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호랑 말코가 누구야?2021.11.02.
“박 변은 나랑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는데, 아주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하고 있네? 군대 안 갔다 왔어? 자취 안 해봤어?”
“자취해봐야 집에서 라면밖에 안 끓여 먹어봤죠. 거의 배달 음식을 시켜 먹거나. 빨래 같은 건 세탁소에 맡기고. 근데 결혼했으면 와이프가 아침밥도 차려주고, 출근할 때 넥타이도 골라주고, 그런 게 남자의 로망이잖아요!”
“로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여자는 로망이 없어? 남편이 돈 많이 벌어다 줘서, 살림은 가정부한테 맡기고 낮에는 취미 생활, 밤에는 럭셔리한 레스토랑에서 남편이랑 같이 우아하게 스테이크 썰고 싶다 이거야. 근데, 실상은 뭐다? 맞벌이지. 안 그래?”
“저녁은 그렇다 칠 수 있는데, 아침은 차려줘야죠. 아침밥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래서 박 변은 매일 아침을 먹고 출근하니?”
한여진의 기습공격에 박종찬이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며 머뭇거렸다.
“이거 봐. 남자들은 꼭 이게 문제야. 실상 자취할 때는 귀찮아서 아침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으면서, 왜 결혼만 하면 로망이니 뭐니, 아침밥 차려달라는 거야?? 물론 아내가 전업주부면 차려줄 수는 있지. 근데 고맙다는 말을 하길 해, 수고를 알아주길 해?”
“사랑하는 사람이 아침밥 좀 챙겨달라는 게 그렇게 무리한 부탁인 겁니까? 저녁에 먹었던 국이나 반찬 데워서 식탁에 올려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니까. 남편 놈들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그냥 자기들이 차려 먹고 나가면 되잖아? 자는 사람 깨워서 밥상 차리라는 게 웬 말이냐고. 그럴 거면 그냥 혼자 살아.”
박종찬의 고민으로 시작됐던 이야기가 이제는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버려, 남자 대 여자로 편이 갈렸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말처럼,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애라도 낳아봐. 여자는 열 달 배 아파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오잖아? 몸매도 망가져, 산후조리 잘못하며 평생을 고생해. 근데, 육아는 또 여자한테 다 맡기고, 자기들은 일하고 와서 힘들다고 뒷짐이나 지고 있지!”
분통을 터트리던 한여진이 손에 든 술을 입안으로 몽땅 털어 넣고 다시 열변을 토했다.
“여자가 성모마리아처럼 신의 계시로 애를 잉태한 거야? 유전자 반반 나눴으면 육아도 반반해야지. 여자니까, 엄마니까, 아내니까, 무슨 책임감을 그렇게 많이 짊어지게 만드는 거야??”
이에 지지 않고 박종찬 역시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아기랑 엄마는 원래 배 속에서부터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서로 교감이 더 잘되지 않나요? 아이는 엄마가 키우는 게 정서적으로 더 안정된다는 말이 왜 있겠습니까? 게다가 여자들은 산후휴가, 육아 휴가 남자들보다 더 길게 받을 수 있잖아요?”
“우리야 전문직이니까 그렇다 치고, 일반 회사에 다니는 여자들이 육아휴직 갔다가 다시 회사로 돌아오면, 어떤지 정말 몰라서 그래? 눈칫밥에 승진 누락에 나라에선 애 낳으라 하고, 회사는 애 낳는다 하면 싫은 소리나 해대고.”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어느 정도의 희생은 필요한 법이죠! 여자만 희생하는 거 아니잖아요! 남자들도 젊은 나이에 군대에 청춘을 바치고, 또 사회에 나와서도 한 집안의 가장으로 책임감을 짊어지고 살잖아요.”
술도 얼큰하게 들어갔겠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생각하는지, 두 사람은 연거푸 술을 들이켜면서 팽팽하게 맞섰다. 두 사람 다 분명 맞는 얘기를 하고 있지만, 성별에 따른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서만 일방적으로 희생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 가서 그런 얘기하지 마. 무식하다는 소리 들어. 시대가 변한 지가 언젠데, 조선시대 마인드야. 봐봐, 이래서 내가 애 안 낳는 거라니까.”
“아니, 애를 안 낳을 거면 결혼은 왜 해요?!”
두 시니어 변호사의 살벌한 기 싸움에 주니어 변호사들은 입을 꾹 다물고 눈만 이리저리 굴렸고, 강현은 불난 집 불구경하듯 아예 팔짱까지 끼우고 싸움을 관망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논쟁에 다들 지쳐갈 때쯤, 두 사람이 동시에 세나와 강현에게 질문을 던졌다.
