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다른 놈은 몰라도 넌 안 돼2021.10.19.
“아……. 그, 아마 후배들 사이에 끼어서 얻어먹었을걸요?”
세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문을 흐렸다. 그녀는 다른 후배들과 다르게 채성민에게 단 한 번도 밥을 사달라 조른 적도, 뭔가를 얻어먹은 적도 없었다. 기세나의 기억 속 채성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어울렸으며, 늘 복작복작한 학생들 사이에서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의 눈에 들고 싶어 한껏 꾸미고 다니던 여학생들도 많았고, 뭔가를 갖다 바치는 친구들도 많았다. 생전 처음 느낀 감정을 표현하기 서툴렀던 세나에게, 채성민은 가까우면서도 먼 사람이었다. 어린 날의 눈으로 본 그는 어딘가 어른스러웠고,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자 선뜻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었다. 이제는 흔적도 남지 않은 아득한 감정. 그가 유학을 떠난다고 했을 때 가슴이 너무 아파 눈물 콧물 짜며 매달렸던 기세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마주치지 않았다면 이십 대 시절 묻어둔 과거의 인연이었을 텐데. 류강현도 채성민도.
“요즘 말로 선배가 인싸였죠. 핵 인싸. 선배 좋아했던 애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을걸요?”
세나가 푸스스 웃으며 그땐 그랬지, 하며 추억을 삼키는데 그녀의 모습에서 뭔가를 캐치한 채성민이 자연스럽게 파고들었다.
“너는?”
채성민이 식탁 위로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었고, 그대로 지그시 세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선뜩한 사심이 그득했다. 갑자기 급변한 분위기에 세나가 당황하는 게 훤히 보였다. 굳이 승진을 축하하자고 꽃바구니까지 보냈을까. 남자가 여자에게 그런 선물을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건지, 기세나는 은근 속을 긁어대는 구석이 있었다. 그럼 결국, 직접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걸까.
“너는 나 안 좋아했어?”
지글지글 고기가 익어가는 불판을 앞에 두고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인제 와서 그때 선배를 좋아했다고 말하기도 뭣하고, 아니라고 말하기도 뭐한 분위기에 세나가 제 볼을 긁적이자, 채성민이 보란 듯이 크게 어깨를 들썩였다.
“나 사실 너 좋아했거든. 네가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거 같아서 포기했지만.”
“서, 설마요.”
말까지 더듬으며 얼굴을 붉히는 그녀를 보고 확신했다. 맞구나, 나 좋아한 거. 이제야 빈틈을 찾아낸 채성민이 입술을 한껏 끌어올리며 오만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설프게 류강현과 기세나의 사이를 파고드는 것보다 이쪽이 확실한 지름길이었다.
“그때 사귀던 여자랑 유학까지 같이 간 주제에 그런 말 하면 실례 아닌가?”
“…….”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게 류강현이 등장했다.
“선배 왜 이렇게 늦었어요? 근처라더니.”
안 그래도 이상하게 돌아가는 판이 어색해 죽을 맛이었던 기세나가 류강현을 보고 반색했다.
“퇴근 시간에 이 정도면 빨리 온 거지.”
강현은 입고 있던 코트와 재킷을 벗어 채성민 옆의 의자에 대충 던져두고 세나의 옆자리를 꿰찼다.
‘아. XX. 더럽게 운 좋은 새끼.’
채성민은 겨우 돌려놓은 흐름을 잽싸게 훔쳐 가버린 강현을 보며 욕지기를 삼켰다. 둘 사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세나는 강현의 앞에 새로운 수저와 잔을 세팅하고는 한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아직 다 먹지 않은 고기들이 불판 위에 있었지만, 소고기는 모름지기 살짝 익혀 먹어야 제맛이라며 바짝 구워진 고기를 정리하고 새로 주문을 넣었다.
“점심으로 육회를 먹어놓고, 또 소고기야?”
“취향 존중이요. 삼시 세끼로 소고기는 언제나 옳다. 못 들어봤어요?”
“보기와는 다르게 야성미가 넘친다니까.”
“선배도 좋아하는 것 같던데 뭘요.”
