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실수2021.11.13.
“누구보다 빠를 필요는 없고.”
강현의 단호함에 하정수는 씩 웃으며 눈썹 위로 오른손 손날을 꼿꼿이 세워 경례했다.
“그럼 안전하게 흠집 하나 없이 모시겠습니다!”
차 키를 받아든 하정수는 감격에 겨운 눈으로 빨간색 스포츠 차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꼭 눈밭에서 뛰어다니는 강아지처럼. 씰룩쌜룩, 엉덩이 쪽에 없는 꼬리가 보일 것 같다. 그 나이대 남자들이 스포츠카에 열광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는 터라, 세나는 흔쾌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회사 주차장에 놔둘 필요 없어요. 그냥 타고 갔다 내일 회사로 끌고 와요.”
“진짜요???”
“대신 아무 데나 끌고 다니지 말고요. 보험은 가입되어 있는데, 그래도 하 변호사가 다치면 안 되니까.”
“아아-, 기세나 변호사님은 혹시 천사세요?”
하정수는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무릎을 꿇으려 하자, 세나가 인자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하정수는 그 손바닥에 정수리를 비비며 그녀가 하사한 은총을 달갑게 받았다.
“이제 그만하고,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월요일 날 봅시다.”
사람들이 깔깔 웃으며 차에 올라탔고, 하나둘 펜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하정수가 끌고 가는 제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나가 마지막으로 강현의 차에 올라탔다.
“근데 무슨 할 말이요?”
세나는 올라타자마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바로 물었다. 아직 시동도 걸기 전이었다.
“하아…….”
그의 입에서 또다시 한숨이 터졌다.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아까부터 저만 보면 한숨을 푹푹 쉬어대는지. 이제 그에게 슬슬 짜증이 나던 차였다.
“그럼 그렇지. 한치의 예상도 틀리지 않는다니까.”
이제는 아예 고개까지 잘게 저으며 쓰게 웃는 모습에 뭔지도 모르고 울컥했다.
“아, 뭔데요?! 아침부터 나만 보면 한숨 쉬었던 거 알아요? 할 말이 있으면 남자답게 딱! 얘기해요! 내가 뭐 잘못했어요? 아니면 워크숍에 불러놓고 술만 먹어서?? 시간 낭비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그럼 오지 말지, 왜 왔어요?”
소낙비처럼 다다닥, 쏟아붓는 말에 강현이 핸들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몸을 완전히 틀어 세나를 보았다. 까만색 눈동자가 뾰로통한 얼굴에 일직선으로 꽂힌다.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만 있는데, 왜인지 숨이 턱, 막히는 세나였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왜 갑자기 그 속담이 떠올랐는지. 그런데 강현이 이러는 이유가 제 구멍 난 기억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대개 잘 맞는다.
“혹시……. 어제…….”
“어제…….”
“제가 뭐 실수를 했어요……?”
“실수…….”
강현이 느릿느릿 혀를 굴려 그녀가 내뱉은 말을 따라 발음했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잔뜩 낮아진 목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혹시! 호랑말코가 자기인 거 알았나?! 어떻게 알았지??? 절대 걸릴 수 없게 자연스럽게 잘 대처하지 않았나? 세나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져서 어쩔 줄을 모르고 흔들렸다.
“실수는 내가 했지.”
“……네?”
“술에 취하면 필름이 끊긴다는 거 뻔히 알고 있었는데.”
“그게…….”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했어. 기세나한테.”
강현의 상체가 조금씩 보조석으로 넘어왔다. 그가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세나의 얼굴 위로 드리워질수록 그녀의 안색이 허옇게 질려갔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지. 나노 단위로 더듬어보아도 산책로를 가기 직전에서 끊겨있었다. 산책로로 안 가고 방으로 들어갔나? 바비큐장에 선배를 혼자 두고?
“……제 술버릇이 좀 많이 마시면 곱게 들어가서 잘 자는 거라. 귀소…… 본능에…… 충실해……서.”
“그래?”
