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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좋은 후배, 좋은 파트너 (34/120)

34화. 좋은 후배, 좋은 파트너2021.10.26.

학과 행사에 참여도 하지 않는 강현이 고작 자문 변호사로 이름만 올린 가사전담팀 워크숍에 올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한여진의 말도 거슬렸다. 여자 문제. 괜히 이곳에 왔다가 행여나 그런 소리라도 들으면 류강현이 어떻게 나올지 두려웠다. 분위기 초나 지치나 않으면 다행이지. 아니면 한여진이 이 근처 이름 모를 산에 묻히거나.

16551856492092.jpg“혹시 물어보지 않았다고 서운해하진 않겠지?”

그 류강현이? 에이, 서운은커녕 그딴 쓸데없는 데 허비할 시간이 없다고 면박을 주면 줬지. 설마.

16551856492092.jpg“그래도 자문이니까, 한 팀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음. 아니지. 선배한테는 팀이 따로 있잖아.”

날이 이렇게 좋은데, 가끔 야외에 나와서 콧바람 쐬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자문자답하며 고민하던 세나가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하늘로 들었다. 그리고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숨을 들이켰다. 사방에 싱그러운 풀 내음이 가득하고, 따사로운 햇살에 광합성까지 하자 기분 좋은 나른함이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16551856492092.jpg“오늘 날씨가 좋긴 진짜 좋다. 오랜만이네. 이 한적한 여유로움.”

청명한 하늘은 깨끗한 푸른색이었고, 높이 뜬 해는 눈이 부시지 않을 정도로 딱 적당히 빛나고 있었다.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지 주위를 은은하게 감싸는 피톤치드 향은 머리를 맑게 했다. 늘 소음으로 가득 찬 삭막한 도시에서 느끼는 분주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16551856492092.jpg“선배도 함께 느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무심코 드는 아쉬움에 카메라 앱을 켜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리고 메신저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 그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올래요?’ 하고 적어넣었던 문자를 지우고, ‘워크숍 왔어요.’라고 썼다가 다시 지우고, ‘지금 뭐 해요?’라고 적었다. 그리고 다시 지웠다. 그에게 주말에 뭐 하고 있는지 문자 하나 보내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이상하게 망설여진다. 뭐라 쓸지 고민하는 사이 톡 창에 읽음 표시가 뜨더니 곧바로 화면이 전환되고 전화가 울렸다.

16551856492092.jpg“엄마야!”

화들짝 놀라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손안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목을 큼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16551856492116.jpg-“뭐야?”

전화를 받자마자, ‘여보세요’라는 말도 하기 전에 까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6551856492092.jpg“어, 그게 워크숍 왔거든요. 경기도로…….”

문자를 했으면 문자로 답을 해야지, 왜 바로 전화질인지. 세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16551856492116.jpg-“사진 한 장 떨렁 보냈길래, 뭔가 했네.”

전화기 너머 그가 나직하게 웃었다. 평화롭던 마음이 돌연 뜀박질을 시작했다. 듣기 좋은 울림이 귓가에 착 달라붙어, 뇌를 파고들더니 알 수 없는 곳을 간질거렸다. 세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귀를 붉혔다.

16551856492116.jpg-“날씨 좋아 보이네. 재밌어?”

재밌냐고 묻는 강현의 목소리가 퍽 부드럽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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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나는 왠지 모르게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손톱으로 빈백 소파의 표면을 긁적였다. 그리고 뜨문뜨문 말을 이었다.

16551856492092.jpg“아직 혼자 있어요. 장 보고 오는 팀원들도 있고, 좀 늦게 출발하는 사람도 있어서.”

16551856492116.jpg-“내가 놀아달라고 했는데, 내가 놀아줘야 하는 거야?”

아니, 언제 놀아달라고 했나. 그냥 날씨가 좋아서. 이걸 선배도 봤으면 해서 사진이라도 보내준 건데. 습관처럼 툭 하고 터져 나오려는 불만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입술을 말았다.

16551856492092.jpg“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것도 있죠.”

세나는 긴장했던 몸을 풀고 빈백에 기대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괜히 툴툴거려서 빈정이 상하는 것 보다, 지금 그가 뭐 하고 있을지 아는 게 더 나았다.

16551856492092.jpg“선배는 뭐 하고 있어요?”

16551856492116.jpg-“운동 갔다 왔어.”

16551856492092.jpg“운동 좋아해요?”

16551856492116.jpg-“운동을 좋아서 하나. 아프면 그게 더 고달프니 하는 거지. 짧고 굵게 살더라도 남한테 피해 끼치지 않도록.”

