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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승부사 (29/120)

29화. 승부사2021.10.09.

16551855237825.jpg“아. 알다가도 모를 남자라니까. 한없이 냉정한 것 같으면서도 어떤 때는 또 다정하고.”

일하는 류강현에 대해선 남들보다 잘 알고 있지만, 여자를 만나는 류강현은 세나에게 미궁에 빠진 난제 같은 느낌이었다. 이상형조차 없다고 답한 류강현은 어떤 연애를 하는 남자일까? 소문처럼 정말 여자를 만나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스타일일까? 세나의 머릿속에서는 검찰청 숙직실에서 멀쑥하게 생긴 남녀가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 입술을 쪽쪽거리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여자의 얼굴은 흐리게 처리되어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남자의 것은 날렵한 턱선 하며 반듯하게 솟은 콧대, 감고 있어도 시원하게 찢어진 눈매가 누가 봐도 류강현이었다. 어째 상상인데도 남자의 입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선명한 색으로 라인이 뚜렷한 입술이, 키스 하나는 끝내주게 생겼다.

16551855237825.jpg“어우. 소름. 뭔 그런 상상을 해! 기세나 정신 차려!”

세나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소문을 믿지 않으면서, 그 소문 속에 류강현을 끼워 맞추려 하다니. 그런 멍청한 짓에 시간 낭비를 하는 것보다, 협의서에 오타가 있는지 한 줄이라도 더 들여다보는 게 나으리라. 세나가 가지런히 놓인 파일 하나를 손에 들고 열이 홧홧하게 오른 얼굴 위로 연신 부채질을 했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강현이 복도로 나와 좌우를 살폈다. 그러다 김 변호사를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김 변호사는 복도를 서성거리며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사람과 계속해서 통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류강현을 보자마자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부터 쉬었다. 전단지 쪼가리들이 덕지덕지 붙은 문을 보며 강현이 물었다.

16551855237884.jpg“여깁니까?”

16551855237888.jpg“만나주겠다고 해서 왔는데, 갑자기 상대측에서 무슨 말을 전해 들었는지 이젠, 아예 전화도 안 받네요.”

와달라는 전화를 받을 때부터 일이 쉽게 풀리지 않으리라 예상했던 터였다.

16551855237884.jpg“아침에 받은 자료는 확실한 겁니까?”

16551855237888.jpg“네. 계좌번호의 주인과 B 기업 업무지원 책임자인 오진호 씨랑 동거인 관계로 확인됐습니다.”

오진호 책임자가 A 기업에 도움이 되는 증인일지, 아니면 어떨지를 가늠하는 와중 새로운 증거가 포착됐다. K 법무법인의 조사관들이 관련자들의 계좌를 추적하던 중 오진호의 계좌에서 퇴직금 명목으로 들어온 억대의 돈과 출처를 알 수 없는 돈을 발견했고, 집요한 추적 끝에 계좌주인과의 연관성까지 찾아냈다. 퇴직금 명목으로 받은 액수 역시 오진호가 받기엔 큰 액수였기에 미심쩍어하던 참이었다. A 기업과 B 기업의 양측 책임 공방은 여전히 팽팽했고, 증거물과 증인들 확보에 있어서 난항을 겪고 있던 류강현의 팀에겐 좋은 소식이었다. 강현이 문 옆의 초인종을 누르자, 연결선을 뽑아 놨는지 딸깍딸깍, 헛도는 소리만 났다. 김 변호사가 집안에 사람이 있다 전하자, 초인종을 누르던 손으로 현관문을 두드렸다. 강현이 곧장 문 너머의 반응에 귀를 기울였지만, 응답이 없었다. 김 변호사가 강현과 같은 행동을 몇 번이나 시도해 봤는지 질린 기색을 보였다.

16551855237888.jpg“아까부터 계속 대치 중이에요. 류 변호사님, 차라리 법원에 증인 신청부터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16551855237884.jpg“일단 얘기부터 해보는 게 우선입니다. 증인 신청을 한다고 해도 시간만 질질 끌 테니까요. 이미 인수가 반 이상 진행된 상황에서 시간을 끌면 저희 쪽이 훨씬 손해니까.”

강현이 주먹을 말아 쥐고 쾅쾅쾅, 철문을 두드렸다. 커다란 소리가 적막한 복도에 날카롭게 울렸다. 여전히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조금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16551855237884.jpg“오진호 씨. K 법무법인의 류강현 변호사입니다. 안에 계시죠?”

