에.”
“너……!”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채성민은 일단 객실 문부터 재빨리 닫았다. 황유라는 수치심이라곤 모르는 여자였다. 여미지 않은 나이트가운 앞섶 사이로 둥근 가슴골을 훤히 드러내 놓은 채, 잔뜩 헝클어진 머리칼을 벅벅 긁은 그녀가 늘어지게 하품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래 속옷은 입고 있다는 거였다. 손바닥만 한 검은색 티 팬티였지만. 채성민은 황유라의 어깨를 밀치고 구둣발로 성큼성큼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하……. 미친X…….”
고급 스위트 룸을 이렇게까지 아수라장으로 만들 수 있는 황유라의 능력에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에 채는 샴페인 병들. 바닥을 어지럽히는 건 빈 병들만이 아니었다. 전화를 꺼놓고 광란의 파티라도 열었는지, 잘게 잘게 찢어진 휴짓조각들이 카펫에 박혀있었고, 형체를 알 수 없는 꽃잎들과 노란색 지폐가 뭔가에 젖은 채로 객실 여기 저기에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난장판 속에 벌거벗은 한 남자가 몸뚱이에 오만 원권 지폐를 붙인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한 놈이 아니었다. 소파도, 침대도, 살색 향연이었다. 하나같이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어린놈들이었다. 채성민은 자신과 제일 가까운 곳,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놈에게로 다가가 다짜고짜 뺨을 후려쳤다. 황유라를 치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는 울분을 담아 한 대 더 내려쳤다. 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남자의 고개가 좌우로 휙휙 꺾이자, 그는 그제야 고통을 느끼는지 가물가물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의 초점이 돌아온 남자가 힉, 쇳소리를 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 당장, 네 친구들 데리고 여기서 나가. 내일 아침 쥐도 새도 모르게 인천 앞바다에 처박히기 싫으면.”
채성민의 경고에 남자는 바닥을 뒹구는 옷가지를 주워들고는 침대와 바닥에서 기절하듯 잠든 친구들을 깨웠다.
“뭐에 그렇게 열 받아서 죄 없는 애들 겁주고 그래.”
황유라는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자들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깡패 아니고 내 변호사야. 이쁜이들아. 나갈 때 바닥에 떨어진 돈은 잊지 말고. 누나 선물이야. 이틀 동안 같이 놀아준 값은 챙겨야지?”
채성민은 옷가지와 지폐들을 주섬주섬 챙기는 놈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남자들은 뜻하는 바를 몰라 눈만 멀뚱멀뚱했다. 채성민은 짧은 욕설을 뇌까리며 ‘핸드폰 내놔. 사진 찍은 거 있는지 확인하게.’ 하고 눈을 부라렸다. 남자들은 행여라도 손에 쥔 돈을 뺏길까, 재빨리 핸드폰을 내밀었다. 사진첩과 메신저를 샅샅이 살핀 다음, 닿기도 싫은 물건을 만졌다는 듯 성의 없이 툭 핸드폰을 던졌다.
“그거 부서지면 다 돈이야. 살살해.”
“넌 입 다물고 옷이나 입어.”
“옷?? 아.”
킥, 웃음을 터트린 황유라가 객실을 살피다 어딘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거?”
그녀가 발가락으로 바닥을 뒹구는 물체를 집더니 그의 앞으로 툭, 던졌다. 채성민의 눈동자가 제 발치 아래 떨어진 덩어리를 확인했다. 하얀 얼룩과 술에 젖은 원피스는 옷이 아니라 넝마였다.
“비서실장한테 새로 하나 사 오라 해.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 알지?”
함께 뒹굴던 남자들이 사라지자, 어수선했던 객실 안이 을씨년스러워졌다. 황유라는 침대 끄트머리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꺼놓았던 핸드폰을 켜자마자, SNS에 접속하는 그녀였다. 술과 피로에 찌들었던 얼굴은 업로드를 위해 사진첩을 뒤적이는 동안만큼은 희번덕한 생기를 되찾았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채성민은 황유라의 앞으로 다가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너도 핸드폰 내놔.”
“싫어. 나 사진 올려야 해.”
