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네 어디가 예쁜지2021.09.28.
“뭔데요? 뭐래요?”
의미심장하다는 말에 혹시나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말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여기까지 온 게 시간 낭비가 아니길.
“지금 자기는 멈출 수 없는 산불이래. 모조리 다 태우지 않고서는 꺼트릴 수 없는.”
산불. 그녀가 말한 산불이 어떤 의미인지 선뜻 와닿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끝을 보겠다는 말이겠죠?”
강현은 저를 애처롭게 올려다보는 세나를 바라보다 손끝으로 제 이마를 살짝 긁적였다. 그러고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그녀와 똑같이 난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의 어깨가 맞닿자 듬직한 기운이 느껴졌다. 세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다시 내쉬었다.
“변호사로서 진짜 실격인가 봐요. 절 보고 직업이 뭐냐고 묻는데, 순간적으로 아무 말도 못 한 거 알아요? 남편 때문에 눈치챘다고 하는데. 아마 저도 뭔가 티 나게 행동했겠죠?”
자책이 역력히 묻어나는 말에도 강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게 쓸데없이 왜 자선 파티에 오겠다 했냐는 타박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시간 내서 여기까지 찾아와놓고 이게 뭐 하는 짓이람.”
민망해진 세나는 속의 말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미용실 가서 머리하면서 제가 김 대표님 와이프 만나면 어떤 말을 할지 다 계획도 세웠는데. 제대로 물어보기는커녕 오히려 말려들었다니까요?”
“…….”
“변호사 주제에 말빨도 안 돼, 그렇다고 거짓말도 못 해. 하다못해 선배처럼 표정 관리라도 잘했더라면 더 나았을까요?”
속사포처럼 자기 비하를 하던 그녀가 ‘진짜 바보 같다. 나.’ 하며 자조가 가득한 말을 끝으로 무릎 사이로 얼굴을 감추었다. 강현은 그녀의 옆에 앉아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오늘 일은 시간 낭비였다. 굳이 김택주 대표가 원하는 대로 부인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줄 필요도 없었다.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인 부부가 서로에게 바라는 게 뭐가 있을까. 말은 부인의 마음을 알고 싶다 했지만, 막상 부인의 마음을 알게 된 김택주가 그녀의 뜻대로 움직여 줄까? 이혼을 원한다면 주식의 절반을 재산 분할 명목으로 내놓으라 할 때부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바이오제약의 사외이사인 신주은에게는, 함부로 내다 팔 수 없는 주식을 손에 쥐고 있어봤자 득 될 것이 없었다. 차라리 그 주식에 상응하는 현물자산을 받는 게 훨씬 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분명 원하는 게 있는데……. 지척에 둔 답은 안개에 가린 듯 흐릿한 실루엣만 보였다. 강현이 제 턱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다, 여전히 전의를 상실한 세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기세나. 하고많은 변호사 중에 왜 이혼 전문변호사가 됐어?”
“그건 왜요?”
“갑자기 궁금해서.”
“그러는 선배는 왜 검사 옷 벗었는데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돼?”
“선배를 아는 사람이 보면 절대 이해 못 할 대답인 거 알죠? 특수부에서 그렇게 오래 있다가 특검까지 갔던 사람이잖아요? 국회의원들 줄 세우고.”
“아무리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해 본다고 하더라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어. 가령 그 계획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 사람의 신뢰와 관련될 일일 때.”
무슨 일인지 더 묻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을 보았을 때 더는 물으면 안 될 것처럼 느껴졌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번에 자진해서 알려준다고 할 때 들어둘걸.
“바람이 차다. 안 들어갈 거야?”
“조금만 더 있다가요. 선배 먼저 들어가세요.”
자선 파티의 장소가 산자락에 있는 곳이다 보니 밤공기가 맑고 좋았다. 그러나 이슬기를 머금고 있어 체온이 금세 뚝뚝 떨어졌다. 세나가 걸친 얇은 재킷엔 어느새 한기가 가득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안으로 들어가긴 싫어 고집스레 앉아 있었다. 몸을 잔뜩 웅크리며 오돌오돌 몸을 떨고 있는데 묵직한 재킷이 세나의 어깨를 감쌌다. 강현이 입고 있던 재킷이었다. 전해지는 온기가 따스해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선배는 되게 차가운 사람인데, 체온은 또 따뜻하다니까. 쓰는 향수도. 그래서 착각했잖아요.”
“뭘 착각해?”
십여 년 전 술에 취했을 때 덮어준 점퍼가 따뜻해서 다른 사람의 것인 줄 알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세나는 두 팔로 드레스 자락과 함께 제 허벅다리를 꼭 끌어안았다. 밑단으로 빼꼼히 나온 구두를 바라보다 톡톡톡 소리 나게 앞코를 부딪쳤다.
“이혼변호사가 된 이유는 사실 별거 아닌데. 이렇게 많은 사람의 사연을 듣다 보면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상처받고, 각자의 이유로 이별을 하잖아요. 사연도 다르고 원하는 것도 다 달라요. 그 사람들 곁에서 그들의 이별을 도와주다 보면, 언젠가 나도 그 사람의 선택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게 제가 이혼변호사가 된 이유예요.”
“그 사람이 누군데?”
“우리 엄마요.”
그가 제 얘기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무거운 얘기에 인상을 쓰고 있을까, 아니면 평소랑 똑같이 무덤덤한 얼굴일까. 분위기에 휩쓸려 쓸데없는 속내를 털어놓긴 했지만, 류강현이라면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함부로 동정하지도 함부로 판단하지도 않을 거란, 그런 이상한 믿음이 가는 남자였다. 아니나 다를까, 류강현은 세나가 아버지인 기장수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들었음에도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저 조금 그윽해진 눈동자로 저를 가만히 들여다볼 뿐이었다.