현관문 너머의 상대에게서는 이 소란이 저와는 상관없다는 듯 응답이 없었지만, 강현의 시야에 인터폰에 들어온 빨간불이 포착되었다. 집 안에 숨어 있는 오진호가 인터폰을 통해 바깥 상황을 지켜볼 요량인 듯 보였다. 찰나의 순간, 강현은 상대의 심리를 꿰뚫었다. 그리고 들으라는 듯 문에 대고 목소리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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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855237884.jpg“안에 계신 거 알고 왔습니다. 이렇게 숨어계시지 말고 저희랑 대화부터 하시죠.”

상대는 강현의 등장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정말 아무런 잘못이 없다면 무시로 일관할 테지만, 김 변호사에게 만나겠다는 말을 한 뒤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거라면 분명 찔리는 게 있어서겠지.

16551855237884.jpg“증거로 제출된 CCTV 영상에서 인위적인 삭제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강현은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낮은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16551855237884.jpg“오진호 씨가 CCTV 관리 총책임자로 알고 있는데. 저희는 B 기업에서 이번 사태를 책임지지 않기 위해 증거를 인멸했다, 간주하고 그 책임을 오진호 씨에게 물을 겁니다.”

상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인터폰의 빨간불은 여전히 깜빡거리고 있었다. 강현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본인의 집이 아닌 다른 사람 명의의 아파트. 오진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강현의 예상이 맞다면. 오진호는 만에 하나 일이 잘못돼 위증죄로 처벌받는 것보다, 차라리 출석 요구서를 못 받은 척하기 위해서 집에 없는 척하는 것이다. 그리고 꼭꼭 숨어서, 자신의 증언 없이 재판이 하루빨리 끝나기만을 기도하며.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댄데. 사람 하나 찾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강현은 오진호의 얕은 수작에 실소했다.

16551855237884.jpg“게다가 퇴직금치고는 받으신 금액이 상당하던데.”

명예퇴직이라 하더라도 말이 안 되는 금액이었다.

16551855237884.jpg“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그 돈을 내부 비리를 묵인하는 대가로 받은 거라 법원에 증거로 제출할 예정입니다. 그럼, 증인 불출석 벌금형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강현의 싸늘한 목소리와 확신이 가득한 말투에 상대의 불안감은 점점 커질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경찰이나 검사를 만나면 잘못이 없음에도 쉽게 위축되곤 한다. 권력에 대해 잘 모르는 자에게 공권력이란 제법 크게 다가오는 법이니까. 한때 류강현은 그런 심리를 매우 잘 이용하는 검사였다. 사기꾼부터 살인마까지. 숱한 범죄자를 상대해온 그가 대가성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겁을 먹고, 몸을 숨기기 바쁜 상대의 심리를 휘두르는 것쯤은 껌이었다.

16551855237884.jpg“제 손으로 무덤을 파겠다는데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불안감을 키웠으니 이제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야 할 차례였다. 그러나 강현은 상대가 더욱 불안해하도록 돌연 입을 다물었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자 딸깍, 인터폰 너머로 수화기를 들어 올리는 소리가 났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강현이 전보다 부드러워진 어투로 상대를 달랬다.

16551855237884.jpg“오진호 씨, 위증죄에는 미수가 없습니다. 하려는 마음을 먹었다고는 죄가 되진 않는다는 말입니다.”

16551855237888.jpg“그, 그만 가주세요. 저는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인터폰 너머에선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겨우 새어 나왔다. 말을 더듬으며 책임을 회피하는 오진호는, 누가 들어도 확신이 없어 보였다.

16551855237884.jpg“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처벌도 위에서 시키는 대로 받을 겁니까?”

16551855237888.jpg“…….”

16551855237884.jpg“오진호 씨. 당신 지금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나 본데.”

‘하아-.’ 강현이 일부러 더 크게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인터폰 화면 너머로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오진호에게 보란 듯이 거친 손길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눈매를 가리던 머리칼이 치워지고 훤칠한 이마가 드러났다. 승부사인 강현의 검은 눈동자가 매서운 빛을 발했다.

