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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기막힌 타이밍 (33/120)

33화. 기막힌 타이밍2021.10.23.

채성민은 택시에서 내리기 위해 강현의 가슴팍을 강하게 밀쳤다. 그러나 그는 커다란 바위인 양 떡하니 버티고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한 채성민이 한층 내리깐 목소리로 소리를 죽여 욕지기를 뱉었다.

16551856318108.jpg“……힘자랑하는 거야, 뭐야? 유치하게.”

16551856318114.jpg“왜? 유치한 건 재미없어? 재미 좀 보고 싶다며?”

16551856318108.jpg“당당하게 내 거니까 건들지 말란 말은 못 하겠고, 할 수 있는 짓이라곤 고작 이런 거겠지. 너 이러는 거 쟤도 알아?”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린 강현이 곁눈질로 세나를 확인했다. 그녀는 강현의 덩치에 완전히 가려진 차 안에서 어떤 실랑이가 일어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대리기사를 부르기 바빴다. 강현이 차 문을 막아선 상체를 반쯤 밀어 넣고는 채성민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16551856318114.jpg“건들지 말라는 말에 그 말도 포함돼 있었을 텐데. 그런 대가리로 잘도 변호사가 됐네.”

16551856318108.jpg“네가 이런다고 쟤가 알아줄까?

16551856318114.jpg“네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고. 빨리 꺼져. 이대로 영원히 꺼져주면 고맙겠고.”

강현은 채성민이 내리지 못하도록 시트 벨트를 쭉 뽑아 채웠다. 쉽게 뺄 수 없도록 클립을 뒤집어서.

16551856318108.jpg“이 미친 X끼가 이거 안 풀어?”

16551856318114.jpg“수준이 맞아야 장단을 맞추지, 안 그래? 걸레 X끼랑 미친 X끼. 딱이네.”

강현은 클립을 풀기 위해 버둥거리는 채성민을 보며 픽 웃었다. 그리고 땅바닥에 떨어진 그의 브리프 케이스도 챙겨 차 안 깊숙이 던져넣었다. 안에서 뭐라 지껄이는 채성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쾅, 문을 닫았다. 문을 닫기 직전 “서래마을. 빨리 가주세요.”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손님을 태운 택시 기사는 뒷좌석에서 시트벨트와 신경전을 벌이는 손님이 내릴세라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이까짓 실랑이도 승부라면 승부라고, 못마땅한 놈을 눈앞에서 치워버리자 한결 속이 후련해진다. 때마침 대리기사의 전화를 받던 세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먼저 보낸 채성민이 걱정이 되는지 택시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16551856318155.jpg“저렇게 보내도 괜찮아요? 많이 취한 것 같은데.”

16551856318114.jpg“알 게 뭐야.”

16551856318155.jpg“친군데 걱정도 안 돼요?”

16551856318114.jpg“친구?”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을 친구라 부른다면, 채성민과 저는 가깝게 지낸 적도 없고 더군다나 오래 사귄 적도 없으니 친구가 아니었다. 가만히 내버려 뒀더니 어느새 세월이 흘렀고, 어쩌다 보니 연락이 뜨문뜨문 이어져 온 것일 뿐. 실상은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16551856318114.jpg“내가 말 하지 않았나? 나 친구 없다고.”

16551856318155.jpg“그건 그냥 술자리에서 농담한 거잖아요.”

강현은 자신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며 잘게 웃는 세나를 보며 혀를 쯧, 찼다.

16551856318114.jpg“농담 아닌데. 그래서 내가 너보고 놀아달라고 했잖아.”

그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새로운 친구를 사귀면 열 받는 건 당연한 거지. 그리고 이걸 이 눈치 없는 아가씨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16551856318114.jpg“기세나.”

한 걸음 떨어져 있던 강현이 어느새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16551856318114.jpg“나를 상대하기 벅차다고 했었지?”

16551856318155.jpg“그걸 또 마음에 담아 뒀어요?”

마주친 그의 검은 눈동자가 한층 깊어져 있었다.

16551856318114.jpg“그래서 놀아주기 싫어?”

시원하게 뻗은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풀어지자, 차갑고 날카롭던 인상이 어느샌가 온순하게 변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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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856318155.jpg“…….”

