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너랑 노는 게 제일 재밌어2021.10.30.
당최 이 남자를 이겨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자강두천이라는 말이 있던데, 왜 매번 패배의 쓴맛은 일방적인 건지. 세나가 버벅거리며 답을 하지 못하자, 강현이 다시 한번 물었다.
-“한여진 변호사랑 이효원 변호사는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찾았다고 가야 할 필요는 없잖아?”
“제 팀원이잖아요…….”
-“그래서 묻잖아. 너한테.”
그가 어떤 의도로 제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날씨가 좋아서. 하늘이 예뻐서, 공기가 맑아서, 라는 구차한 핑계를 지워내고 보니 하나 확실한 게 있었다.
“선배가.”
나는 지금 선배가 보고 싶은 것 같다.
“……왔으면 좋겠어요.”
-“주소 찍어. 지금 출발할 테니까.”
좋겠어요, 라는 대답에 마침표가 찍히기도 전에 그가 선수 치듯 답했다. 정확히는 왔으면, 에서부터 이미 답을 준비했던 것 같다. 세나는 펜션 뒤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잠시 멎었던 숨을 거칠게 토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라 손으로 부채질을 해봐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통화가 끊어지기 전, 그의 나른한 웃음소리가 무척이나 기분 좋게 들렸다면 착각일까. 자꾸만 마음이 제 주인의 속도 모르고 울렁거린다. 통화를 끊고도 한참이나 바닥에 웅크려있다, 팀원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왔다. 세나가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한여진이 눈을 반짝이며 따라붙었다.
“호랑 말코가 누구야? 애인?”
“친구야.”
“에이. 무슨 친구 전화에 그렇게 놀라?”
“죽었다 살아나서 놀랐지. 너무 오랜만에 온 전화라.”
술술술 거짓말도 잘도 나오는데 왜 류강현한테만 안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검사 출신이라 그런가. 역시 사람은 죄를 짓고 살면 안 되나 보다. 세나는 한여진이 못 믿겠다는 듯 쏘아붙이는 눈초리를 피해 다른 팀원들에게로 다가갔다. *** 같은 시각. 워크숍을 갔다는 세나와의 통화를 끝낸 후 강현은 곧장 욕실로 향했다. 운동 후 땀에 젖은 옷을 벗고, 샤워부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떡 벌어진 어깨로 쏟아진 물이 가슴팍을 둘러싼 너른 흉통과 오밀조밀하게 들어찬 복근 아래로 떨어졌다. 빗줄기처럼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물 아래서 머리부터 적시며 팽팽하게 긴장한 근육들을 이완시켰다. 강현은 샤워부스 안이 수증기로 가득 찰 때까지 뜨거운 물을 맞았다. 목덜미를 느릿하게 주무르던 그가, 세나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한껏 들뜬 목소리가 주는 여운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요 며칠 서로의 일이 바빠 같은 층에 머무르는데도 점심은커녕 얼굴도 보지 못했다. 법원을 방문하고 클라이언트를 만나느라 외부일정이 많았던 강현은 처음으로 일이 많은 것이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다. 몸을 갑갑하게 조이는 슈트가 아닌 편안한 옷차림으로, 물기가 남은 머리칼을 탈탈 털며 부엌으로 향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이었지만,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하고자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들고 거실로 나왔다. 한 손에는 차갑게 얼린 맥주를, 한 손에는 리모컨을 들고 뭐 재밌는 거 없나.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결국 뉴스 채널에서 멈춘다. 오랜 시간을 사건에 파묻혀 한 달이면 30일을, 일 년이면 365일을 격한 업무에 시달리느라 어떤 프로그램이 재밌는지도 몰랐다. 무료한 주말. 뭐를 봐야 할지 도통 모르겠는 TV 채널. 취미라고는 없는 생활. 평소라면 형법서를 읽거나, 지난 사건 파일들을 훑으며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 줄 모르고 보낼 텐데, 오늘따라 만사가 귀찮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도리어 무기력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는데, 40분도 전에 세나로부터 문자가 들어와 있음을 확인했다. ‘선배도 시간 괜찮으면 올래요?’라는 문자를 확인하는 강현의 눈썹이 의외라는 듯 위로 솟았다. 턱 끝을 매만지며 고민하기를 잠시, 강현은 곧바로 세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끊길 때쯤 전화를 받은 그녀의 목소리가 뭣 때문인지 뾰족하다.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그것마저 기꺼웠다. 강현은 이런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생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싫지 않았다. 아니, 문자가 온 줄도 모르고 오늘따라 유난히 길어졌던 샤워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역시 기세나랑 노는 게 제일 재밌긴 하지.”
그리고 그녀가 보고 싶었다.
