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천천히, 한 걸음2021.10.02.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꽃바구니는 승진 축하 선물이라 치기엔 지나치게 화려했다. 프러포즈용 꽃바구니라면 모를까. 하얀 수국꽃이 수북한 바구니엔 분홍색 장미와 아직 제대로 피지 않은 백합, 리시안서스까지 꽂혀 있었다. 한데 어우러진 꽃향기가 코가 아플 정도로 진동했다. 세나는 이 화려한 꽃바구니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난감했다. 벌써 코가 간질간질거렸다. 훌쩍거리는 코를 휴지로 닦아내다, 시원하게 재채기를 했다. 몇 번이고 재채기하며 꽃을 힐끔거리는데, 꽃 사이 끼어있는 조그만 카드가 눈에 띄었다. 큼지막한 하트가 그려진 카드가 다소 부담스러워 보였다. 아마 꽃집 주인이 골라서 대필했을 테지만. [우리 세나의 앞길이 꽃처럼 활짝 피길 :)] 꽃바구니를 보내주겠다던 채성민이 진짜로 보낼 줄은 몰랐다. 알레르기가 있다고 말할걸. 돈 아깝게.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세나는 꽃바구니를 향해 짧게 묵념하고 일단 문밖으로 옮겼다. 그냥 버리기는 애매하고 소분해서 회의실 같은 곳에 놔둬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이제 막 출근하는 강현을 복도에서 마주쳤다.
‘그래서 네가 더 예뻐 보인다고 한다면, 내가 이상한 건가?’
그를 보자 잠시 잊고 있었던 목소리가 머릿속에 리플레이됐다. 그날의 상황이 떠오르자, 등줄기가 딱딱하게 굳고, 가슴이 콩닥콩닥거렸다.
‘진정해! 미쳤어? 뭘 혼자 콩닥거리고 난리야. 정신 차려. 의연하게 굴란 말이야! 기세나!’
세나가 미처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사이 제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강현이 다짜고짜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그 요란한 꽃은 뭐야?”
예상과는 다른 그의 첫 마디였다. 멍하니 있던 세나가 재빨리 ‘아. 그게 성민 선배가 보냈어요.’라고 답하자 강현은 기가 찬 얼굴로 ‘미친 새끼.’라 작게 중얼거렸다.
“선배.”
세나가 강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는 평소와도 다름없이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 그게.”
세나가 뭔가 말을 꺼내려다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저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아니에요. 그나저나 선배 혹시 꽃 좋아하면 이거 가지고 가실래요? 저는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서.”
“필요 없어.”
“아……. 그럼 이거 어떡하지……? 아……!”
때마침 세나의 머릿속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기 대표님한테 가져다드려야겠다. 선물로.”
세나는 짓궂은 표정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왜 웃냐고 묻는 강현에게 ‘우리 아빠도 꽃가루 알레르기 있거든요.’하고 신이 나서 대꾸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인 이유가 별거 있을까. 당하면 당한 만큼 갚아 줘야 직성이 풀리는 건 유전이었다. 그녀의 어이없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강현이 들고 있던 봉투에서 테이크아웃 잔을 건넸다.
“뭐예요? 건강 주스?”
커피인 줄 알고 받아들었는데, 분홍색의 슬러시가 담겨있었다.
“사무실 옮기느라 아침 안 먹고 나왔을 거 아냐?”
“어머나, 아침부터 후배를 위해주는 센스. 선배님, 존경합니다.”
“영혼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후배님의 멘트네.”
“고객센터 상담사님들의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멘트에 영혼이 1g이라도 있는 줄 아세요?”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라도 않지.”
세나가 배시시 웃으며 스트로우를 입에 물고 쭉 빨아당겼다. 시원하고 달콤한 과즙이 입안에 가득 찼다. 익숙한 맛에 세나가 눈을 홉떴다.
“수박 주스예요??”
아직 수박이 나올 계절이 아닌데도 달콤하고 맛있어서 더 놀랐다. 세나가 재차 쪽쪽 빨아 마시며 맛을 음미했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부산을 떠느라 시원한 음료가 생각났는데, 달달한 수박 주스 맛에 절로 기운이 솟았다.
“와, 되게 맛있다. 이 계절에 수박 주스 파는 데 잘 없는데.”
