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죽여야 사는 여자2021.09.25.
“아…….”
“이렇게 보여도 제가 사람을 좀 볼 줄 알아요. 류강현 변호사님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닌 것 같던데, 그런 분의 아내시라면 기세나 씨도 만만치 않을 사람 같네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미처 답을 준비 못 한 세나가 우물쭈물하자, 그녀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며 재차 물었다.
“정신과 의사?”
세나의 직업을 추리하는 신주은의 눈초리는 매섭기까지 했다.
“그게…….”
그녀의 눈초리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그렸다는 그림을 보고 나니 왜인지 모르게 어설픈 거짓말로 그녀를 기만하고 싶지 않아졌다.
“……변호사예요.”
세나의 대답에 신주은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제 남편이요. 거짓말을 못 해요. 기세나 씨가 저에게 안내를 부탁할 때, 남편이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이었거든요.”
“아.”
“일부러 저를 만나려고 자선 파티에 온 거예요?”
어차피 정체를 들켜버린 거 핑계를 댈 필요도 없었다. 기세나는 담백하게 인정했다.
“네. 신주은 씨를 만나러 왔어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제가 할 이야기가 없다고 한다면, 기세나 씨가 곤란한가요?”
“아뇨.”
곤란할 건 없다. 범죄자를 연행해야 하는 경찰도 아니었고, 그녀의 정신상태를 진단해야 하는 의사도 아니었다. 자신은 김택주의 변호사였지, 신주은의 변호사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거절하셔도 돼요.”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엔 세나 쪽에서 거리를 두었다. 신주은은 잠시간 세나를 바라보며 대치 상태로 서 있다가, ‘따라오세요.’ 하고 걸음을 옮겼다. 세나는 그녀를 따라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올라갔다. 홀과 갤러리가 있는 1층에 비해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신주은은 2층 구석에 있는 테라스로 세나를 데리고 갔다.
“마땅히 앉을 곳이 없는데 여기도 괜찮죠?”
테라스로 다가서자 아래층 야외정원이 보였다. 세나는 눈동자를 빠르게 굴려 강현을 찾았다. 그는 구석진 자리에서 김택주와 함께 그의 회사 사람으로 보이는 자들과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류강현 변호사님이랑 부부는 맞아요?”
“아뇨. 같은 로펌 동료예요.”
“그건 의외네요.”
“왜요?”
“두 사람 제법 잘 어울리거든요.”
“네? 어디가…….”
“풍기는 이미지가요.”
“그럴 리가요. 저랑 완전 정반대예요. 취향도 성격도.”
“정반대의 사람끼리 만나면 더 잘 지낼 수도 있어요. 저랑 남편은 성격적으로 너무 닮아 있어서 서로를 힘들게 하니까요.”
테라스로 불어 들어온 바람이 그녀의 어깨에 걸린 숄을 강하게 스쳤다. 벗겨질 듯 나부끼는 숄을 한 손으로 꼭 붙들어 여미는 신주은의 손은 작은 사과 정도의 크기였다. 그녀는 저 작은 손으로 남편을, 온몸에 시퍼런 멍이 들도록 때렸다. 증오의 대상이었던 시어머니가 죽고 속이 후련해했던 남편과 달리, 그녀는 왜 남편을 때리기 시작했을까?
“대충 이야기는 들으셨죠? 저랑 남편 사이의 일.”
세나가 그렇다고 답하자, 신주은은 오히려 덤덤해졌다. 그녀의 얼굴에선 조금의 부끄러움도,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가 궁금하세요?”
“신주은 씨 마음이요.”
“이혼을 왜 안 하는지? 아니면 남편을 왜 때렸는지? 그것도 아니면 왜 이러고 사는지?”
“당신이 진짜 원하는 거요.”
초연하게 가라앉았던 신주은의 눈동자에 살기 어린 분노가 떠올랐다.
“기세나 씨.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해 본 적 있으세요?”
숄을 말아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고,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눈을 마주치면 목을 조르고 싶고, 손에 칼을 들고 있으면 찌르고 싶고, 함께 차를 타고 있으면 어딘가에 처박아버리고 싶고, 벼락이 친다면 그 사람 머리에 떨어졌으면 좋겠고, 높은 곳이 있다면 확 밀쳐버리고 싶은 그런 감정을 매일매일 느껴본 적 있으세요?”
