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 남자 vs 그 남자2021.10.12.
“증언할게요. 다. 제가 알고 있는 사실. 전부. 그럼 저 도와주실 건, 가요?”
앞을 향했던 강현의 얼굴이 오진호를 돌아보기 전, 그의 입가엔 승리자의 미소가 걸렸다.
“오진호 씨. 하나만 묻죠. CCTV 원본 가지고 계십니까?”
끝말이 물음으로 올려졌지만, 질문이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소심한 오진호가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절대 원본을 지우지 않았을 거란 확신. 그리고 강현의 확신은 승률 99.99%였다. 오진호는 저를 뚫어질 듯 응시하는 강현의 시선을 피해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쥐었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뭘 어떡합니까? 알고 있는 사실 그대로 증언하셔야죠. 처벌은 받겠지만, 정상참작으로 집행유예가 나올 겁니다.”
강현이 오진호의 앞으로 성큼 다가서서 자신의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상대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강현을 쳐다보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보았다. 먹이사슬의 정점에 서 있는 한 남자의 자신감을.
“차후 B 기업이 오진호 씨를 직무유기, 횡령으로 고소한다면, 제가 변론해 드리죠.”
시원하게 뻗은 눈매와 그 안에서 빛나는 당당한 눈동자. 강현은 있던 죄도 사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당신의 변호사인 이상 절대 지지 않을 겁니다.”
*** 십여 년 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언저리. 대학가 빌라촌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세단이 좁은 골목길에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채성민이었다. 눈을 반쯤 가린 앞머리가 바람에 살랑이자, 가로등 불빛 아래 짙은 갈색의 눈동자 반짝반짝 빛이 났다. 채성민은 보조석에서 내린 여자에게 차 키를 돌려주며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지었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만진 아이처럼.
“덕분에 이런 차도 타보고. 재밌었어. 오늘.”
“……설마 여기 살아?”
몇 달을 만나면서 그가 사는 곳을 처음으로 확인한 여자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와락 찌푸린 눈살로 주차장도 없는 4층짜리 빌라를 올려다보던 여자는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사는지 궁금해했다.
“세상에, 우리 뽀미 집보다 작을 것 같은데…….”
자신이 키우는 개집보다 작다는 말에 나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무지에서 오는 순수한 악이었다.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가 생각 없이 내뱉는 말처럼. 돈 많은 부자 부모 만나서, 하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아쉬움도 없이 죄다 누리고 사는 여자였다. 과연 그녀가 8평 남짓한 방 안에 화장실, 세탁실, 부엌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이 실용주의적인 생활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인종과 흙수저는커녕 손가락을 빨고 태어난 인종은 태생부터 비교 불가다. 채성민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추위와 혹은 더위와 씨름하던 단칸방 생활을 했고, 그런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채성민은 자신의 장점도 아주 잘 알았다. 호감형 외모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순진한 눈망울. 그 눈매를 반으로 접어 살살 눈웃음을 쳐주면, 꼭 닫혀있던 지갑이 스르륵 열린다는 것을. 더불어 모성애가 넘치는 마음도. 그에게 어리숙하고 순진한 법학생도 흉내쯤은 코로 숨 쉬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산소가 있고, 폐가 제 기능을 하는 동안 밥 먹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그런 일. 채성민은 자신의 비루한 꼴을 수면 위로 내비쳐 동정심을 구걸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자극하고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달은 지 오래였다. 특히, 똑똑한 남자를 액세서리 취급하는 여자한테는 더욱 특화되어 있었다.
“대학생이 다 그렇지. 등록금에 월세에 생활비에. 그래도 다행이야. 나름 명문대생이라고 과외는 쉽게 구하니까. 알바를 했으면 널 만날 시간도 없었을 거야.”
“과외 하는 거 얼마 번다고. 그 시간에 차라리 나를 만나. 돈이라면 내가 줄게.”
“바보냐. 좋아하는 여자한테 돈 받고 싶어 하는 남자가 세상에 어딨어? 그리고 난 빨리 졸업하고 싶어. 사법고시만 합격하면 네가 먹고 싶은 것쯤은 얼마든지 사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러고는 오늘 밤 헤어지는 게 아쉽다는 듯 그녀의 손끝을 매만졌다. 아주 소중한 크리스털 잔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녀가 소중한 것은 맞았다. 현재 채성민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가치가 있는 상품이었으니까.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기업의 고명딸인 그녀는 채성민을 이 구질구질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줄 동아줄이었다
“집이 너무 좁아서. 초대는 못 하겠다……. 미안.”
“그럼 호텔로 다시 갈까?”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내일 시험이야. 이거 보답하려면 시험 잘 봐서 장학금 타야지.”
고개를 떨군 채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성민의 손목엔 오늘 그녀에게 받은 명품 시계가 떡 하니 채워져 있었다. 소형차 한 대 값은 거뜬히 넘기는 고가의. 물론 제 입으로 사달라고 한 적이 없는 선물이었다.
“그런 거 신경 쓰라고 사준 거 아냐. 자기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내가 사준 거야. 부담스러워?”
“그런 게 아니라 네게 해 주고 싶은 게 많아지는데, 내가 아직 부족해서 생각만 많아지네.”
“그럼 과외 그만두면 안 돼? 장학금이고 뭐고, 내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 우리 만나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잖아. 자기를 못 보면 내가 너무 외로워서 그래.”