술을 추가로 주문한 세나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녀가 사라지자 화롯불이 이글이글,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분위기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싸늘하게 식었다. 마주하는 시선에 불꽃이 튀기고, 한참의 대치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강현이었다. 비스듬히 올라선 입꼬리에 조소가 가득하다.
“무슨 개수작을 부리려고 그런 헛소리를 입에 담았을까?”
“그러는 넌. 이런 자리라면 질색하는 주제에 왜 왔을까? 나 보러 온 건 아닐 테고.”
“내 경고가 씨알도 안 먹힌 것 같아서,”
“무슨 경고?”
채성민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비아냥거렸다. 때마침 술을 들고 왔던 종업원이 살벌한 분위기에 차마 따라주지 못하고 도망치듯 내려놓고 사라졌다. 채성민은 종업원이 두고 간 와인 병을 들어 강현의 잔에 대신 따랐다. 넘치기 직전까지 가득. 강현은 나른하게 내리깐 눈으로 와인잔을 빙그르르 돌렸다. 테이블 위로 붉은 와인이 후드득 흘러넘치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네가 사람을 등급을 나누고 수단으로 이용하는 거, 난 여전히 관심 없어. 나한테 피해만 안 끼치면 되니까. 그렇게 살다 아무도 모르게 뒤지더라도 아, 그랬구나. 하겠지.”
“말 한번 살벌하게 하네.”
가득했던 와인이 반절 정도 비워지자, 보란 듯이 한 번에 목구멍으로 털어 넘겼다. 입술에 남은 맛을 혀끝으로 훔친 강현이 잔을 깨뜨릴 기세로 강하게 테이블 위로 탁, 찍어 내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던 눈동자에 날 것의 감정을 드러났다.
“근데, 기세나는 건들지 마.”
으르렁대듯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수컷의 진득한 소유욕이 담겨있었다.
“와, 기세나가 대단하긴 한가 보네. 천하의 류강현을 뭐 마려운 똥개처럼 여기까지 쪼르르 달려오게 할 정도라니.”
채성민의 눈두덩이 위로 짙은 선이 그어졌다. 다정다감하고 유연했던 표정이 조금씩 생기를 잃고 굳어졌다. 그러나 곧 일자로 다물린 입술이 한쪽으로 치우쳐 비스듬히 기울었다.
“강현아.”
채성민은 두 팔꿈치로 테이블을 누르고, 강현에게로 상체를 바짝 기울었다.
“네가 이러는 걸 보니까 말이야. 더 욕심이 난다. 기세나.”
상대와 마찬가지로 한층 낮아진 목소리엔 조롱이 가득했다. 강현은 자신을 조롱하는 채성민을 한심하게 여기며 사용한 물수건을 집어 들어 자신이 쏟은 와인을 훔쳤다. 새하얀 물수건이 금세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말끔해진 테이블을 흡족하게 훑던 그가 채성민의 앞에 놓인 와인 잔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왔다.
“욕심나겠지. 이해해. 충분히 그럴 만하니까.”
고개를 끄덕거리던 강현이 돌연 채성민의 잔 위로 테이블을 닦은 물수건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망설임도 없이 두 손으로 꽉, 비틀었다.
쪼르륵- 물수건에서 흘러나온 붉은 액체와 잔에 남아있는 와인이 한데 뒤섞였다.
“그래도 딱 거기까지만 해. 안 그럼 나도 무슨 짓 할지 몰라.”
강현은 제 손에 묻은 와인을 성의 없이 탈탈 털어낸 뒤 자신이 만든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잔을 건네는 강현도, 그 잔을 받아드는 채성민도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왜 침이라도 발라놨어? 아니면 벌써, 뭐라도 했나?”
채성민이 주먹을 가볍게 쥔 손에서 새끼손가락만 쏙 세워 보였다. 강현이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주먹을 꽉 말았다. 하는 꼴이 저급하기 짝이 없다.
“아직 뭣도 아닌 주제에 네가 기세나의 뭐라도 되는 양 굴지 마. 구차해 보이니까.”
“구차해 보인다라…….”
맞는 말이다. 그래서 뭐. 그 구차한 짓거리조차 기꺼울 만큼 가치가 있는데, 뭐 어쩌라고.