오늘따라 류강현이 낯설었다. 왜 그런 말을 왜 그런 눈으로 하고 있는지. 세나는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커다란 눈망울만 깜빡거렸다. 자잘한 웃음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저를 바라보기 위해 내리깐 눈꺼풀 아래엔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 파문이 일었다. 꼭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들꽃처럼. 그 순간, 그가 던진 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졌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뒷걸음질을 쳤다.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강현은 농담을 진담처럼 던지는 남자였다.

16551856318155.jpg“노. 놀아줄 테니까, 좀 떨어져요.”

세나가 그와 거리를 두기 위해 한 손을 휘휘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물러서는 만큼 강현도 거리를 좁혀왔다.

16551856318114.jpg“어떻게 놀아줄 건데?”

16551856318155.jpg“아, 그. 뭐…….”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더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쐐기가 필요했다.

16551856318114.jpg“이 사람 저 사람 챙기기 바쁜 기세나가 나랑 뭐 하고 놀아줄 건지 궁금하네. 나는 친구가 없어서 친구랑 뭘 하고 노는지도 모르니까 하나하나 알려 줘야 할 텐데,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겠냐는 뉘앙스로 물으면 자존심 강한 기세나가 물러설 수 있을 리 없다.

16551856318155.jpg“그게 뭐, 어렵다고! 할 수 있어요!”

아니나 다를까. 뭔지도 모르고 일단 물고 보는 그녀였다. 강현은 확답을 얻기 위해 재차 되물었다.

16551856318114.jpg“정말?”

16551856318155.jpg“일단, 오늘은 늦었으니까 집에 가죠.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16551856318114.jpg“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 아니니까, 믿을게. 기대되네. 기세나가 놀아준다는데.”

16551856318155.jpg“알았다니까요.”

이김에 쓸데없이 달라붙는 거머리도 쫓을 겸 말이야. 강현은 그녀의 확답에 속내를 감추고 순순히 물러났다. 제 몸을 집어삼킬 것 같았던 그림자가 걷히자, 짧게 끊어 뱉었던 숨통이 터졌다. 그깟 친구 하는 게 뭐라고 이렇게 사람을 몰아붙이는지, 저를 놀리는 재미에 심취한 강현에게 불만이 터졌다.

16551856318155.jpg“근데, 놀아달라는 말을 이렇게 협박처럼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이러니까 친구가 없지.”

툴툴거리는 세나의 귓불은 어느새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아직 쌀쌀한 날씨인데도 연신 얼굴 위로 손부채질을 하는 그녀가 자못 귀여웠다. 강현은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찔거렸다. 저 귓등에 제 손이 닿으면 그녀가 얼마나 놀랄지, 나비의 날개처럼 팔랑거리는 속눈썹은 얼마나 빠르게 파닥거릴지가 궁금했다. 그러다 열 받은 속을 달래듯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 훅훅 숨을 뱉는 모습에 시선이 갔다. 유난히 붉고, 유난히 반짝이는 도톰한 입술이. 왜인지 그 순간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강현은 늘 자신이 이성적인 인간이라 생각해 왔다. 그렇기에 이 충동에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을 맛본다면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그녀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16551856318114.jpg“기세나…….”

16551856318155.jpg“아! 대리 왔다! 여기요!”

저 멀리 걸어오던 대리기사가 꾸벅 인사를 하자, 세나는 마주 인사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뭐가 그리 반갑다고. 야속하기까지 하다. 그녀를 향해 뻗어나가던 손이 갈 곳을 잃고 허공을 배회하고 말았다. 강현은 무안해진 손을 거두고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그녀를 바라보며 애꿎은 마음을 곱씹었다.

16551856318114.jpg‘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는군.’