채성민에게 과외를 받는 학생이 부러울 지경이라고 여자는 볼멘소리를 해댔다. 여자가 매달릴수록, 채성민은 되레 어른스럽게 굴었다. 그가 한 손으로는 여자의 손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절절함이 묻어날 정도로 애달프게.
“아무 계획도 없이 놀기만 하면 앞으로 우리 뭐 먹고 살아. 내가 빨리 성공해야지.”
채성민이 그녀와의 미래에 대해 어렴풋이 속내를 내비치자 여자는 좋다고 덥석 먹이를 물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는데, 혀 한번 놀려서 여자에게 감동을 주는 일에는 나름의 재능도 필요하다. 앞길이 창창하고 똑똑한 남자면서 순애보적인. 지금 채성민이 꾸미고 있는 모습이 딱 그랬다.
“조금만 기다려줘.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너 하나쯤은 내 능력으로 먹여 살릴 수 있다, 그러니 기다려달라. 채성민은 자신을 능력을 과시하지도, 그렇다고 밑바닥으로 깔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녀 앞에선 그저 사랑만을 바라는 순수한 청년의 앳된 모습으로 둔갑했다. 그럴수록 여자는 자신이 남자 하나 잘 만났다는 착각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진짜 이런 순진한 남자가 어디서 나타났지? 다른 놈들은 나한테 빼먹을 궁리만 하는데. 빈말 아니야, 내가 다 해 줄 수 있어. 자기한테 해주는 거 하나도 안 아까워. 자기는 나만 사랑하면 돼.”
“아…….”
채성민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졌다. 조금 놀란 듯 눈동자도 살짝 흔들렸다. 눈가에 어룽지게 맺힌 눈물에 여자가 당황해서 왜 그러냐고 묻는 그 순간, 그가 화룡점정을 찍는다.
“누군가 나를 이토록 사랑해준다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인 줄 몰랐어. 널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사랑 따윈 모르고 살았을 거야.”
애달픈 손길로 그녀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채성민은, 원하는 말만 골라 뱉는 그녀의 입술 대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왜냐고? 여자들은 입술보다 이마에 하는 키스에 더 의미를 두니까. 채성민은 호텔로 가자는 여자를 차에 태웠다. 좁은 골목길 주차할 공간이 여의치 않은 터라 시험 끝나자마자 연락하겠다는 말로 그녀의 아쉬움을 달랬다. 마지막까지 성민에게 홀딱 반한 여자가 과외를 그만두라는 조건으로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 사라 말하며. 이런 거 필요 없다, 몇 번이나 거절한 끝에 그녀가 단호하게 ‘날 사랑하면 받아줘.’라고 할 때까지 버티다 못 이기는 척 받았다. 여자는 사이드미러로 분명 저를 지켜볼 것이다. 골목 어귀로 멀어지는 차를 끝까지 바라보다 뒤돌아섰을 때, 빌라 한구석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던 류강현과 마주쳤다. 같은 시기에 복학한 동기. 적은 말수와 날카로운 인상 때문인지 류강현과 친한 동기는 아무도 없었다.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빌라에 사는 채성민조차 강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저 멀대 같은 놈이 학과 수석이라는 것 말고는.
컴컴한 밤. 치켜뜬 눈동자엔 희번덕한 경계심이 서렸다.
“너 나 알지?”
“너도 나 아는 거로 아는데.”
기선제압을 할 목적으로 다그쳤으나 상대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저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그에게선 어떤 표정도 읽어낼 수 없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봤어?”
“뭘?”
“방금.”
“아-.”
여자에게 카드를 받아든 모습을 봤냐는 질문을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뭘 묻는지 단박에 알아차린 대답이었다. 채성민은 학교 안에서 늘 좋은 사람 행세를 하고 다니던 것도 잊고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웠다. 함부로 입을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경고라도 할 요량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는데, 류강현은 심드렁히 하품을 하더니 이내 빌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야! 너 거기 서.”
채성민은 놓칠세라 쫓아가 불러세웠다. 이미 계단 위에 한 발짝 올라선 강현이 트레이닝 팬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상체만 돌려 그를 내려보았다. 어디서부터 본 것인지 알 길이 없어 뭐부터 말해야 할까, 고민하는 그를 두고 강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관심은 없는데,”
“…….”
“내일 시험 있었어?”
류강현은 어이없는 새끼였다. 쓰러져가는 빌라촌에 살면서 주눅 드는 법이 없는 놈. 누가 뭐라고 지껄이건 제 할 말만 하는 놈. 같은 빌라에 살건, 같은 수업을 듣건, 저를 욕하건, 저를 추켜세우건, 그 누구에게도 관심 없는 놈. 그는 바로 옆방에 사는 채성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를 갈아치우든, 두 명, 세 명을 끌고 와 하룻밤을 보내든, 저에게 피해만 안 가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놈이었다. 애초에 관심이 없으니까. 강현에 대한 경계심이 풀리자 허탈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학연, 지연, 혈연. 인맥 장사로 먹고사는 시대에 저런 놈은 도대체 뭐로 먹고살까 하는 순수한 호기심도 피어났다.
“시험은 무슨. 그냥 핑계지. 대학생이 댈 수 있는 최고의 핑계.”
조금 전까지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바칠 것 같던 채성민이 민낯을 드러냈다. 그토록 사랑한다는 여자를 그린다기엔 비릿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잘되면 한턱 쏠게.”
“글쎄. 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