워크숍의 하이라이트는 초저녁부터 내일은 없는 듯이 달리는 술판이었다. 잔뜩 기대감에 부푼 여섯 명의 변호사들이 유치한 줄도 모르고 똑같은 옷을 맞춰 입고 야외 바비큐장에 모였다. 옛말에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학창 시절 내내 공부를 했던 터라 이런 자리를 못내 동경해왔던 게 티가 났다. 저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각자의 위치에서 빠르게 세팅을 마쳤다. 시뻘겋게 달궈진 불판 위에 소고기가 지글지글,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구워졌고 테이블 위에는 각기 각종의 술병들이 줄을 섰다. 소주는 기본, 맥주부터 시작해서 막걸리와 복분자주. 심지어 면세점에서 사 온 위스키까지. 이걸 다 먹었다가는 퇴실 시간 전까지 살아남는 인원이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세나는 가사전담팀의 막내, 신입 변호사 최성훈이 구워 나르는 고기를 한 점씩 집어 먹으며 주차장 쪽으로 곁눈질을 했다. 이쯤이면 올 때가 됐는데, 류강현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진짜 오기는 하는 건가?”
툭 내뱉은 혼잣말을 의식하기도 전,
“누가 또 와요?”
맥주잔 여섯 개를 좌르륵 줄을 세워놓고, 유명한 바의 바텐더처럼 폭탄주를 말고 있던 이효원이 물었다.
“류강현 변호사님 오신대.”
“정말요???”
7:3 황금 비율로 제조한 폭탄주에 숟가락을 퍽, 퍽, 꽂으면서 거품을 만들던 이효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숟가락을 팽개치다시피 내려놓고선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뒷면 거울로 제 얼굴을 확인했다.
“아, 나 얼굴 엉망이네.”
부스스해진 머리칼을 정돈하는 이효원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아예 립스틱까지 꺼내 술을 마시는 동안 지워졌던 입술에 색을 덧칠했다. 그녀의 두 뺨은 술이 아닌 다른 것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세나의 시선을 의식한 이효원이 히-, 하고 웃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류 변호사님이, 좀 쌀쌀맞아서 상처받긴 했는데……. 그래도 멋있잖아요.”
일전 그녀가 류강현에게 여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를 물었다가 면박을 당했다는 한여진의 말이 그제서야 이해가 갔다. 남자로서의 류강현은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홍조로 물든 이효원의 얼굴을 보며 세나는 가슴 언저리가 따끔따끔한 통증을 자각했다.
“물론 저를 상대도 안 해 주시겠지만, 그래도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상큼발랄한 그녀의 대답이 세나의 가슴을 답답하게 조였고, 목이 말라왔다. 세나는 알레르기 때문에 약을 먹은 것도 잊어버리고 이효원이 타둔 폭탄주 한 잔을 가져가 그대로 쭉 들이켰다. 목구멍을 홧홧하게 긁으며 내려가던 술임에도 어쩐지 체할 것 같았다. 세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싱크대에서 각종 쌈 채소를 씻고 있던 박종찬이 뒤를 슬쩍 돌아보더니 그녀를 보고 말을 붙였다.
“기 변호사님, 몸 안 좋아요? 얼굴이 왜 그래요?”
“내 얼굴이 왜요? 이상해?”
“아니, 안색이 초췌한데?”
“그래요? 나 컨디션 괜찮은데…….”
방 안으로 들어간 세나는 곧장 거울을 확인했다. 허옇게 질린 낯빛이 누가 봐도 어디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이로 아랫입술을 꾹꾹 누르다가, 캐리어 안 파우치를 꺼내 오렌지 빛깔의 립글로스를 꺼내 들었다.
‘아파 보인다니까 바르는 거야. 별 의미 없어.’
립글로스를 덧바른 김에 대충 묶어두었던 머리칼을 땋아 한쪽으로 늘어트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거울을 보며 어디 이상한 곳이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안색이 좋지 않다는 말에 볼터치라도 할까 망설이다, 그냥 내려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도착한 류강현이 차에서 내려 바비큐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스포츠웨어 차림의 그는 슈트를 입었을 때만큼이나 태가 남달랐다. 남들보다 우월한 기럭지로 성큼성큼 걸어오는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벅저벅한 발걸음이 그녀의 심장에도 발자국을 남기는 것처럼 쿵쿵, 울렸다. 그의 등장에 수다를 떨던 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류강현을 맞이했다. 특히 이효원과 한여진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류강현을 존경하는 하정수 역시 그의 손에 들린 음료 캐리어를 잽싸게 받아들고 거의 90도로 인사를 했다. 그는 팀원들의 환대에 가볍게 응수하면서도 시선만큼은 세나에게 고정돼 있었다. 세나 또한 가만히 있기가 뭐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와, 왔어요?”
