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기세나 한정 못된 짓2021.11.06.
아직 끊기지 않는 신호와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 똑똑히 적힌 네 글자가 징징대는 울림과 함께 액정을 장식했다. 호. 랑. 말. 코. 갑자기 나타난 인기척에 놀란 세나가 숨을 헉, 들이키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다 머리가 팽 돌아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순간, 강현이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싸 넘어지는 걸 간신히 막았다. 손에서 이탈한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로 꺼지지도 않고 여전히 진동했다. ‘호랑 말코’라는 이름을 띄운 화면을 번쩍거리며. 술이 확 깰 정도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선배.”
“…….”
“이게, 이게, 말이죠. 아니, 이건, 그. 뭐랄까. 애칭. 그래. 선배를 부르는.”
“아. 애칭? 내가 알고 있는 애칭의 사전적인 의미와 참 달라서 미처 몰랐네.”
“아니, 애칭이, 어.”
“겁도 없이 선배한테 호랑 말코라.”
핸드폰을 주워 건네는 강현의 눈빛에 주눅 든 세나는 뭐라 변명을 하려 입술을 달싹거리다, 제풀에 지쳐버렸다. 술도 취했겠다, 죽이려면 죽여라. 에라이, 모르겠다는 용기가 불끈 솟았다. 아까 이효원과 암수 한 쌍 정답게 군 것도 꼴 보기 싫었는데.
“아. 몰라. 그냥 그땐 나한테 선배가, 호랑 말코였으니까. 뭐 어쩔 거야.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거야 뭐야.”
“얼씨구?”
“그러니까, 나한테 좀 잘하지 그랬어요?”
“내 탓이라 이거야?”
“어. 선배 탓. 내가 취한 것도. 선배가 호랑 말코인 것도. 다 선배 탓.”
“이젠 말까지 놓는다고?”
“원래 이런 데 오면 야자타임도 하고 그러면서 친해지는 거지. 친구가 없어서 그런 것도 모르나?”
세나가 제 잘못을 감추려 도리어 세게 나오자, 강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긴, 술 취한 사람을 상대로 뭔 말을 하겠는가. 이미 눈도 혀도 다 풀려서 제 몸 하나 똑바로 가누지도 못하는데. 장단이나 맞춰주자, 싶어 강현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우리 후배님은 어떤 대접을 받고 싶어서 대뜸 야자타임을 시작하셨나?”
“…….”
강현이 기껏 돗자리를 깔아줬더니 세나가 잠시 비쭉거리던 입을 조개처럼 다물어버린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실컷 가지고 놀다 제자리에만 갖다 놔.”
산책로엔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머리 위엔 은하수가 흐르고, 사위는 고즈넉한 어둠에 둘러싸였다. 시원했던 바람이 조금 스산하게 느껴질 때쯤, 세나의 머리가 강현의 어깨 위로 툭 내려앉았다.
“기세나. 졸리면 방에 들어가서-.”
“선배. 별 되게 이쁘다, 그쵸?”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어깨가 불편한지 세나는 이리저리 머리를 비비적거리다 이내 편안한 자세를 찾고는, 알싸한 숨을 뱉었다. 그녀의 달콤한 체취가 바로 코앞에서 어른거렸다. 어깨에 올려진 무게가 심장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
강현은 절로 힘이 들어간 허리가 불편해 등줄기를 꼿꼿하게 세웠다.
“예뻐요. 안 예뻐요?”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서울의 하늘이나 경기도의 하늘이나. 그 밤하늘이 다 똑같지. 뭐가 그리 낭만적이라고. 저 밤하늘보다 제 어깨에 기대어 있는 기세나가 더 신경 쓰였다.
“왜인지 마음이 설렐 만큼 예쁘지 않아요?”
“예뻐.”
강현은 밤하늘 한번 쳐다보지 않고 대답했다. 왜냐면 밤하늘보다 지금 제 옆에 기세나가 더 예쁘니까.
“이효원 변호사 어떻게 생각해요?”
“뭐?”
“아까 보니까 좋아 죽던데. 이효원이 선배 옆에 딱 붙어서 막 재잘재잘거리는 거 다 봤는데. 귀엽죠? 애교도 많고, 예쁘고. 어리고.”