“기 변! 내 말이 맞아 틀려?”
“류 변호사님! 남자라면 다들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날카로운 두 쌍의 눈동자가 어서 빨리 자신의 편을 들어달라, 이글이글한 눈빛을 쏘았다. 갑자기 돌아온 화살에 당황해한 것도 잠시, 세나는 고민에 빠졌다. 팀장으로서 시시비비를 가리기에 앞서 두 사람 모두 기분 나쁘지 않게 잘 다독여야 할 텐데, 서로의 견해 차이가 있으니 누구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난감했다. 고심하는 세나를 옆에 두고 강현이 그녀의 귓가에 입을 비스듬히 기울여 속닥거렸다.
“워크숍 처음 와봤는데, 재밌네. 재판장 판사가 된 기분이야.”
묘하게 웃음기를 머금은 그의 말투는 나긋나긋하기까지 했다. 아, 그에게 이런 꼴을 보이다니. 팀워크를 다지러 왔다가 분열을 보여준 꼴이라 제가 다 창피했다. 제 손으로 직접 뽑은 팀원인데 수준이 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한여진 변호사가 대뜸 세나를 향해 제 울분을 담아 쏴댔다.
“기 변호사도 그 호랑 말코랑 혹시라도 결혼 생각이 있다면 진짜 신중하게 결정해.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내가 결혼해서 가장 후회하는 게 뭔 줄 알아? 같은 업종에 종사하면 서로를 더 잘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이거 웬걸, 지가 더 잘나고 더 바쁘다고 아주 집안일을 개똥으로 안다는 거야.”
여진은 테이블을 손에 쥔 컵 밑동으로 쾅쾅 찍어 내렸다. 퇴근만 했다 하면 소파와 물아일체를 이루는 제 남편을 떠올리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맥주를 병째 들이켰다.
“호랑 말코?”
여유롭게 팔짱을 끼우고 있던 강현이 팔을 풀고 세나를 보았다. 짙은 눈썹을 비대칭으로 휜 그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지금 저게 무슨 말이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황한 세나가 한여진의 손에서 재빨리 병을 낚아채며 소리쳤다.
“친구라니까!”
“친구는 무슨. 딱 봐도 남자인데. 암튼. 호랑 말코가 이렇게 박 변처럼 고리타분한 조선 시대 발상을 하는 놈이라면 절대. 네버. 결혼은 꿈도 꾸지 마.”
다 필요 없고, 세나는 그저 제 앞에 앉은 한여진의 주둥이에 고기쌈이라도 쑤셔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여진이 더 헛소리를 지껄이기 전, 옆에서 어깨를 붙이고 앉은 호랑 말코에게 들키지 않고 화제를 돌려야 하는데. 머릿속이 새하얘져 길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을까 싶어 그저 술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강현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난장판이 된 상황을 수습하기에 나섰다.
“이게 이렇게 논쟁이 될 일인지부터 모르겠는데…….”
그는 제 눈썹 머리를 검지로 긁적거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뭘 원하는지부터 알고,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애는요? 류 변호사님은 결혼하시면 아이는 안 낳을 겁니까?”
“그것도 뭐. 어쨌든 아이가 생겼을 때 가장 힘든 건 여자 쪽이니까, 아내가 원치 않는다면 강요할 생각이 없습니다.”
강현은 침 튀기며 싸워대던 한여진과 박종찬에게 담백하게 대답했다. 누가 더 힘들고, 덜 힘든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배려해야 하는 건 아내든 남편이든 똑같은 거 아니냐고. 그렇기에 상대가 원하는 게 있다면 그쪽에 맞춰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사랑하는 사람이 힘든 것보다는 내가 좀 불편하고 힘든 게 낫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두 시니어 변호사가 입을 딱 다물었고, 소강되는 분위기에 숨통이 트인 주니어 변호사들이 맞는 말이라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그들에게 말을 하는 동안 잠시 정면을 향했던 강현의 얼굴이 다시 세나에게로 틀어졌다.
“그리고 그런 당연한 말보다 기세나 변호사의 호랑 말코가 누군지가 더 궁금한데.”
술을 물처럼 마시고 있던 세나가 쿨럭 기침을 토했다. 옆통수가 따끔따끔, 누군가의 시선이 닿아서 떨어지지 않았다.