16551856492092.jpg“현실주의자답네요. 천년만년 혼자 건강하게 잘 살다 갈 거예요. 선배는.”

16551856492116.jpg-“왜 내가 혼자 살 거로 생각해?”

16551856492092.jpg“하는 거 보면 비혼주의자던데, 선배 눈에 차는 여자가 있긴 해요? 성질머리도 그렇고, 그러다 독거노인이 될지도 몰라요. 친구도 없다며?”

16551856492116.jpg-“아주 악담을 하는군.”

16551856492092.jpg“뭐. 제가 놀아드릴게요. 선배 아직 살아있나 종종 찾아뵙고 밥도 챙겨드려야겠네요.”

16551856492116.jpg-“병 주고 약 주고도 잘하고.”

전화기 너머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몰랐는데, 류강현의 웃음소리는 낮고 잔잔해 퍽 듣기 좋았다. 세나는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에서 귀를 살짝 떼었다. 더 듣고 있다간 온몸이 빈백 소파 안으로 녹진녹진 풀어질 것 같았다.

16551856492092.jpg“아, 사람들 온 것 같아요. 이만 끊을게요.”

16551856492116.jpg-“그래. 잘 놀다 와. 월요일에 보자.”

전화를 끊자 한동안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세나는 자신의 가슴을 한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몇 번이고 숨을 집어삼켰다. 바르작거리는 심장이 자꾸만 콩닥콩닥 뛰었다.

16551856492092.jpg“내가 왜 이러지?”

벽이든, 소파든, 어딘가에 나른하게 기대어 있는 류강현이 한 손으로 전화기를 들고, 잔잔하게 웃고 있었을 모습을 떠올리자, 얼굴이 홧홧해지고 살갗이 간질거렸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이 감정이 뭔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16551856492092.jpg“좋은 후배. 좋은 파트너.”

이성적인 접근보다, 파트너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게 더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세나는 기장수 대표와 체결한 계약서를 생각하며 다시 침울해졌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게 뭐든 좀 더 친해지는 게 좋으니까. 세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망설임 끝에 강현에게 문자 한 통을 넣었다.

16551856492092.jpg「선배도 시간 괜찮으면 올래요?」

몇 분이 지나도록 강현에게서 답은 오지 않았다. 대신 가사전담팀 팀원들이 속속히 도착했다. 혼자 있는 세나를 제일 먼저 발견한 건 신입 변호사 이효원이었다. 양손 가득 봉지를 든 그녀가 다른 사람이 없는지 세나의 너머를 살폈다. 누구 찾는 사람이 있는가 했는데, ‘류강현 변호사님은 안 오시는 거예요?’하고 물었다. 세나는 가타부타 답이 없는 강현을 대신해 대답했다.

16551856492092.jpg“못 오실 거야. 바쁜 것 같아.”

16551856548917.jpg“아-. 아쉽네요. 이런 자리 아니면 쉽게 뵐 수 없는 분인데.”

양손에 쥔 봉투를 축 늘어트리며 눈에 띄게 실망하는 이효원을 보며 세나는 쓰게 웃었다. 그를 보고파 하는 사람이 저만은 아닌 것 같다. 이효원, 하정수. 이제 갓 로스쿨을 졸업하고 입사한 최성훈과 형사소송 전문 박종찬. 마지막으로 도착한 한여진까지. 여섯 명의 『K 법무법인 가·송·전 어벤져스』 들이 모두 모이자, 조용했던 펜션이 왁자지껄한 활기를 띠었다. 특히 한여진은 품에 한가득 뭔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와 오자마자 바닥에 턱 내려놓았다. 뭔가 봤더니, 단체 티와 야구 점퍼였다.

16551856576312.jpg“워크숍의 기본은 팀복 아니야?”

밋밋한 앞판과 다르게 등판에는 큼직하게 글자가 적혀있었다. 꼭 대학생들이 새학기에 맞추는 과 점퍼 같은 모양새였다. 어딘가 신이 나 보이는 한여진은 팀원들에게 하나씩 나눠주며 깔깔 웃었다.

16551856576312.jpg“싸구려 아니고 비싼 거야. 변호사 체면이 있잖아?”

그녀가 건네는 티와 야구 점퍼를 받아든 세나가 등 뒤에 적힌 ‘Senior L. K.SENA’를 들여다보며 아연실색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여진은 자신 몫의 점퍼로 갈아입으며 뿌듯해했다.

16551856492092.jpg“이 나이에 이거 입고 어디 가긴 좀 그렇지 않아?”

16551856576312.jpg“언제 이런 걸 입어 봐? 우리 땐 없었잖아. 나중에 집에서 입던가.”