“너도 어려.”
“서른둘이나 된 여자한테 어리다니. 너무 영혼 없다. 남자가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종족 번식 때문일까요?”
밤하늘의 별을 그리다가 갑자기 이효원이 어떠냐 묻더니, 이제는 인간의 궁극적인 삶에 대해 토로한다. 강현은 세나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맥락 자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묵은지를 찾는 것처럼 너무 뜬금없었다.
“기세나. 혹시 주사가 신내림이야? 막 모르시는 분이 들어왔다 나갔다 해?”
“모른 척하기는. 그렇게 예쁘고 어린 친구가 방긋방긋 웃으면서 귀염 떨면 시베리아 벌판에서 꽝꽝 얼어붙은 눈사람도 사르르 녹겠던데 뭐.”
이효원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가져본 적 없던 강현은 머릿속으로 이효원을 떠올려보았다. 예쁘고, 귀엽다? 글쎄. 그런 것치고는 인상이 흐릿해 세나의 말이 선뜻 와닿지 않았다. 달걀귀신처럼 생긴 여자가 어디가 귀엽다는 건지. 아까만 하더라도 쓸데없는 말을 붙이는 통에 조금 귀찮았던 차였다. 그래서 통화 좀 하고 오겠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했다. 물론 기세나를 뒤쫓아 오기 위해서였지만.
“나는 선배가 참 어려운데, 이효원은 선배를 참 쉽게 대한다, 싶어서.”
그건 더더욱 틀린 말이다. 이효원이 저를 쉽게 대한다니. 왜 기세나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가깝지 않은 상대를 대할 때 류강현은 확실히 달랐다. 일단 보내는 눈길부터 말투까지. 상대가 거리감을 느끼도록, 마음에도 없는 친절은 물론 여지도 주지 않는다. 그 친절과 여지는 모두 기세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지금 자신이 여기까지 와 있는 이유가 도대체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저 조막만 한 머리통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류강현이 유일하게 답을 내릴 수 없게 만드는 단 한 사람. 답답한 마음을 한숨에 가득 담아 뱉었다. 눈치가 없는 기세나. 정말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얼마나 더 쉬워야 하지?”
“네?”
“기세나. 언제쯤 눈치챌래? 내가 너한테만 쉽게 굴고 있다는 거.”
세나가 강현의 어깨에서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조금 내밀더니, 고개를 돌려 강현과 마주 보았다.
“나한테만?”
“알아들었으면서 뭘 못 들은 척이야? 다시 말해줘?”
살짝 풀린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거리다 속눈썹 속으로 쏙 숨어들었다. 고개를 픽 떨군 세나가 그의 말을 곱씹었다.
“류강현이 나한테만 쉽게 군다고?”
“그래. 기세나 한정.”
“와……. 나한테만. 나한테만.”
세나는 ‘나한테만.’이라는 말을 중얼중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취한 애를 데리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자괴감이 든 강현이 머리를 절레절레 젓다, 벤치에 등을 기대고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다 갑자기 들뜬 목소리에 눈을 떴다.
“선배. 나 질투했나 봐. 아까.”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아니. 나, 아까, 이효원이랑 같이 있는 거 보고 막 여기가 갑갑했는데. 선배! 와, 선배가 나한테만 쉽게 군대. 그거 되게 기분 좋다.”
“…….”
그녀는 알까?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또 또, 또 나한테만 해주는 거 뭐 있어요?”
신이 난 목소리로, 강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별빛이 가득 담긴 커다란 눈동자를 어여쁘게 반짝이며, 두 뺨을 물들인 분홍빛이 꽃처럼 사랑스럽게. 어두컴컴한 밤에도 그녀의 입술이 유혹적으로 느껴질 만큼 선명하게 움직였다.
“말해봐요. 나한테만 해주는 거.”