“기세나.”
“네?”
“너 예뻐.”
“뭐예요, 뜬금없이. 그런 말은 아까 미용실 앞에서 했어야죠. 설마 지금 내가 불쌍해서 위로해주는 거예요?”
“그렇게 들렸나?”
“아오, 정말. 나도 알아요. 나 예쁜 거. 지나가는 개들도 다 알아.”
세나의 귀여운 허세에 강현이 못 이기겠다는 듯 픽 웃으며 커다란 손바닥을 그녀의 정수리에 툭, 얹었다. 그는 한 손에 잡히는 그녀의 머리통을 쓰다듬지 않고 말 그대로 그저 손만 툭, 올렸다 금방 거둬들였다.
“마음이 예쁘다고. 얼굴은 내 취향 아냐.”
“아 또 뭐래. 선배는 뭐 내 취향인 줄 알아요??”
“나도 어디 가서 못났다는 소리 안 들어봤어.”
“네네. 그러시겠죠. 천하의 류강현인데. 아, 진짜 확 꼬셔서 뻥 차 버릴까 보다. 나 같이 예쁜 여자 취향 아니라고 했다고.”
그녀가 입술을 비쭉거릴 때면, 달래주고 싶다가도 괜히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아 결국 후자를 선택해버리고 마는 강현이었다.
“하, 꼬실 자신은 있고?”
“왜요? 꼬시면 넘어오긴 하고요?”
“하는 거 봐서.”
그의 말투엔 자잘한 웃음기가 녹아 있었다.
“됐네요. 유치하게 뭐야 이게. 선배는 진짜 안 그러게 생겨서 가끔 나보다 더 유치하게 굴더라.”
세나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만하자며 손을 휘휘 저었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기 바쁜데, 꼬시니 마니 이딴 건 정말 개소리였다. 기장수가 아무리 류강현을 사윗감으로 데려오라고 파트너 변호사에, 지분양도 조건까지 내걸었어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답은 뻔했다. 이미 그에게 저는 여자로서의 매력은 없다는 걸.
‘애초에 쉽게 해낼 수 있는 거면, 그런 조건으로 계약서를 쓸 리가 없지. 기장수 대표가 어떤 사람인데.’
애지중지 아낀다는 딸내미 머리 꼭대기서 탭댄스를 추는 양반이었다.
‘여차하면 계약 연애라도 하자고 밀어붙이고 싶었지만, 꿈자리가 워낙 사나워 말도 꺼내지 못한 처지에 같잖은 수작이나 부리다니. 아서라 기세나. 그러다 뼈도 못 추린다.’
강현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녀를 기다려주다, 여기서 더 바람을 맞다간 내일 아침 그녀가 감기에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갤러리에선 한창 자선 경매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참여할 필요는 없었다.
“그만 가자. 집에.”
강현은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세나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잡으라는 듯 까딱이는 손짓에 세나는 못 이기는 척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세나가 반쯤 몸을 일으켰을 때, 강현이 그녀의 손을 제 쪽으로 휙, 잡아당겼다. 그렇지 않아도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느라 다리가 저렸는데, 세나는 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그대로 강현의 품속으로 고꾸라졌다. 뭐 하는 거냐고 소리쳐야 하는데, 손바닥 아래 꿈틀거리는 단단한 가슴팍이 고스란히 느껴져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네 어디가 예쁜지.”
세나가 품에 안긴 채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않자, 강현은 그녀의 허리에 제 팔을 둘러 안았다. 내내 저를 어지럽게 만들던 그녀의 향기가 품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건 나만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정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별거 없다. 그저 그 문제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답이 눈에 확, 들어 온다. 가령, 찌질한 모습이, 투덜거리는 모습이,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는 모습이, 풀이 잔뜩 죽어 축 늘어진 모습이, 오기로 똘똘 뭉쳐 투지를 불태우는 모습이,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모습이. 저에게만 보여주길 바라는 모습들이 늘어가고, 그 모습들이 예뻐 보인다면, 다른 모습 또한 예뻐 보이겠지. 강현이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대고는 옅은 숨소리와 함께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네가 더 예쁘다고 하면, 내가 이상한 건가?”
강현의 다 들리는 혼잣말에 얼어붙은 세나의 심장이 쿵, 커다란 울림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 월요일 아침. 2층의 새로운 사무실로 출근한 세나는 뿌듯한 눈으로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다른 파트너 변호사의 집무실에 비하면 크기는 좀 작긴 하지만, 그전에 사용하던 사무실보다 채광이 좋았고, 공간 활용도도 높았다. 아래층에서 가지고 올라온 상자를 바닥에 내려두고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배치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원래대로라면 창이 난 자리에 업무용 책상을 두고 햇살을 한껏 받으며 TV 속에서나 보던 경영인의 이미지를 답습하려고 했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세나는 아치형 창문이 있는 곳에 푹신푹신한 소파를 두어 의뢰인이 보다 편한 마음으로 상담을 할 수 있도록, 계획을 수정했다.
“기세나 씨?”
사무실을 정리하는 동안 열어놓은 문 앞엔 헬멧을 쓴 남자가 커다란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꽃 배달 왔습니다.”
세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배달원이 방 안으로 들어와 책상 위에 꽃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그가 수령 확인을 위해 자신의 단말기를 들이밀었다.
“누가 보낸 거예요?”
세나에게 건넸던 단말기를 받아든 배달원이 화면을 조작하더니 ‘채성민 님이 보내셨네요.’ 하고 대답했다. 그녀가 뭐라 반응을 보이기 전에 갈 길이 바쁜 배달원은 서둘러 방을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