류강현은 대답 대신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세나의 정수리에 툭 손을 얹었다가 내렸다. 머리 꼭대기에서 시작한 짜르르한 기운이 발끝까지 번져갔다.
“이건 뭐야? 커피가 아니네??”
류강현이 가져온 커피를 팀원들에게 나눠주던 한여진이 분홍색 슬러시를 손에 들고 누구에게 전해야 할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건 기세나 변호사 겁니다.”
조금 전까지 분명 누군가 제 속에 들어앉은 듯 답답했는데, 그 한마디에 청명하게 높은 하늘처럼 기분이 묘하게 고취되었다. 세나는 한여진이 떨떠름하게 건네는 수박 주스를 받아 들고 한껏 콧대를 세웠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수박 주스를 마시는 것처럼 빨대를 쪽쪽 빨며 상차림이 한가득한 자리로 돌아왔다. 뒤따라오는 강현에게 자리를 내주려는데, 이효원이 재빨리 세나의 곁으로 몸을 붙이며 그에게 제 옆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강현은 굳이 비좁은 세나의 옆에 붙어 앉았다. 이효원은 오갈 곳 없어진 손을 거두며 “술은 뭐로 드릴까요?” 하며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강현에게 한 마디라도 붙여보려 애를 썼다.
“아무거-.”
강현은 말을 하려다, 폭탄주를 마시는 세나를 보곤 “폭탄주로 주세요.”하고 여상히 대꾸했다.
“제가 진짜 대학 때부터 폭탄주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말거든요? 류 변호사님도 진짜 반할 맛일 거예요!”
탁월한 그의 선택에 기운을 차린 이효원이 밝게 웃으며 소주병을 흔들었다. 회오리가 만들어진 병을 기울여 딱 한 잔 분량의 소주를 맥주잔에 따른 다음, 황금빛 맥주를 콸콸 부어 풍성한 거품이 가득한 폭탄주를 제조했다. 그녀의 화려한 솜씨에 다른 팀원들은 손뼉 대신 테이블을 두드리며 강현의 참석을 환호했다. *** 펜션에도 어스름한 밤이 찾아왔다. 준비한 술이 반쯤 사라지는 동안 분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열기를 더했다. 사건에 대한 사담으로 이어지던 이야기가 개인사로 넘어오면서 서로에 대한 질문들이 늘어났다. 그러다 대뜸 박종찬이, “류강현 변호사님은 결혼 안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잔을 기울이던 강현은 “그게 왜 궁금합니까?”하고 되물었다. 쓸데없는 질문에 대해 불쾌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런 게 왜 궁금하냐는 순수한 물음이었다. 코를 빨갛게 물들인 박종찬은 제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요즘 집에서 자꾸 선을 보라고 하시는데.”
전문직이 되자마자 결혼정보업체부터 주변의 뚜쟁이들한테 득달같은 전화를 받았으나 그때는 아직 이십 대 청춘이라 연애 결혼을 지향했다고. 그러나 서른을 넘기자마자 이제는 집에서부터 ‘결혼하라!’ 매일 성화라는 이야기였다.
“주변에서 괜찮다는 집안의 선 자리가 들어오면 하루걸러 하루 연락이 오는 통에 괴로워 죽겠습니다.”
이러다가 그냥 아무랑이나 결혼을 해야 할 판이라고 덧붙였다.
“더 늦기 전에 아이를 가져야지. 남자가 큰일을 하려면 내조가 필요하다는 둥, 어르신들이 하는 말씀이야 다 거기서 거기인데. 자꾸 듣다 보니 또 맞는 말씀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도 선보다는 연애로 결혼하는 게 낫지 않아요?”
“결혼은 무슨! 혼자 사는 게 속 편해. 박 변 그냥 혼자 살아.”
아직 이십 대 청춘이 창창한 주니어들은 맞선보다 연애 결혼을 옹호했고, 유일하게 기혼인 한여진은 치를 떨며 아예 결혼 자체를 말렸다. 정작 질문을 받은 당사자는 아무런 대답 없이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기만 했다. 세나는 가만히 강현의 눈치를 살폈다.
“결혼할 남자로 집에 인사시켜.”
기장수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류강현은 올해 서른다섯 살이었다. 확실히 남들 눈에도 혼기가 꽉 찬 나이였다.
‘선배는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세나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주변을 인식하지 못하던 와중, 한여진과 박종찬의 엇갈리는 대화에 불이 붙어있었다. 술에 흥건히 취한 두 사람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대립각을 세웠다.
“여자가 집에서 살림만 하면 무시하고, 바깥일을 하면 집안일은 왜 이따위로 하냐 하고. 뭐 어쩌라는 거야?”
“그래도 살림은 여자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더 야무지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