무시무시한 말들을 조곤조곤 내뱉으면서도 그녀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제겐 그런 사람이 시어머니였어요.”
김택주 대표가 언질을 줬듯, 이들 부부에게 가장 큰 문제는 시어머니였다.
“집안끼리의 만남이었는데, 한쪽 집안이 일방적으로 폭삭 망해버렸으니 시어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죠.”
그래서 사기꾼 집안이라 부모를 욕하고 주은에게 이혼하라 악다구니를 썼을 때,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렸다.
“시어머니의 행동이 잘못이란 걸 알았지만, 원인을 제공한 건 제 쪽이라는 생각에 몸을 바짝 엎드려 싹싹 빌기도 했어요. 그러나 돌아오는 건 멸시와 모멸뿐이었죠.”
더는 버티기 힘들어 남편에게 시어머니의 말대로 이혼하자 했을 땐, 그녀의 마음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왜 그때 이혼하지 않았냐 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이미 심적으로 너덜너덜해진 저에게 남편은 울며불며 매달렸어요. 두 번 다시 어머니가 찾아오는 일 없게 하겠다며.”
그날을 회상하는 신주은의 낯빛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이라 생각하는 듯 후회와 자조가 가득 섞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 친정 형편도 어려운데, 자신이 어떻게든 노후를 보장해 줄 테니 이혼만은 절대 안 된다고 빌고 또 빌었죠. 그런 남편도 가엾고, 저도 가여웠으니까.”
차라리 아이를 가지면 어떻겠냐고. 그럼 어머니도 더는 어떻게 못 하실 거라 장담했다. 그렇게 남편을 믿고 마음을 고쳐잡았다. 맞선으로 시작한 결혼생활이지만, 시어머니를 떼어놓고 보면 남편은 늘 언제나 저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시어머니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제 머리채를 잡았을 때, 제가 첫아이를 임신 중이었다던 말도 하던가요?”
기어이 하라는 이혼은 안 하고 애를 핑계 삼아 제 아들 발목을 잡으려 한다고 패악을 부렸다.
“그 후로 제게 손찌검은 한 적이 없지만, 남편 몰래 정신적으로 몹시도 괴롭히셨죠. 아직도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경기할 정도로요.”
“…….”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남편은 속이 후련했을지 몰라도, 저는 오히려 절망했어요.”
신경과에서 처방받은 약이 없이는 잠들 수 없는 밤이 많아졌다. 그러다가 원망의 대상이 뚜렷한데 어째서 자신은 이렇게 아파야 하는지 되레 참을 수가 없어졌다고.
“내게 지옥을 안겨준 여자에게 편안한 죽음이라니, 가당치도 않았어요. 할 수만 있다면 그곳이 지옥이더라도 쫓아가 복수를 해야 이 원망이 풀릴 것 같았죠.”
그래서 약을 먹었다. 그 여자를 따라 죽어버리려고. 그런데 죽지 못했다.
“남편이 그 얘기는 안 하던가요?”
세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마도 김택주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게 확실했다. 아마 알았다면 가장 먼저 알려야 했던 사실이니까.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세나는 발밑이 푹푹 꺼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진창에 숨어있는 뭔가가 물귀신처럼 저를 끌어당겨, 나중에는 온몸을 뒤덮을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아마 몰랐겠죠. 그때 한창 바쁠 때였으니까. 나는 아직도 지옥인데, 그 사람은 다 끝난 것처럼 굴더라고요. 그래서 남편을 때렸어요. 원망의 대상이 애지중지하던 남자니까. 그 여자에게 복수할 방법은 그거뿐이니까.”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의 그림자가, 여전히 그녀의 등 뒤에 서서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눈가가 붉어지도록 분에 겨워하면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태연자약해 더욱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마음은 좀 풀리셨나요?”
세나가 힘들게 입을 열어 내뱉은 말은 고작 이 정도였다. 철의 여인처럼 단단했던 신주은의 얼굴에 서서히 금이 갔다.