몇 모금 안 마신 것 같은데 벌써 바닥을 드러낸 주스가 아쉬워 빨대로 휘휘 저었다.
“다음에 또 사다 주면 안 돼요? 아님, 이 집 어딘지 알려줘요. 내가 가서 사 먹게.”
“이따 같이 점심이나 하지.”
“점심?”
“몇 시가 괜찮아? 오늘 가사전담팀 오전 미팅 있나?”
“없어요. 근데 뭐 먹을 거예요?”
“육회비빔밥.”
“오. 탁월한 메뉴 선택. 1시 괜찮아요? 12시에는 식당이 너무 붐비니까.”
“시간 맞춰 내 방으로 와.”
세나는 강현이 집무실로 들어가는 것까지 본 뒤에야 꽃바구니를 들고 대표실을 찾았다. 아직 출근하지 않은 대표실 방문을 열고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바구니를 내려놓고 돌아왔다. 세나는 제 방으로 들어가기 전, 다시 한번 강현의 집무실을 힐끔댔다.
“......”
그는 자신과 달리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세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세차게 털었다. 만약 그의 말을 고백이라 착각했다면.
지난밤 강현의 품에 안겼던 일이 떠오르자 세나의 얼굴로 또다시 열이 몰렸다. 혹여나 강현이 문을 열고 나올세라 얼른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나 혼자 쪽팔릴 뻔했네.”
그럼 그렇지. 이성 간에 호감을 표한 것이라고 치기엔 표현 자체가 두루뭉술했고, 상황적으로 보아도 전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거였다면, 연회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뭐라도 대화가 오갔어야 했다. 예를 들어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는 앞으로 어떻게 지낼 것인지 기타 등등. 그러나 강현은 그런 낌새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병이다. 기세나, 자의식과잉이야. 그냥 위로해주려고 한 말에 괜히 신경 썼네.”
책상으로 걸어가는 길, 세나는 아직 어디에 비치할지 결정하지 못한 전신거울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뭐래, 이 정도면 예쁘지. 취향 타령은. 나도 흥이네요.”
자의식과잉이건 뭐건 간에, 내가 예쁜 건 변하지 않지. *** 얼추 사무실을 다 정리한 세나가 손목시계를 확인하자, 벌써 한 시였다. 오늘 오전엔 별다른 일정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책상 위를 확인하고는 방을 나섰다. 강현의 집무실과는 대각선으로 10m 남짓. 점심 메뉴가 육회비빔밥이라는 소리에 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회사 근처 육회비빔밥 집이 어디 있나, 떠올리며 그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강현은 회의용 테이블에 앉은 채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그가 세나를 보고 조용히 손가락으로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켰다. 회의용 테이블엔 둥근 포장 용기가 각각 놓여있었다. 세나는 그의 통화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 발걸음을 죽이고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그 사이 통화를 종료한 강현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끌러 내리며 미간을 좁혔다.
“나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미팅이 잡혔어. 밥 먹고 바로 나가봐야 해.”
“어, 그럼 그냥 혼자 먹으라고 하지. 배달시킨 거예요?”
“일단 먹어. 입맛에 맞을진 모르겠지만.”
용기 뚜껑을 열자 선홍빛의 육회가 소복이 쌓인 비빔밥이 들어있었다. 나름 비싼 곳에서 시켰는지 옆에 놓인 작은 용기엔 노른자가 흐트러짐 없이 담겨있었다. 빛깔도 곱고 냄새도 고소해서 입맛을 다시며 야무지게 비볐다. 쓱쓱 비벼놓고 보니 더욱 맛깔스러웠다. 세나는 입을 크게 벌려 한입에 쏙 집어넣으며 꼭꼭 씹었다.
“으음-.”
쫀득하고 고소한 맛에 입맛이 돌았다. 맛있을 걸 먹을 때 그녀의 표정이 무척이나 흐뭇해 보였다. 씰룩거리는 광대와 기분 좋게 솟은 입꼬리가 보기 좋았다.
“이 동네를 7년이나 넘게 다녔는데, 여기 이런 집이 있는 줄 왜 몰랐죠? 완전 맛있어요.”
“지검 있는 쪽에서 배달시켰어, 가끔 거기서 먹던 게 생각나서. 놋쇠 그릇에 나오는데 직접 가서 먹으면 더 맛있어.”