“근데, 다른 놈은 몰라도 넌 안 돼.”
“네가 뭔데 그걸 판단해?”
“너도 잘 알잖아, 채성민. 걸레는 빨아도 걸레니까.”
“하긴. 네 눈엔 내가 걸레처럼 보이겠지.”
채성민은 손에 쥔 잔을 살짝 흔들어 보이더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쭉, 들이켰다. 깔끔하게 비워진 잔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그는 이까짓 더러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도리어 입맛을 다셨다.
“네가 뭘 모르는 것 같은데 걸레 새끼는 원래부터 더러워서, 조그만 땟국물 하나 묻어도 티가 나는 게 아니거든.”
스스로를 걸레 새끼라 칭함에 거리낌이 없었다. 제 성공을 위해서 남을 이용하는 게 뭐가 그렇게 대수라고.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은 죄다 옛말이었다. 개천에서는 용이 될 수 없다. 고작 미꾸라지 새끼쯤은 될 수 있어도. 그래서 가진 자를 이용해 노는 물을 옮겨보겠다는데, 그게 죄가 될까? 이렇게 살다가는 결국 남들 발이나 닦아주는 삶이나 살다 가겠지.
“네가 그랬잖아? 주는 대로 처먹는 것보다 골라 먹는 게 낫다고.”
그래서 이번엔 나도 좀 골라 먹어 보려고. 모처럼 구미가 당기는 맛이 눈앞에 있으니까.
“그런데 강현아, 네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니까, 한번 보고 싶다.”
아무것도 관심 없다, 필요 없다. 성인군자처럼 고고하게 구는 강현의 낯짝이 일그러지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그쪽이 더 재밌어 보이긴 해.”
“아……. 원한다면 더 재밌게 해 줄 수 있고.”
강현의 대답에 삐뚜름하게 치우친 입술이 기어이 양쪽으로 쭉 벌어졌다. 채성민의 비릿한 미소 속에 감춰진 혓바닥이 가시가 되기 직전, 화제의 주인공이 돌아왔다. 세나는 주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와인이 반병이나 비워진 걸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팔짱을 낀 채 딴 곳을 쳐다보는 강현과 생글거리는 채성민을 번갈아 보았다. 딱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무슨 심각한 얘기 중이었어요?”
“다 큰 남자 둘이서 할 말이 뭐 있겠어? 술이나 마신 거지.”
세나의 물음에 채성민은 가면을 뒤집어쓰듯 안면을 싹 갈아치우며 제 앞의 병을 들었다. 비워졌던 잔이 다시 채워졌다. ***
“선배는 차 가지고 왔으니 대리 부를 거고. 성민 선배는요?”
“난 안 가져왔는데. 집이 어느 방향이야?”
“저는 회사랑 가까워요. 서초동이요.”
“나 서래마을 쪽인데 태워주라.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나 봐. 술을 많이 마셨더니 머리가 조금 아프네.”
채성민은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더니 몸을 살짝 비틀거렸다. 기울어진 머리가 세나의 어깨에 닿으려는 찰나, 옆에 서 있던 강현이 그의 팔뚝을 잡아채 바로 세웠다. 팔뚝을 틀어쥔 악력은 뼈가 아릴 정도로 강했다. 채성민이 뭐 하는 짓이냐 눈살을 찌푸리자, 강현이 콧방귀를 뀌었다.
“뭘 태워줘. 여기 널린 게 택시인데, 택시 타고 가.”
“내가 멀미를 해서. 택시는 냄새가 나서 속이 울렁거릴 것 같은데.”
“그래요, 제가 태워드릴게요. 먼 거리도 아닌데.”
“먼 거리도 아니니 모범택시 타면 되겠네. 쾌적하게.”
그러더니 도로 위에서 손님을 기다리던 샛노란 등을 켠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까만 윤기가 흐르는 모범택시가 그들 앞에 멈춰 섰다. 강현은 말릴 새도 없이 뒷좌석 문을 벌컥 열어 취한 척 같잖은 수작을 부리는 채성민을 끌어당겨 억지로 욱여넣었다.
“잠깐,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술 취한 놈이 뭘 그런 걸 신경 써.”
채성민은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강현의 손을 뿌리치며 이빨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