“아직 감이 안 오지, 황유라.”
“왜? 뭔데, 왜 여기까지 찾아와서 지랄을 떠는지 들어나 보게.”
약을 올리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한쪽 다리를 까딱까딱, 마주 보고 서 있는 채성민의 다리를 툭툭 쳤다. 채성민은 마음속에 참을 인을 새기며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힘이 바짝 들어간 턱 아래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요즘 화가 자주 나나 봐. 채성민. 또 뭐가 필요해서 이렇게 앙칼지게 구는데?”
황유라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어 든 채성민은 그녀의 사진첩에 담긴 사진을 싹 지워버렸다. 이딴 사진을 찍기 위해 돈을 얼마를 썼든 말든 상관없었다. 휴지통까지 비운 채성민이 이번에는 연락처를 뒤졌다.
“동영상에 찍힌 놈. 누구야.”
“누구?”
“호스트바에서 만난 놈.”
“그걸 누가 기억해?”
“기억해 내는 게 좋을 거야. 돈으로 무마할 수 있을 때.”
“아, 몰라.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냐? 그거 하라고 연봉을 몇 억씩 주는 거잖아?”
“신사, 청담, 압구정, 가게가 어딘지만 말해.”
“신사였나, 아니다 청담이었나? 어쩌면 세 군데 다일수도. 킥. 우리 채성민이 바쁘겠네.”
“황유라! XX, 하루라도 사고를 안 치고는 살 수 없어?”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황유라의 표정이 스멀스멀 일그러지더니, 그녀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깔깔깔 그러다 꺽꺽, 배를 잡고 구르기 시작했다. 미친X이 따로 없었다.
“아, 간만에 웃겼다.”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힐 때까지 웃어 젖히던 황유라가 졌다는 듯 손을 앞으로 휘휘 젓더니 고양이 같은 눈매를 치켜떴다.
“너 뭐 잘못 먹었니? 아니면 갖고 싶은 거 생겼어? 그래서 그래?”
“…….”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손뼉을 짝, 마주치며 이제야 알겠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법무팀 팀장 자리. 그것 때문에 그래?”
류강현이 수십억의 연봉 제안에도 거절했던 자리.
“그거 거절한 사람이 네가 아는 사람이라며. 우리 채 실장, 자존심 많이 상했구나. 내가 아빠한테 팀장 자리 너 주라고 할까?”
이젠 저도 필요 없다. 그저 이 시궁창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 썩은 물을 정화하려면 몇십 배에 달하는 깨끗한 물을 들이부어야 한다. 그런 비효율적인 짓거리를 할 바에, 애초에 깨끗한 물로 옮기는 게 합리적이지.
“이제 그만하자. 이 짓거리도 지친다.”
“뭘 그만해? 왜?? 와, 너 진짜 욕심도 많다. 팀장 자리 까짓것 주면 되잖아.”
“필요 없어. 내가 변호사인지, 네 뒤 똥이나 닦아주고 사는 개새끼인지. 진절머리가 나서 그래.”
“웃기시네. 내가 널 하루 이틀 봐? 목줄을 느슨하게 해줬더니, 고새 딴 주인이 눈에 들어왔니?”
‘딴 주인’이라는 말에 채성민의 삐뚤어진 입술을 뚫고 조소가 흘러나왔다. 주인. 그래. 황유라와 저와의 관계를 정확하게 짚는 단어였다. 참으로 비루하고 지긋지긋한 인생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위치에 서면 이런 비참한 기분을 더는 느끼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꿈도 꾸지 마.”
황유라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채성민의 멱살을 잡아챘다.
“내가 미국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널, 내가 놔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 뒤꿈치를 들며 몸을 가까이 맞붙였다. 그녀가 립스틱이 흉하게 뭉개진 입술을 채성민의 귓가에 바짝 붙였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찐득한 숨결은 썩은 내를 풍겼다.
“잊은 건 아니지? 우린 공범이야.”