“선배도 육회비빔밥 좋아해요? 난 사실 돌솥보다는 놋쇠 그릇이 좋거든요. 돌솥으로 먹을 거면 소고기 비빔밥을 먹지. 안 그래요?”
“그래.”
사무실에서 육회비빔밥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다. 늘 사무실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는 일 인분만 시키기도 그래서, 되도록 간편하고 냄새가 안 나는 샌드위치로 대충 때웠는데. 앞으로 종종 이런 식으로 같이 밥을 먹으면 되겠구나. 밥도 먹고, 일도 하고.
“아, 맞다. 선배. 그 산불에 대해 주말 내도록 생각해봤거든요. 신주은 씨는 왜 굳이 산불이라는 말을 남겼는지.”
세나는 주말 내내 생각했던 산불의 의미에 대해 입을 열었다.
“선배 혹시 산불이 커져서 걷잡을 수 없을 때 맞불로 진화하는 거 알아요? 그걸 뭐라고 부르던데…….”
“통제 진화 말하는 거야?”
전문용어로 백 파이어(Back fire). 말 그대로 산불이 크게 났을 때 그 불이 더 확장되기 전, 연소될 만한 것을 먼저 태움으로써 산불이 넓은 지역으로 퍼지는 것을 막는 것을 말했다.
“신주은 씨가 저한테 한 말 중에 남편이 자기처럼 발악했으면 좋겠다고 했거든요. 그걸 맞불에 비유한다면 같이 싸우고 싶은 게 아닐까요. 막 치고, 박고?”
세나는 자기가 생각하는 게 맞는지 빨리 확인받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강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분풀이를 한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겠지.”
“만약 이게 그녀가 원하는 답이라면 제가 뭐라 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김 대표님한테 아내가 때리면 같이 때리세요,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럼 그냥 발악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해. 나머지는 두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
“선배. 생각 좀 하고 말하면 안 돼요? 저 엄청 진지한 거 안 보여요? 주말 내내 그 생각하느라 얼마나 머리가 아팠는데.”
“밥이나 마저 먹어.”
“선배!”
세나가 들고 있던 수저를 툭, 내려놓으며 강현을 노려보자, 덩달아 수저를 내려놓은 강현이 짧은 한숨을 뱉었다.
“기세나 눈치 없다는 말 자주 듣지?”
“뭐래? 눈치 백 단 기세나 몰라요? 나니까 산불이란 말을 듣고 맞불을 떠올렸죠! 안 그래요?”
“그래. 눈치 백 단 기세나 씨. 일단 식사나 마저 하세요.”
“밥이 맛있어서 봐주는 겁니다. 하여튼 말하는 거 밉상이야.”
꿍얼거리면서 다시 수저를 든 세나는 남은 밥을 먹느라 저를 보며 슬쩍 웃음을 흘리는 강현을 보지 못했다. *** 테헤란로를 달리던 강현의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핸들 위에 올려둔 손을 가볍게 쥐락펴락하며 좀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눈치가 없냐는 말에 발끈하던 기세나를.
“눈치 백 단은 무슨.”
류강현은 갑자기 잡힌 일정에 점심을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했었다. 세나와의 약속을 무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만들었고, 차를 몰고 지검이 있는 근처까지 나갔다 왔다. 교대역에서 맛집으로 유명한 식당은 점심시간이면 줄을 서는 사람들로 바빠, 배달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까지 있었나 싶었지만, 싹싹 비워진 용기를 보니 갔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작 그녀가 예뻐 보인다는 말로는 이 감정을 다 설명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제 겨우 제게 마음을 여는 세나에게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강요할 마음도 없었다. 그저 천천히.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만큼. 저 역시 이 감정을 명확한 이름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 그녀가 받은 꽃바구니가 떠오르자,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 채성민. 이 새끼가 기어이 수작을 부리려는가 본데. 제 경고를 너무 쉽게 흘려버린 채성민에게 언짢은 기분마저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에만은 100% 확신이 있었다. 채성민은 기세나 옆에 불필요한 존재라는 것. 하등 쓸모없는 무가치.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남자 보는 눈은 어디 쌍팔년도에 머물렀는지, 아니면 그 좋아하는 육회비빔밥에 비벼 먹었는지. 암튼 눈곱만큼도 없는 기세나를 위해 그놈 하나는 치워버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