“진짜 친구라니까……. 한여진 변호사가 오해한 거예요.”
“친구…….”
“네. 친구.”
“기세나 변호사는 참 친구가 많고 다양하네. 호랑 말코같은 친구도 있고.”
집요한 눈이 세나의 얼굴에 꽂혀 떠나질 않았다. 세나는 마른침을 꼴딱 삼키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시선에 얼굴이 화끈거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어흐, 술 취한다. 술 좀 깨고 올게요.”
약 기운이 떨어진 만큼 술기운이 치고 올랐다. 세나는 콧물을 훌쩍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몸을 일으켜서 그런지 눈앞이 어질어질,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아무래도 마지막에 마신 술에 소주가 아닌 위스키가 들어있었던 모양이었다. 휘청이는 무릎에 힘을 주고 산책로가 있는 펜션 뒷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행여나 류강현이 따라오지 않을까, 힐끔힐끔 뒤를 확인하는데 이효원이 그를 붙잡고 뭔가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이효원은 강현을 유혹하려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반쯤 풀린 눈을 귀엽게 깜빡거리며, 상체를 좌우로 흔들거렸다. 두 사람의 어깨가 닿을락 말락 하는 것까지 본 세나는 홱 몸을 돌려 산책로로 비틀비틀 걸어 들어갔다. 그가 저를 따라오지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제가 아닌 다른 여자랑 정답게 구는 것에 기분이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뭐가 그리 좋다고 웃고 자빠졌어. 아주 웃기시네.”
세나는 발에 채는 돌을 툭툭 차며 길을 따라 들어갔다. 그러다 산책로 가운데에 있는 벤치를 발견하고는 털썩 엉덩이부터 내렸다. 술에 취한 무거운 머리가 꾸벅꾸벅 앞으로 쏠려 힘겹게 들어 올렸다. 등받이에 목을 얹고는 후-, 긴 한숨부터 뱉었다.
“내가 술을 마신 건지……. 술이 나를 마신 건지…….”
뱉어낸 숨에 알코올 향이 가득해 숨을 내쉬고 마실 때마다 취기가 더욱 올랐다. 멍한 눈이 밤하늘을 담았다. 흐리멍덩한 눈에 비친 밤하늘은 검은색이 아니라 짙은 남색이었다. 빼곡하게 박혀있는 별들이 눈 아래로 쏟아져 내릴 것처럼 반짝반짝, 예쁘게도 빛났다. 무엇 때문에 기분이 나빴는지도 잊어버리고 한참이나 밤하늘을 구경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술에 절여지는지도 모르고.
“예쁘네. 꼭 나처럼. 아주. 반짝반짝 빛나고. 예뻐. 아주 예뻐.”
별빛이 일렁이는 밤하늘은 도시의 하늘과는 다르게 아름답고 화려했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도 나의 별. 저쪽 별도 나의 별. 오오- 나 별 많아. 부자구만.”
세나는 반쯤 풀린 혀로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검지를 들고 양을 세듯 별들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피식피식 웃었다. 그리고 나무늘보처럼 느린 동작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두 손에 들었다.
“내 눈에, 저장, 주머니에, 저장, 서울에 가져가려고, 카메라에 저장, 저장.”
한껏 풀어진 얼굴 위로 핸드폰을 가져와 카메라 앱을 켜려는데, 눈앞에 핸드폰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아니 셋인가. 화면 속 카메라 앱을 찾아 헤매는 손가락이 자꾸 다른 곳을 눌렀다. 그러다가 지잉지잉- 진동이 울리며 까만 화면에 하얀색 큼직한 글자가 수신자를 알리며 지나갔다.
“오- 호랑 말코한테 전화 왔네…….”
뇌에 가득 찬 술기운에 의식의 흐름이 자유로워졌다. 세나는 제 존재감을 번쩍이는 글자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다 돌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호랑 말코, 한 마리가, 별 밭에, 앉았는데, 호랑 말코야, 날아 봐. 푸하.”
술에 취해, 흥에 취해, 뭐가 그리 재밌다고 혼자서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는 사이,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세나를 찾아 나선 강현이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한 손으로 핸드폰을 든 강현이 벤치 한가운데 거의 널브러지다시피 앉아있는 세나를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제 곁에 누가 서 있는지도 모르고 호랑나비라는 노래를 개사해 음정 박자 다 무시하고 불러댔다.
“그놈의 호랑 말코가.”
제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낸 강현의 눈이 세나의 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으로 향했다.
“난 줄은 몰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