머릿속을 파고드는 역한 냄새에 채성민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보이지도 않는 쇠사슬이 절그럭, 환청이 되어 그의 목을 옥죄어왔다. *** 요가 매트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세나가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고를 반복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이었다. 피곤함에 축축 늘어지는 몸뚱이와는 달리 술이 깰수록 머리는 말똥말똥해졌고, 산책로에서 있었던 일과, 그의 차 안에서 있었던 일이 번잡스럽게 마음을 헝클어트렸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아릿하고 손끝이 간질거렸다. 그와 동시에 쪽도 팔렸다.
‘후-. 깨끗한 정신, 맑은 마음. 아니 깨끗한 마음, 맑은 정신.’
흔들리는 상체를 곧추세우며 다시금 명상에 잠겼다. 아랫배가 땅땅해지도록 들숨을 마시고 숫자를 세며 아주 천천히 날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은 채로 무릎 위에 올려둔 두 손의 손끝을 하나씩 하나씩 헤아리며 집중을 하면 할수록, 예쁘게 휘어지는 입술이. 저를 또렷이 직시하는 검은 눈동자가. 코끝에 옅게 남았던 특유의 청량한 향이. 마치 뇌 어딘가에 새겨진 듯 자꾸만 떠올랐다.
“아아악!!”
세나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머리를 벅벅 긁으며 발을 굴렀다. 아랫집에서 어떤 미친X이 널을 뛰는구나, 층간 소음으로 쫓아와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왜, 왜. 하필 기억이 거기서 끊기는 건데!! 왜!!! 내가 뭘 그렇게 잘못 살았다고! 제가 전생에 나라라도 팔아먹었나요?”
정말 가까운 성당에 가서 기도라도 드리고 싶었다.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하면 신이 응답해 줄까? 귓가에 가스펠이 들리는 것 같았다.
‘어린양아, 눈을 뜨거라. 그리고 보아라.’
‘떴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 그것이 너의 미래이니라.’
미래처럼 캄캄한 현실로 돌아온 세나는 다시 침울해졌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건지. 결과는 있는데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모름지기 남녀관계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를 향한 호감으로 시작해서, 그 팽팽한 감정의 줄다리기 속 케미컬을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신체접촉이 이루어지는 법인데. 물론 첫눈에 반해 귓가에 ‘댕-’ 성스러운 종소리가 울리는 상황도 있겠지만,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까 일단, 패스. 그건 특별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나 있을 법한 일이고. 찌질하고, 구차하고, 거지 같은 꼴을 다 본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확률은 몇이나 될까? 게다가 그 여자의 성질머리가 깔깔하고 고집이 세다면? 최악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가 어디 하나 하자가 있지 않은 이상, 아니면 박애주의자인가?
“박애주의? 류강현이?”
풋, 세나는 자신이 떠올린 가설에 실소했다. 가당치도 않은 가설이다. 가설은 무슨, 옆집 멍멍이가 왈왈 짖는 소리지.
“아니면, 내 원수를 사랑하라. 뭐 이런 건가?”
이왕 신을 찾아본 김에 유명한 성경 구절을 새로운 가설로 세워보았다. 그러나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류강현이다. 애초에 자신의 원수를 사랑할 이였으면, 박애주의뿐만이 아니라 아가페적인 사랑도 할 인물이었을 터. 하지만 아무리 과거를 되짚어보아도 그가 누구를 사랑으로 어루만져 준 적은 없었다. 조져준 적은 있어도.
“그러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냐고!!!”
소파에 벌러덩 누워 좌우로 굴러다니다 쿠션을 뻥뻥, 차기를 수차례. 답답한 마음에 벌떡 일어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거실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럼 남은 가설은 하나다. 술. 자신은 필름이 끊길 만큼 많이 마신 게 사실이니. 류강현 그 역시 사리 분별이 어려울 정도로 몹시 취했던 게 틀림없다. 술에 취해, 별빛이 내리는 분위기에 취해, 산뜻한 봄바람에 취해. 그 순간, 옆자리에 누가 있든 상관없이. 느닷없이 야구장 전광판에 얼굴이 띄워져 키스타임을 갖는 사람들처럼. 류강현과 기세나는 그 시간에 키스타임을 가진 것이다.
“그래, 이게 제일 말이 되지. 설마, 선배가 내가 좋아서일 리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