사르륵 반달처럼 휘는 눈매가, 너무 예뻐서. 강현은 세나가 지금 취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판단을 내릴 새도 없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세나의 뒤통수를 덜컥 잡아챘다. 그대로 살짝 힘을 실어 당기자, 그녀의 얼굴이 속수무책 강현의 앞으로 끌려왔다. 서로의 숨결이 닿는 바로 코앞에서 멈췄다. 그녀와의 거리 1cm를 남겨두고 강현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취기가 가득했던 세나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떠졌다.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입술이 맞닿았다. 말랑하고 촉촉한 입술에서 전해지는 온도가 뜨겁다. 강현은 열기를 가득 품은 눈으로 그녀의 밤색 눈동자를 직시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제 모습이 어린양을 유혹하는 늑대처럼 욕망에 사로잡혀있었다. 이런 모습도 나쁘지 않다. 기세나라면. 강현이 혀끝으로 세나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짝 건드리자 툭, 맥없이 벌어졌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다디단 그녀의 입속을 파고들었다. 알코올의 씁쓸함보다는 사르륵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솜사탕의 달콤함이 느껴졌다. 밤하늘에 박혀있던 별들이 전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 모양이다. 이토록 아찔한 것을 보면. 덜컥, 숨이 멎어버린 그녀를 위해 강현은 입술을 떼고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벌려놓은 대로 벌어진 입술과 여전히 눈 하나 깜빡이지 못하는 세나를 보며 다시금 제 마음을 확인했다. 기세나 한정. 기세나에게만 하는 못된 짓.
“이번에는 눈 감아.”
고개가 또다시 비스듬히 기울고 교차하는 숨결이 조금씩 열기를 더해가는 밤이었다. 별빛이 내리는.
< 후일담 > 자리에 앉은 강현에게 한여진이 불쑥 비닐 봉투를 건넸다. 가사전담팀 팀복이 담겨있는. 세나가 기겁을 하며 뺏어 들려는데, 강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봉투를 펼쳤다. 검은색 야구 점퍼. 소매 부분만 하얀색인. 그리고 등판에 큼지막한 수 놓아진 글자. ‘Partner L. R. Kang Hyun.’ 아주 동네방네 ‘여기 좀 보세요. 이게 바로 제 이름이랍니다.’ 하는 것처럼 눈에 띄는 자수였다.
“아. 선배. 이게요. 우리가 재미 삼아 맞춘 거거든요. 입기 싫으면 안 입어도 돼요. 한 변이 이런 거 하고 싶다고 해서.”
세나가 낭패라는 듯 제 이마를 짚으며 눈치를 보는데, 강현은 입고 있던 트랙탑 저지의 지퍼를 쭉 내려서 벗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야구 점퍼를 걸쳐 입었다. 그리고는 물었다.
“어때, 어울려?”
세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을 척 올려 보였다.
“그럼 됐네.”
사실 모양새가 어떤지, 잘 어울리는지 그런 건 강현에게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단지,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는 세나를 보자 그녀와 꼭 무슨 사이라도 된 것처럼 가깝게 느껴져서. 그래서 이 야구 점퍼가 퍽 마음에 들었다. *** 메신저 앱을 들여다보던 채성민의 눈빛이 싸늘히 식었다. 그는 토요일 주말 오전부터 기세나에게 만나자는 문자를 보냈다가, 워크숍에 간다는 답변을 받았다. 비싸게 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바쁜 건지. 단둘이 밥 한번 먹기가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그러다 그날 저녁, 일곱 명의 남녀가 똑같은 옷을 입고 찍은 것으로 바뀐 기세나의 프로필 사진을 확인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 가운데에 류강현이 있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놈이 기세나의 뒤에서 서 있는 것은 둘째치고, 그녀의 어깨에 올린 손이 거슬렸다. 기세나는 ‘사진 잘 나왔네. 예쁘다.’라는 제 메시지는 읽지도 않았다. 아마 시간적으로 봤을 때 팀원들과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며 술을 마실 타이밍이었다. 채성민은 핸드폰에 띄워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꿰뚫을 듯 바라보며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분명 K 로펌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기세나는 류강현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미묘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느낌. 그 후로 선릉 다이닝에서 만났을 때, 류강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수줍게 얼굴을 붉히던 그녀가 떠올랐다. 언제 어떻게 가까워졌는지. 같은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종종 마주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단시간에 가까워질 줄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는 워크숍까지 함께 갔다니.
“이 새끼가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