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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구밀복검(口蜜腹劍) (31/120)

31화. 구밀복검(口蜜腹劍)2021.10.16.

류강현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선 그대로 몸을 돌려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 버렸다. 며칠 뒤 채성민은 여자로부터 오피스텔 키를 받았다. 개집보다 작은 집에서 무슨 공부를 하냐며 자기가 팍팍 밀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두말하면 입이 아프겠지만, 강현은 채성민이 이사 간 줄도 몰랐다. 그 후로 몇 달 뒤, 집에서 유학을 가라 했다며, 그녀는 채성민에게 함께 가자고 권했다. *** 세나는 자신의 집무실을 꾸밀 가구를 보러 가기 위해 일찌감치 회사를 나왔다. 수임하는 사건이 많을 때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오늘처럼 상담이 없는 날이면 하고 싶은 공부를 하거나, 취미 생활을 즐길 수도 있었다. 변호사는 같은 법조계에 종사하는 다른 직종에 비해 여유로운 편이었다. 물론 주니어 변호사일 때는 꿈도 못 꿀 호사였다. 한 손에 테이크 아웃 커피를 손에 들고 논현동 가구거리를 거닐었다. 쇼윈도에 전시된 가구가 마음에 들면 안으로 들어가 직접 만져보고 앉아보기까지 했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 마음에 쏙 드는 소파를 찾았다. 짙은 초록색의 보드라운 천을 덧씌운 일인용 소파는 양쪽으로 두툼한 팔걸이가 있었고, 앉는 순간 몸이 물속에 잠기는 것처럼 포근하고 아늑했다. 세나는 똑같은 소파 두 개를 주문하면서 그와 어울리는 둥그런 러그도 함께 주문했다. 두툼한 러그 위에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소파. 그리고 찻잔을 올릴 수 있는 낮은 티 테이블까지. 근심과 걱정을 한 아름 안고 찾아오는 의뢰인들을 위한 공간이 될 사무실을 생각하자 얼굴에 절로 웃음이 번졌다. 이렇게까지 제 일을 좋아하게 되리라 생각지 못했다. 처음엔 그저 한 사람을 이해해보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다 그런 마음이 흐지부지해질 때쯤에는 제 성공을 위해 위만 쳐다보고 바쁘게 달려왔다. 그런 일상에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내친김에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따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16551855643135.jpg“그건 좀 오번가? 뭐 어때, 좀 더 프로페셔널해지는 거지.”

자신의 이런 행동을 열정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노력해서 얻은 것을 시기하는 게 아니라, 더욱 앞을 보고 달려 나갈 수 있게 밀어주는 사람. 든든히 뒤에서 저를 지원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류강현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천성적으로 탑재된 까칠함은 덤이었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번만큼은, 사람 보는 눈이 있다는 기장수 대표의 말이 옳았다.

16551855643135.jpg“파트너로서는, 최고지…….”

짧게 읊조리며 고개를 턴 세나가 채성민과의 약속을 위해 차에 올라탔다. ***

16551855643135.jpg“성민 선배, 여기요.”

선릉역 부근 높은 빌딩 사이에는 숨은 맛집이 많았다. 그중 11층에 있는 다이닝에서 성민을 맞이한 세나였다. 개별공간으로 나누어진 섹션과 비싼 값을 하는 질 좋은 음식들로 유명한 이곳은 누군가를 접대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세나의 곁으로 다가온 성민이 트레이드마크인 눈웃음으로 반가움을 전했다.

16551855643157.jpg“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이랑 저녁을 먹으려니 벌써 배가 부른 것 같은데?”

16551855643135.jpg“에이, 꽃바구니에 비하면 너무 약소하죠.”

16551855643157.jpg“이런 보답이면 매일 보내 줘야겠는데?”

채성민이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한쪽 의자에 걸어두고는 세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16551855643135.jpg“아 참, 강현 선배도 불렀어요.”

16551855643157.jpg“응?”

채성민은 제가 뭔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류강현이 이런 자리에 흔쾌히 올 리가 없을 텐데…….

16551855643135.jpg“선배랑 저녁 약속 있다고 하니까, 자기도 오겠다던데요?”

16551855643157.jpg“류강현이 여기에 온다고?”

재차 되물은 채성민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고, 메뉴판을 보던 세나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대답했다.