  *** 가사전담팀 팀원들과 의논 결과, 주말을 이용해 워크숍을 가기로 했다. 말이 워크숍이지 주말을 이용해 서울 외곽 지역으로 나가 콧구멍에 바람 좀 넣고, 밤새 술이나 마시며 시시콜콜한 사담을 나누는. 주목적은 가사전담팀의 결속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큰 사건이 아닌 경우 주로 혼자 일하는 변호사들이 대다수였고, 그들 사이는 협력자보다는 경쟁자에 가까웠다. 대한민국에 변호사는 차고 넘쳤고, 사건들은 한정적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살아남으려면 실적은 물론 본인의 실력 자체도 남들보다 월등해야 했다. 뒤처지면 내쳐지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바로 대형 로펌이었다. 변호사들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본인의 명성과 승소율을 따지는 기업인이나 다름없었다. 밑천이 부족해 둥지를 틀지 못하는 철새가 될 수도 있고, 그 아무리 극악무도한 사건을 변호하더라도 이기기만 하면 최고의 대접을 받을 수도 있는. 물론 유명한 로펌의 회사 이름에 대한 자부심은 몇천만 원짜리의 명품 가방의 로고와도 같았다. 그런 곳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남으려면, 더욱 치열하게 임하고 더욱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한 팀’, ‘같은 편’이라는 의미는 남달랐다. K 법무법인 산하의 결속된 가사전담팀. 자부심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연수원 때 이후로 워크숍이라는 걸 경험해 본 적이 없던 세나도 오랜만의 외출에 은근 기대가 됐다. *** 주말 나들이를 위해 모처럼 세차를 하러 세차장에 왔다가 의외의 물건을 건네받았다. 짙은 주홍색의 실크 넥타이. 자신의 물건은 아닐뿐더러, 남자용 넥타이라니. 게다가 값비싼 브랜드였다.

16551856318155.jpg“이게 어디서 나왔다고요?”

세나가 세차장 직원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직원은 오른쪽 뒷좌석 밑에서 발견했다며 재차 확인해 주었다. 지퍼백을 머리 위로 들고 그 안에 담긴 넥타이를 뚫어지랴 바라보았다.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16551856318155.jpg“아……!”

류강현의 넥타이였다. 자잘한 명품 브랜드 특유의 무늬가 있는. 취향이 없는 남자는 주로 그 브랜드의 넥타이를 착용했다. 강현은 하나에 꽂히면 주야장천 그거 하나만 파는 사람처럼 뚝심이 남달랐다.

16551856318155.jpg“근데 이게 왜 내 차에 있어??”

차에 태워본 적도 없는 남자의 넥타이가 왜 제 차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한참을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 초봄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기온 또한 온화했다. 문제는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세나였다. 하필이면, 워크숍을 가는 날이 벚꽃이 개화하는 시기와 맞물려 거리는 온통 꽃가루 천지였다. 안 그래도 봄만 되면 죽을 맛인데, 모처럼 나들이를 가는 날 꽃들이 만개하니 눈도 따끔따끔, 코도 꽉 막혀 세나는 연신 재채기를 해댔다. 다행인 건 삼삼오오 모여서 출발하는 팀원들과 달리 혼자 차를 몰고 간다는 거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직장 내에서 쌓아왔던 우아하고 세련된 저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세나는 쓰고 있던 마스크를 내려 줄줄 흐르는 콧물을 닦았다. 몇 번이고 코를 훔치다, 아무래도 약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신호에 걸렸을 때 한 알 챙겨 먹었다. 점심시간이 지날 때쯤 도착한 세나는 차에서 내려 오늘의 숙소를 둘러보았다. 상쾌하고 개운한 공기와 초록빛이 넘실거리는 풍경이 어우러져 절로 힐링이 되었다.

16551856318155.jpg“좋네. 미리 약 먹길 잘했다. 여기서 마스크를 써야 했다면 아쉬울 뻔했어.”

서울 외곽지역의 고급펜션 한 동을 통째로 빌려, 주변이 한산해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들만 사용할 수 있는 야외 바비큐장과 정원, 작은 산책로가 있는 전경이 돈값을 톡톡히 했다. 팀원 중 가장 일찍 도착한 세나의 준비물은 당연하게도, 고기였다. 그녀는 차 트렁크에서 많은 양의 소고기가 들어있는 아이스박스를 꺼내 들었다. 어차피 먹고 죽자고 온 이상, 음식과 술은 끊이질 말아야지. 냉장고에 다 들어가지 않는 고기들은 아이스박스에 그대로 넣어두고, 개인 정원에 비치돼있는 빈백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팀원들을 기다렸다. 그러다 심심해진 세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친구가 없다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16551856318155.jpg“물어라도 볼 걸 그랬나…….”

따뜻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부는 계절, 모든 계절 중 가장 설렌다는 봄. 친구도 없이 주말에 뭐 하고 있을까, 지금이라도 오라고 하면 올까, 이런 자리는 싫어하겠지?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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