“……그래서…… 선배가…… 실수를…… 하실 게…… 없을 건데……요……오…….”
말꼬리가 점점 길어지고,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를 두둔해보았다. 그러면 기분이 좀 풀릴까 해서. 그러나 강현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의 넓은 어깨가 이제는 완전히 세나의 시야를 가렸다. 사위를 장악하는 기운에 세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옹송그렸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날카로운 턱선에는 당장이라도 저를 베어버릴 것처럼 힘이 실려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호수를 연상케 하는 그의 눈동자가 유달리 빛을 발한다.
“지금은 맨정신이고?”
“네……. 네?! 넵. 아주 맨정신입니다.”
“필름 끊길 일 없겠네?”
“……어……없겠죠?”
“그럼 어제 내가 했던 실수, 다시 해도 되나?”
조금씩 가까워져 오는 그의 얼굴과,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야릇하기까지 했다. 세나는 두 손으로 입을 턱, 막으며 숨을 멈췄다. 그녀의 행동에 강현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삐뚜름하게 웃었다.
“머리는 잊었는데, 몸은 기억하고 있나 봐?”
“…….”
그 순간, 누가 뒤통수를 후려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퍽, 낯선 기억이 떠올랐다. 맞물려 있는 입술 사이로 아찔한 숨결이 오가고, 촉촉한 것이 얽히고설킬 때마다 단맛이 났다. 멍하니 밤하늘을 담았던 눈꺼풀이 스르륵 닫힐 때, 두 손은 상대의 검은 머리칼 사이로 파고들었다. 고개가 비틀어진 만큼 깊게 맞물렸고, 그만큼 갈증이 일었던 감각이.
“선배……. 입술이…… 되게……. 음……. 생각보다…… 부드럽고…….”
“기세나……. 키스할 때 말하는 거 아니야.”
살짝 떨어진 두 입술 사이로 반짝이는 은빛 실이 매달리고,
“처음 보는 맛인데, 맛이 좋네요…….”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훔치며 미슐랭가이드라도 된 듯 입맛을 다셨다.
“더, 해보면 알까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세 번째 입술이 맞물리는 순간, 세나의 기억도 거기서 또 끊겨있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남자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지 저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모래사장을 덮치는 파도처럼. 잊었던 기억이 부끄러움이 되어 세나의 얼굴 위를 덮쳤다. 하얗게 질린 낯빛은 순식간에 목 아래서부터 빨갛게 달아올랐고, 그녀의 밤 갈색 눈동자가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뭔가 기억났나 본데?”
들썩이는 눈썹과 샐쭉 휜 입매는 좋아하는 여자를 향한 어린 소년의 심술과 닮아 있었다. 세나는 입을 막고 있던 손으로 강현의 가슴팍을 퍽 밀치고, 그 손에 제 얼굴을 묻었다. 평온했던 속이 난데없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미친, 미친, 미친 기세나! 울고 싶다. 아니, 지금 여기 가만히 앉아있을 게 아니라, 당장 차에서 내려야 한다. 그리고 절벽이 있다면 달려가 뛰어내리자. 이번 생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아-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그 숱한 날들을 열정적으로 살았던가. 삶의 끝은 이다지도 허망한 것을.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쌕쌕 밭은 숨을 내뱉었다. 제 안의 그의 존재가 사라질 때까지. 그러나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몸집을 부풀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기세나.”
“……왜 대한민국은 총기 사용이 불법인가, 하는 생각이요.”
“그걸로 날 쏴 죽이게?”
“아뇨. 내 머리를 쏘려구요.”