16551855643135.jpg“네. 외근 갔다 돌아오는 길이라던데 근처면 오라고 했거든요. 두 사람 여전히 사이가 좋네요.”

세나는 ‘저 잘했죠?’ 하는 낭창한 미소를 보이더니, 직원을 불러 메뉴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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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85567178.jpg“맛있게 드세요.”

선홍빛의 영롱한 소고기를 맛있게 구워주던 직원이 제 할 일을 마치고 물러났다. 채성민은 젓가락을 들기 전 와인 잔을 먼저 들어 세나의 앞으로 내밀었다. 허공에서 두 잔이 부딪치고, 시선도 부딪혔다.

16551855643157.jpg“단둘이 보는 줄 알았는데.”

16551855643135.jpg“원래는 그럴 계획이었는데, 오는 길에 강현 선배 전화가 와서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먹으면 좋잖아요. 선배랑 강현 선배랑 친하기도 하고.”

류강현과 친한 사이라. 성민이 비죽이 솟아오르는 입술을 붉은 와인 아래 감췄다. 피보다 검붉은 와인을 입속에서 음미한 후 꿀꺽 삼키자, 단맛보다는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채성민과 류강현은 각자 추구하는 가치관이 다르다 보니 겹칠 일도 없었고, 함께 아는 사람도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가 유학을 끝내고 한국에 들어와 유일하게 먼저 찾은 사람이 강현인 것도 필요에 의해서 인간관계를 맺는 자신에게 딱 맞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음흉한 속내를 감출 필요도, 그렇다고 빌빌 기며 잘 보일 필요도 없는 사이. 친구는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서로에 대해 가장 잘 알게 된 이상한 사이. 이 이상한 관계가 남들 눈에는 친구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16551855643135.jpg“선배를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만큼, 사실 강현 선배랑도 진짜 오랜만에 만났거든요.”

16551855643157.jpg“그랬구나.”

채성민이 늘 하던 방식으로 둘의 사이를 재단했다. 뻔하지. 일 적으로 부딪힐 일이 없다면 만났을 리 없다는 걸 왜 모를까. 이혼 전문이라면 더더욱, 특수부 검사였던 강현과 접점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세나가 먼저 연락하지 않는 이상, 강현이 그녀의 번호를 찾아내 연락을 취했을 리도 없고. 그럼 K 로펌에 파트너 변호사로 들어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나? 운 좋은 새끼. 저랑 마찬가지로 가진 건 쥐뿔도 없는 새끼가 유달리 운만 좋다. 채성민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세나는 그간의 오해가 조금 쑥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16551855643135.jpg“저 사실 학창 시절 때 강현 선배 미워한 거 알아요?”

16551855643157.jpg“미운 짓만 골라 하던 놈이니까.”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며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좀 와인이 달게 느껴졌다.

16551855643135.jpg“맞아요. 그랬는데……. 아, 선배도 혹시 아셨어요? 강현 선배가 저 학교 다닐 때 뒤에서 엄청 많이 챙겨준 거요.”

그러나 그녀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은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었다.

16551855643157.jpg“걔가 남을 챙길 놈이 아닌데.”

그럴 리가.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 류강현은 기세나에게 대해 일언반구 꺼낸 적이 없었다. 지금 제 앞에 앉아있는 여자의 이름이 기세나인지 김세나인지나 알았을까?

16551855643135.jpg“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세나가 병을 들어 채성민의 잔과 제 잔을 채웠다. 투명한 잔에 담긴 불투명한 와인이 누군가를 떠오르게 한다. 직접 맛을 보기 전에는 숙성된 향과 맛을 느낄 수 없다는 점에서.

16551855643135.jpg“근데, 지금 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요.”

16551855643157.jpg“왜? 무슨 일 있었어?”

16551855643135.jpg“그것도 성격인가 봐요.”

세나가 눈을 도르륵 굴려 가게 안을 살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류길동’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그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16551855643135.jpg“은근히 손해 보는 성격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만 완전 배은망덕한 후배 됐잖아요.”

앞에서 대놓고 챙겨주고 티를 내면 고맙다는 말이라도 들을 텐데, 아무도 모르게 뒤에서 챙겨주니 누구도 그의 수고를 알지 못했다.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 다들 제가 잘해서 그런 줄 착각이나 하지.

16551855643157.jpg“손해라. 과연 손해라고 생각이나 할까? 어차피 걘 지가 하고 싶은대로 했을 거야. 널 신경 쓴 게 아니라.”