“그럴 줄 알았는데…….”
갑자기 신주은은 테라스 난간에 몸을 앞으로 기대더니 아슬아슬할 정도로 몸을 내밀었다. 산바람이 불어와 그녀를 할퀴자, 그녀의 상체가 난간 밖으로 휘청거렸다. 아찔한 상황에 놀란 세나는 혹여나 그녀가 떨어질까, 팔뚝을 낚아채 난간으로부터 멀찍이 떨어트려 놓았다.
“하아…….”
그녀가 내뱉은 무거운 한숨이 바람결에 실려 멀리 날아갔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고개를 든 신주은은 세나의 마음이 다 아릴 정도로 시린 허탈함을 머금고 있었다.
“또 다른 지옥이던데요?”
“……괜찮으세요?”
지금 이대로여도 괜찮은 건지, 아니면 그녀의 상태가 괜찮은 건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처럼 그녀의 감정 상태는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변호사님이 보시기에 이혼 사유가 충분하다, 생각하시죠? 남편을 때리는 아내라니. 어디 가서 말하기도 창피한 사연이네요.”
그녀는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는 세나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표정을 지웠다.
“제 마음이 뭔지 궁금하다고 하셨죠?”
“…….”
“나는 그가 더 추락했으면 좋겠어요. 지금의 나처럼.”
밑바닥까지 추락해 추악한 자신이 어떤 지옥에서 하루하루를 견뎠는지, 남편이 알아주길 바랐다.
“그런데 그는 맞고만 있어요. 미안하다면서. 그런 주제에. 감히 이혼이라는 말을 입에 담네요.”
고부갈등 사이에서도 남편은 미안하다고만 했다. 같이 싸워주지도 대신 맞서주지도 않았다. 뒤에서 저를 다독여줄지언정 앞에서는 나약한 방패조차 되지 못했다. 그런 건 아무짝에 쓸모없는 위선이었다.
“이혼, 안 해요. 나.”
그렇게 치고, 박고, 할퀴어 상처로 뒤덮이고 서로가 똑같이 바닥을 치고 너덜너덜해지면, 그때 가서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버틴 내 삶이 아까워서. 그 사람이랑 이혼 안 할 거예요.”
누구의 삶이 더 비참했는지 가릴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이젠 똑같이 비참해졌으니, 위로를 전하며 서로를 부둥켜안을 것인지,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각자의 길을 갈 것인지. 신주은은 숄과 자신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야외정원을 확인했다. 정원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둘 홀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곧 행사를 진행할 시간이네요. 먼저 가볼게요.”
신주은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온화하고 기품 있는 안주인의 얼굴이 되어 홀연히 테라스를 떠났다. 세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어차피 자선 파티에 참석한 이유는 김택주의 아내와 친분을 쌓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친분은커녕 오히려 반감만 사버렸다.
“아……. 망했다.”
세나가 기운이 쭉 빠진 목소리로 난간을 짚으며 중얼거리는 그때, 테라스 안으로 강현이 성큼 걸어들어왔다.
“뭐가 망해?”
“행사는 어쩌고 왜 여기로 왔어요?”
“사람들이 자꾸 와이프 어디 갔냐고 묻길래 데리러 왔지.”
“아 그것도 망했어요. 이제 부부행세 집어치워요.”
“아깝네. 기껏 취향 파악까지 다 해놓고 못 써먹게 되었으니.”
“취향이라고 할 건 있었구요?”
“글쎄. 나름 신중하게 답한 건데.”
“어련하시겠어요. 류강현 변호사님이.”
세나는 난간에 등을 기대어 미끄러지더니 이내 바닥에 궁둥이를 붙이고 무릎을 끌어모았다. 모아진 무릎 위로 턱을 내리더니 푹 한숨을 쉬었다.
“대화 잘 나누는 것 같더니 왜 죽상이야?”
“봤어요?”
“정원에서. 잘 보이더군.”
“봤으면 알겠네요. 이 작전은 실패예요.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고, 이혼은 절대 안 하겠대요.”
“그런 것치고는 전해달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던데?”
“마주쳤어요?”
“어, 하지 못한 말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