머리통에 구멍이 나면 이 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러움은 배가 되어 이제는 귓불까지 발갛게 익었다. 강현이 쿡쿡, 낮게 웃으며 세나의 양 손목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시뻘겋게 익은 얼굴을 보여줄 수 없던 세나는 팔이 빳빳해지도록 힘을 주고 버텼다. 그러나 그가 손목을 잡은 손을 쭉 당기자,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녀의 손이 맥없이 끌려 내려갔다. 차라리 안 보련다, 세나는 눈가에 주름이 잡히도록 눈을 꾹 감고 창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예쁘기만 한 줄 알았는데, 귀엽기까지 하니. 내가 못 배기지.”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자, 세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가 아주 가까운 곳에 멈춰있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청량한 향. 향수인지, 아니면 스킨로션 냄새인지. 숨을 멈춘 채로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소원했다. 10초, 20초, 30초. 숨을 참고 견딜수록 얼굴은 더욱 홧홧하게 달아올랐고,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을 쳤다. 산소 주입을 원하는 폐가 쪼그라들어 고통스러워질 때쯤, 억지로 닫아놓았던 숨통이 본능적으로 팍, 트였다. 그때였다. 들숨과 함께 입술이 쪽, 가볍게 맞부딪힌 건. 세나의 숨은 트이기 무섭게 다시 멎었다. 그리고 토끼처럼 놀란 눈이 기어이 상대를 담아낸다. 그가 웃는다. 입술을 양쪽으로 길게 늘어트려서 아주 근사하게. 심장이 바닥까지 철렁 내려앉았다 다시 제자리를 찾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숨이 멎은 것처럼 시간도 멈춘 것 같았다. 그의 너머에 펼쳐진 녹음의 푸릇푸릇함은 흐릿해지고, 오직 그의 얼굴만이 선명하게 뇌리에 쿵, 박혔다.
차가 멈춰선 지 한참 돼서야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오피스텔 앞이었다.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곳에 저를 데려온 남자를 찾아 삐거덕 고개를 돌리자, 강현이 두 손으로 핸들을 끌어안은 채 지긋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뭐……. 왜, 그렇게 봐요?”
“신기해서. 눈 뜨고 자는 사람 처음 봐.”
“자긴 뭘 자, 안 잤거든요?!”
“그럼 고장 난 건가?”
그가 핸들을 끌어안고 있던 한 손을 빼 세나를 향해 뻗었다. 곧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귓등에 걸어주며 또 피식 웃었다. 부드러운 손길만으로도 마음이 간질간질해지는데, 저놈의 미소. 저놈의 미소가 너무 근사해서 문제였다.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의 울림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쩌다 류강현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된 건지 사태 파악을 하기에 앞서, 일단은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저, 갈게요. 데려다줘서 고맙습니다. 아니. 하나도 안 고마워요. 나도 차 있었는데, 누구 때문에, 아. 암튼, 잘 가요.”
세나가 횡설수설하며 차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도망치듯 몸을 밖으로 내밀었는데, 몸이 잡혀 도로 안으로 끌려왔다.
“나중에요, 나중에 얘기해요. 지금. 할 말이 안 떠오르니까,”
“…….”
당황한 자신이 무슨 헛소리를 할지 몰라 겁이 났다. 원래 쪽팔리면 쓸데없는 말을 툭툭 내뱉게 되니까.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류강현이다. 혼자만의 명상의 시간을 가진 후 침착하게 그를 상대해도 이길까 말까 한 사람이다.
“기세나, 잠깐만.”
“선배. 진짜 나 지금 너무 피곤해요. 알다시피 어제 술도 많이 마셨고, 우리 이 얘기 내일-.”
“아니 그게 아니라.”
“아, 좀! 놔요!!”
제발! 오늘 말고 나중에 얘기하자는데 왜 이렇게 질척거리는지. 부끄러워하는 저를 보고 재밌는 장난감이라고 생각하나 싶어, 화가 난 세나가 몸을 버둥거리려는 그때, ‘찰카닥’ 이음새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몸이 자유로워졌다. 그녀가 차에서 내리지 못하게 붙잡고 있던 건, 류강현이 아니라 시트벨트였다. 아. 오늘 밤. 아무도 모르게 앞산에 올라 땅을 파야겠다. 그리고 축축한 흙바닥에 몸을 누이고 조용히 눈을 감고 싶다. 인간의 영혼 무게는 21그램이라는 말이 있다. 그 깃털 같은 무게에 삶의 회한이 다 담길까. 오늘 한번 체험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