16551855643135.jpg“꼭 그렇지만도 않더라구요. 요즘 보이는 것도 있고. 정희가 해 준 말도 있어서요.”

16551855643157.jpg“정희? 박정희 말하는 거야?”

16551855643135.jpg“네. 어, 선배는 아시네요? 강현 선배는 아예 기억 못 하던데.”

16551855643157.jpg“알지. 왜 몰라.”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이름은 낯익은. 아마도 대학 시절 저를 따라다니던 후배 중 한 명일 거로 추측했다. 그 시절 제 주변에 모인 수많은 관중 중에는 그다지 기억할 만한 인물들이 없었다. 정희를 안다는 말에 세나는 그녀가 자신에게 들려줬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세나는 채성민과 자신이 오랜만에 만난 사이라는 것을 잊은 채 재잘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길어질수록 그의 표정은 조금씩 굳어갔다. 느린 움직임으로 와인 잔을 손에 쥔 채성민은 세나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류강현. 류강현. 류강현. 마주 보고 앉은 지 대략 삼십 분 동안 세나의 입에서는 류강현에 대한 이야기만 흘러나왔다.

16551855643135.jpg“혹시 선배라면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 모르셨구나. 역시 강현 선배가 좀 특이하긴 해요. 왜 그랬을까요? 전 그런 것도 모르고, 로펌에서 만났을 때 땍땍거리기만 한 거 있죠. 사실관계를 알고 나서 민망해 죽을 뻔했다니까요.”

아마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만, 신경에 거슬렸다. 목표가 눈앞에 있는데 상대는 다른 곳만 보고 있으니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류강현에게로 쏠린 화두를 제게 끌어올 수 있을까, 채성민은 세나의 얘기에 관심 있는 척하며 속으로는 머리를 굴렸다.

16551855643135.jpg“정희 말로는 선배가 유일하게 아끼던 후배가 저라고 하던데. 그건 좀 거짓말 같고. 이제라도 좀 잘 지내보려고 노력 중이에요.”

16551855643157.jpg“강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워낙 앞뒤가 다른 놈이니까.”

16551855643135.jpg“맞아요. 차라리 티 좀 냈으면 좋겠어요. 나 너한테 이만큼 해줬으니 잘 기억했다가 갚아라. 이렇게.”

잔을 든 채성민의 손이 일순 멈칫거렸다. 분명 교묘하게 비꼬는 말이었는데, 도리어 칭찬을 하는 꼴이라니. 다시 만난 지 얼마 안 됐다, 한 거 같은데 꽤 신뢰 관계가 두터웠다. 이래서야 낭패를 볼 게 뻔했다.

16551855643157.jpg“우리 세나가 이제 강현이랑 완전히 한편이 됐나 보네?”

16551855643135.jpg“일 적인 면에서는 존경하죠. 전에 저한테 자기는 보는 것만 믿는다고 하더라구요. 그러고 보면 외골수 기질도 있어서 딱 책잡히기 좋은 타입이네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고기 한 점을 입안으로 쏙 밀어 넣었다. 다행히 입속의 고기를 오물거리는 동안은 류강현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않을 수 있었다. 한마디만 더 했다면 저도 모르게 그만하라 인상을 찌푸렸을지도 모른다.

16551855643157.jpg‘일이 재밌게 돌아가네…….’

쉬운 상대라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복병이 있었다. 류강현이 제 인생에 걸림돌이 될 줄이야. 채성민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분위기로 보건대, 류강현에 대한 세나의 믿음은 쉽게 깨어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좀 더 기세나를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채성민은 일단 관심도 없는 아무 이름이나 끌어왔다.

16551855643157.jpg“그래서 정희는 잘 지내?”

16551855643135.jpg“정희 국선변호사 됐어요. 아! 오늘 정희도 부를걸. 선배 만나는 거 알면 좋다고 뛰쳐나올 텐데.”

16551855643157.jpg“다음에 같이 보면 되지.”

16551855643135.jpg“정희가 선배 엄청 좋아했는데. 밥 사달라고 조르고.”

16551855643157.jpg“그래. 그래서 내 지갑은 늘 가난했잖아. 후배들 밥 사준다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지갑이 가난했던 적은 없었다. 다른 사람의 돈으로 늘 가득 차 있었지.

16551855643157.jpg“그런데 왜 세나한텐 밥을 사준 기억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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