16551855237884.jpg“하나만 확실하게 말해 두죠. 제가 지금 여기, 바쁜 시간을 쪼개서 오진호 씨를 만나러 온 게 고작 증인을 서달라, 설득하러 온 게 아니란 겁니다.”

16551855237888.jpg“그……, 그게 무슨, 말이죠?”

16551855237884.jpg“이대로 가면 오진호 씨는 곧 증인이 아니라, 피고로 재판에 서게 될 겁니다.”

강현은 심각한 척 미간을 살짝 좁히며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16551855237884.jpg“그때 가서 B 기업이 오진호 씨를 어떻게 대할지. 참 눈에 훤하네요.”

여태까지 B 기업을 조사한 결과, 인명사고는 이번 한 건이 아니었다. 산재 처리를 해야 하는 사건들도 뒷돈을 써서 묻었고, 이에 이의를 제기한 직원은 불합리한 처우로 권고사직을 당했다. 뒷맛이 묘하게 구리다는 강현의 직감이 적중했다. B 기업 대표와 안전 관리공단 심사원은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였고, 해마다 고가의 선물을 주고받고 접대를 한 흔적도 발견되었다. 캐면 캘수록 첩첩산중이었다. 여태껏 걸리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이런 실태를 미리 알았다면 A 기업은 B 기업을 인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B 기업 대표에겐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그에겐 돈 몇 푼에 증거를 인멸하는, 즉 오진호처럼 순진한 사람들이 몇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16551855237884.jpg“오진호 씨도 생각이라는 게 있으면 아시겠죠? 내가 B 기업 대표라면, 오진호 씨에게 돈도 줬겠다, 모르는 일이다 딱 잡아뗄 거 같은데. 이대로 독박 쓰고 싶습니까?”

그리고 강현에겐 판을 굳히기 위해 오진호가 필요했다. 증언뿐 아니라 B 기업의 실태 관련 내부고발도 할 수 있는 사람. 상대의 심리를 간파한 협박에 인터폰 너머 오진호의 숨이 가빠졌다.

16551855237884.jpg“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저희는 여기서 손 털죠. 재판 때 두고 보면 알 테니까.”

마지막 말을 끝으로 강현을 미련 없이 돌아섰다. 상황 파악이 느린 김 변호사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제자리를 지켰다. 할 수 없이 강현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살짝 고갯짓했다. 그제야 강현의 의도를 파악한 김 변호사는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문에서 물러섰다.

16551855237888.jpg“아……, 저기…… 저 잠시만요……!”

다급한 외침과 함께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문이 삐거덕 열렸다. 그 소리를 듣고도 강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안달이 난 오진호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강현의 팔뚝을 잡았다. 강현은 무심한 눈을 하고 제 팔뚝에 매달린 손을 보았다. 그의 내리깐 시선이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가차 없이 돌아온 냉담한 반응에 오진호는 어쩔 줄 몰라, 일단 손을 떼어 자신의 바지춤을 그러쥐었다.

16551855237888.jpg“이,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16551855237884.jpg“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싸늘한 눈초리만큼 싸늘한 목소리였다. 인터폰을 통해 들었을 때와 달리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자 절로 느껴지는 위압감에 오진호가 겁에 질린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강현은 사진으로만 보았던 오진호를 실제로 마주하고는 제 판단이 맞았음을 더욱 실감했다. 그는 며칠 밤을 지새운 사람처럼 거뭇해진 낯빛 하며, 피부는 푸석푸석했고 눈이 퀭했다. 천성이 소심해서 죄를 짓고는 살지 못하는 타입이었다. 그렇기에 강현은 일부러 더 차갑게 오진호를 몰아붙였다.

16551855237884.jpg“내가 오진호 씨를 도와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까? 심지어 우리 측에 유리한 증거를 훼손한 유력한 용의자일지도 모르는데, 뭣 때문에?”

16551855237888.jpg“가시죠. 류 변호사님. 시간이 많이 지체됐습니다. 증인 출석 신청보다는 오진호 씨에 대한 추가 고소장을 작성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옆에 서 있던 김 변호사가 오진호로부터 강현을 보호하듯 막아서며 분위기를 굳혔다. 오늘 만난 이래로 그가 가장 쓸모 있는 순간이었다.

16551855237888.jpg“도와, 주세요! 벼, 변호사라면서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눈동자를 떨던 오진호가 뒤돌아서는 그들을 향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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