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아니 땐 굴뚝2021.10.05.
때마침 바뀐 신호에 액셀을 밟는 발에 힘을 실었다. 마치 그 아래에 채성민이라도 있는 듯. 류강현이 차를 몰고 향한 곳은 A 기업이 인수 합병하는 와중 일어난, 인명 사고의 책임자가 숨어있는 낡은 주공아파트였다.
*** 자리에 앉은 세나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선물은 선물이었다. 그게 제게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꽃이더라도. 성의에 대한 감사 인사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단 채성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나가 먼저 전화를 주다니, 이거 생각보다 기분 좋은데?
“선배. 꽃 잘 받았어요. 이런 거 안 챙겨 주셔도 괜찮은데…….”
차마, 나 알레르기 있어서, 눈물 콧물 다 짤 뻔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예의니까.
-내가 주고 싶어서 보낸 거니까, 부담 갖지 마. 만약 내가 유학만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친해졌을 텐데, 이제라도 잘해 보려고.
전화기 너머의 그는 잘게 웃었고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옛날부터 학생들 사이에서도 익히 소문이 나 있었듯, 상냥하고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한 번씩 툭툭 던지는 말에는 거창한 의미를 두기가 모호한 구석이 많았다. 그래서 승진 축하선물로 치기엔 매우 과했던 꽃바구니 역시 세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언제 시간 괜찮으세요? 제가 저녁 살게요.”
-그럼 오늘 저녁도 괜찮아?
“오늘…….”
세나가 곁눈질로 책상 위에 놓인 스케줄러를 확인했다. 사무실을 옮긴 오늘 하루의 일정은 텅 비어있었다. 짧게나마 상담이 있었지만, 협의 이혼하는 의뢰인의 마지막 의사를 확인하는 일이라 크게 신경을 쓸 일이 아니었다.
“오늘 괜찮아요. 제가 선배네 회사로 갈까요?”
-음. 그러면 나야 좋지. 기다리고 있을게. 전화해.
“네. 그럼 이따 뵐게요.”
감사 인사는 빨리할수록 좋으니까. 스케줄러에 채성민과의 저녁 약속을 적어넣고, 노트북을 열었다. 아치형 창문 앞에 어떤 소파를 두는 것이 좋을지 인터넷으로 뒤적이다 몇 가지를 골라 저장해두고 가구거리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때마침 한여진이 노크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세나의 새로운 집무실을 둘러보는 한여진의 표정엔 부러움과 질투심이 엿보였다. 세나는 한여진의 욕망을 모른 척,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밥은 먹었어?”
“응. 방 좋네.”
“고마워. 너도 빨리 2층으로 와야지.”
“그러게. 가사전담팀 잘 되면 좋겠다.”
“잘 될 거야. 네 실력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아는데. 재산 분할 관련해서 너 따라 올 사람이 있어?”
세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듣기 좋은 말을 하자, 질투심에 까칠하게 날을 세우던 한여진이 한층 누그러졌다. 방을 둘러보던 그녀가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를 세나의 책상 앞으로 끌어와 마주 보고 앉았다. 중요한 할 말이 있는지 고개를 쭉 빼고 뒤쪽을 의식하는 게 꼭 적의 동태를 살피는 미어캣처럼 보였다. 그녀가 이런 행동을 취할 때 이어질 행동은 십중팔구 누군가의 뒷담화였다.
“오다 보니까, 류 변호사님 사무실 비어있던데, 외근 나가셨나?”
“아까 미팅 간다던데?”
“아직도 법률비서 안 뽑은 거야?”
“원하는 사람이 있다던데……. 곧 누가 오시겠지. 근데 갑자기 류 변호사님은 왜?”
“아니. 내가 있잖아,”
한여진은 입을 열기 전 다시 한번 뒤쪽을 힐끔였다. 문이 꼭 닫혀있는지 확인도 할 겸. 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꽉 닫혀있었고, 복도 쪽으로 난 창은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가 있는 상태였다.
“너 류 변호사님 왜 옷 벗었는지 알아?”
그녀가 세나와 둘밖에 없는 방 안에서도 목소리를 한껏 낮춰 입을 열었다. 세나는 그저 눈썹을 한번 휘었다. 왜 갑자기 저런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 한여진이 류강현에 대해 궁금해하리라 생각지도 못했다.
“여자 때문이래.”
“뭐??”