하긴. 과잠이니, 팀복이니, 병아리 같은 새내기들이 삐약삐약, 같은 옷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걸 보면 흐뭇하기도 하고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근데 그건 그 애들이 아직 젊으니까 그런거고 이 나이에 이건 좀……. 다들 저와 같은 마음인 줄 알았는데, 다른 팀원들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서로의 이름을 읽어주며 한껏 들떠 바빴다. 팀장이니 그런 팀원들에게 장단 맞춰줘야겠지. 세나도 눈치껏 점퍼를 꺼내서 어깨에 둘렀다.

16551856576312.jpg“기 변, 류 변호사님은 안 왔어?”

이효원과 마찬가지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한여진이 물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남은 팀복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았다.

16551856492092.jpg“설마, 선배 것도 맞춘 건 아니지?”

16551856576312.jpg“왜 아냐? 류 변호사님도 우리 팀인데.”

16551856492092.jpg“팀 아니고 자문이지.”

16551856576312.jpg“얘가 인생 헛바퀴 도는 소리 하네. 그 정도면 그냥 한 팀이라고 해도 돼. 이 기회에 라인을 확실하게 타야지. 안 그래?”

뒤에서 욕을 할 때는 언제고, 아예 라인을 타겠다고 잔뜩 기대감에 부푼 한여진을 보며 세나는 그녀가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답장이 없는 그에게 서운할 뻔했던 자신을 질책했다. 그가 여기에 오겠다는 말을 안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나,

16551856576312.jpg“기 변호사님! 호랑 말코한테 전화 오는데요?”

라는 박종찬의 부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비단 손이 빠른 권투선수에게만 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박종찬에게서 자신의 핸드폰을 낚아채는 세나의 솜씨가 손은 눈보다 빠른 타짜 급이었다. 핸드폰 화면에 똑똑히 적힌 ‘호랑 말코’ 네 글자. 처음 번호를 받았을 때 그렇게 저장해두고 바꾸지 않았다. 남이 자신의 핸드폰을 볼 것도 아니고, 이제는 익숙해져 버려 바꿔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터였다. 등 뒤로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세나의 기세에 되레 놀란 박종찬이 멀뚱멀뚱 저를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받을 수도 없다. 호랑 말코가 누군지 알면……. 눈앞이 아찔했다. 세나는 어색한 미소로 입가를 씰룩거리며 ‘전화 좀 받고 올게요.’ 하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철렁 내려앉았던 심장에 제자리를 찾아준 뒤 전화를 받았다.

16551856492092.jpg“선배……. 보통 사람들은 문자를 하면, 문자로 답을 하지 않나요?”

잇새가 꽉 다물려 불만 어린 어투가 튀어나왔다.

16551856492116.jpg-“통화가 더 편하지 않나?”

‘물론 통화가 더 편하지. 그런데 이렇게 다짜고짜 마구잡이식으로 전화를 하라는 말이 아니잖아. 이 웬수야. 그럴 거면 아까 문자 했을 때 바로 전화를 하지 그랬니?’라는 말을 속으로 삭이며 심호흡을 했다.

16551856492116.jpg-“나름 신경 써 준건데, 버럭 하기는.”

웃음기를 머금은 강현의 나직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흩어졌다. ‘화내면 지는 거야. 화를 내면 지는 거지. 내가 화낼 때마다 이 남자는 이상하게 좋아하니까. 변태야 뭐야.’라는 생각도 속으로만 했다.

16551856492092.jpg“갑자기 왜 전화했어요?”

16551856492116.jpg-“어디야?”

16551856492092.jpg“어디긴요. 아까 말했잖아요? 경기도 쪽에 있는 펜션이라고.”

16551856492116.jpg-“그러니까 거기가 어디냐고.”

16551856492092.jpg“왜요?”

16551856492116.jpg-“오라며?”

16551856492092.jpg“…….”

16551856492116.jpg-“뭐야, 그냥 해본 말이야?”

16551856492092.jpg“아니요. 아니. 그냥 해본 말 아닌데. 어? 온다고요? 진짜요?”

16551856492116.jpg-“오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16551856492092.jpg“오, 오세요. 안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선배 왜 안 오냐고, 찾았어요.”

‘다른 사람 누구?’라는 물음에 한여진 변호사랑 이효원 변호사가 찾았다며 진짜 올 건지 재차 물었다. 그런데 류강현은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픽, 웃더니 다른 말을 한다.

16551856492116.jpg-“너는?”

16551856492092.jpg“네??”

16551856492116.jpg-“너는 나 안 찾냐고.”

말투에서부터 입꼬리에 미소를 대롱대롱 달고 있을 것 같은 물음이었다. 연타로 두들겨 패는 류강현의 방식에 세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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