류강현이 여자 때문에 검사 옷을 벗었다니. 이건 뭐 지나가던 개가 콧방귀도 안 뀔 소리를, 이렇게 진지하게 할 일인가? 어이도 없고, 기도 안 차서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못하자 여진은 신이 나서 뒷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우리 신랑 제일 친한 친구가 서울지검에 있잖아. 무슨 일이냐 캐물었더니, 여자 때문이래. 그것도 자기랑 같은 방에 근무하던 후배 검사.”
“같은 방에 근무하던 여검사랑 스캔들? 말도 안 돼. 한 변, 아무리 모른다고 하지만, 선배가 그럴 리가 없잖아?”
“왜 말이 안 돼? 사람 일이란 잘 모르는 거지. 생각해 봐. 특수부에서 이례적인 승진을 앞둔 남자가 돌연 옷을 벗긴 왜 벗어? 뭔가 찔리는 게 있으니까 벗은 거지.”
“…….”
“딱 이야기를 듣는데, 치정이겠거니 싶더라. 암튼, 그 여자 후배 때문에 몇 기수나 높은 선배 검사 멱살까지 잡고 난리도 아니었대.”
선배건 자시건 마음에 안 들었으면 말로 반쯤 죽여놨으면 죽여놨지, 멱살이라. 도대체 무슨 일이었기에 그토록 그가 화를 냈을까. 본래 감정 기복이 심하지도 않고, 그걸 표출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소문이 사실이고 류강현이 그토록 분노했다면, 상대방이 아주 큰 실수를 했을 게 분명했다.
“아무리 여자 때문이라지만, 하늘 같은 선배의 멱살을 잡다니. 류 변호사님 생각보다 사리분별력이 부족한가 봐. 보기에는 냉철하고 분석적인 것처럼 굴어도 결국엔 사고나 치고 그러는 거지. 옷을 벗은 게 아니라 잘린 걸지도 몰라.”
“멱살 잡힌 검사가 잘못을 했을지도 모르잖아. 자세한 내막도 모르면서 한쪽 말만 듣고 그러는 건-.”
“네가 뭘 알아? 너 류 변호사님이랑 별로 안 친하다며? 그리고 사람은 겉으로만 봐서는 모르는 거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흘리게 생겨도 여자가 끼면 다르다니까.”
그거야 그땐 진짜 그 류강현에 대해 잘 몰랐으니까. 오해가 산처럼 쌓여서 눈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그랬던 거였다.
“그런 얘기 듣고 나니 난 좀 별로더라고. 특히 검찰이란 상명하복의 집결체잖아? 멀쩡하게 생겨서 여자 때문에 선배 멱살이나 잡는 사람이었다니, 실망했달까? 자기감정 관리 하나 제대로 못 하는데, 일이라고 제대로 할까 싶어서.”
그때 검찰청을 발칵 뒤엎고 나갔다는 동부지검 박 검사의 말이 기억났다. 그런데 그게 여자 때문이라고? 그런 것치고 박 검사가 말한 류강현은 괜찮은 검사였다. 오히려 그 사건으로 검사를 그만둬서 아깝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한 변, 그 얘기 확실한 거야?”
“확실하다니까. 더 캐보려고 했는데, 지검 내에서 함구령까지 떨어졌다잖아? 자기네들도 쪽팔리니까 숨기려고 하는 거였겠지.”
“내가 알기로도 대외비라 공문까지 내려온 사건인데. 누가 어떻게 뭘 알고 그런 말을 하냐는 말이야.”
“뭐야, 기 변. 안 그런 척하면서 류 변호사 뒤 좀 캤나 보다?”
한여진은 너도 별거 없네, 라는 말을 게슴츠레하게 뜬 눈에 담았다. 이제 와서 아닌 척하기도 뭣해서 세나는 강현을 옹호했다.
“우연히 알게 된 거야. 암튼, 내가 아는 한, 강현 선배는 그럴 사람 아니야. 특히 여자랑 치정문제에 얽힐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 한들 그런 일로 자기가 하는 일을 때려치울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
“다른 이유 뭐? 기 변. 네가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나이도 봐. 서른다섯이면 혼기가 꽉 찼는데 아직 혼자인 것도 이상하고. 우리 팀 이효원 변호사가 여자친구 있냐고 물었더니, ‘있다, 없다.’ 대답도 제대로 안 해주고 그게 일하는데 필요한 질문이냐고 면박 줬나 보더라.”
일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뚝뚝하긴 해도 잘 가르쳐주는 강현은 사생활이나, 쓸데없는 질문에는 가차 없었다. 그래서 더 좋다는 사람이 있고, 인간미 없다며 실망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러나 결국 곤란한 일이 생기면 그를 찾을 것이다. 아마 류강현 본인은 사내에 떠도는 자신에 대한 말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세나가 입을 다물고 있자, 한여진은 제가 알고 있는 한 톨의 사실에 사심을 한껏 덧발랐다.
“얼굴도 멀쩡해, 몸도 좋아, 일도 잘하는 남자가 그 나이가 되도록 혼자인 이유가 여자 문제 아니면 또 뭐겠어?”
소문이란 게 그랬다. 소문 안에 담긴 진실은 고작 한 톨인데, 사람들의 입을 통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이 붙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덩치를 부풀린 한 톨은 거대해지고, 사람들은 나중엔 뭐가 진실인지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엔 그저 자극적인 가십만이 남을 것이고. 한 가마니 안에 담긴 낱알 중 진실은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한 변. 이 이야기 누구, 누구한테 했어?”
“얘 좀 봐라. 내가 아무 데나 입 털고 다니는 줄 아나 봐?”
맞잖아, 너. 우리 회사 확성기. 그래서 적으로 두면 꽤 피곤한 스타일이었다. 세나는 한여진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적당히 맞장구를 쳐줄까 했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곳에 가서 입방정을 떨지 않도록 주의는 주는 것이 좋을 듯 보였다.
“서로 조심하면 좋잖아? 이제 우리 식구니까 우리가 챙겨야지.”
한여진이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에둘러 표현했다. 아마 류강현이라면 이런 소문들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일을 할 때’ 거슬린다면 어떤 행동을 취할지, 저 혼자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어쩐지 목덜미가 싸늘해져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암튼 이건 우리 둘만 아는 걸로 하자.”
세나가 한여진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러니 알아서 조심해. 너 잘못 걸리면 류강현한테 뒤지는 수가 있어. 진실은 웃음 뒤에 감췄다. 실컷 입방정을 떨다 더는 할 말이 없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한여진이 대뜸 물었다.
“우리 회식 언제 해?”
“무슨 회식?”
“얘 좀 봐. 팀도 만들었겠다, 으쌰으쌰 하려면 회식부터 해야 하는 거 아냐? 아니면 날 잡아서 워크숍이라도 가던가. 팀워크가 그냥 얼굴만 보고 있으면 생기겠어? 서로 술도 마시고, 취한 것도 보고, 사담도 좀 나누고 그래야지?”
한여진은 일반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팀워크를 다지기 위해 종종 워크숍을 가는 것을 예로 들었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 개인이 아니라 팀인데 한 번쯤 가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었다. 생각해보겠다는 말에 한여진은 기대감을 안고 방문을 나섰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작게 탄성을 뱉었다.
“류 변호사님도 같이 가자고 하자. 어차피 우리 팀 자문이잖아? 지금보다 더 친해져야 할 거 아냐. 그리고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보면 알겠지.”
한여진이 나가고 나서 세나는 제 관자놀이를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하늘 같은 선배 검사의 멱살을 잡은 류강현이라. 가능한 소문이긴 했다. 그런데 여자 때문이라. 류강현의 연애 스타일이 어떤지, 그동안 어떤 여자를 만나왔는지, 전혀 가늠이 가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의 취향을 쥐콩만큼 파악하게 된 일련의 문답지로 보건대……. 글쎄, 과연? 세나는 핸드폰의 메신저 앱을 열어 강현과 주고받았던 문자를 주르륵 읽어보았다. 다시 봐도 기가 찬 답변이었다. 좋아하는 장소가 집인 건 차치하고, 좋아하는 책이 ‘형법 지식정보법전’이라니.
“풋! 미치겠다. 형법 지식정보법전이 웬 말이야? 대단한 남자야 정말.”
문자를 보며 킥킥 웃던 세나는, 얼굴도 모르는 강현의 검사실 후배 여검사를 떠올리곤 괜히 기분이 침울해졌다. 하루에 몇 시간씩 한 방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건을 브리핑하며 법률 조언을 나누는 사이라면, 상대 역시 형법 지식정보 법전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릴 책을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