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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신혼부부 컨셉 (24/120)

24화. 신혼부부 컨셉2021.09.21.

16551854160193.jpg“오, 새 차 냄새. 오늘 받은 거예요? 운전해보니까 어때요? 좋아요?”

16551854160198.jpg“…….”

16551854160193.jpg“전기차 한 번도 안 타봤는데, 승차감은 어때요? 조용하다고 하던데. 자율주행도 된다죠?”

16551854160198.jpg“기세나.”

16551854160193.jpg“나도 파트너 변호사 되면 차 사주나? 지금 제 차는 스포츠카라 속도감은 좋은데, 승차감이 별로거든요.”

16551854160198.jpg“너…… 오늘.”

16551854160193.jpg“네??”

투덜거렸던 게 언제인 양 차에 대해 재잘거리던 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가죽 냄새가 배어 있던 공간에 그녀의 향기가 은은하게 번져가고 있었다. 강현은 입술을 머뭇대다 정면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16551854160198.jpg“벨트 매.”

그가 아랫입술을 치아로 짧게 씹었다가 뱉으며 기어를 바꿨다.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액셀을 부드럽게 밟았다. 강현이 차량 흐름에 집중하는 동안 심심해진 세나가 오디오를 조작했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너의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 하필이면 디제이 선곡이 자신의 상황과 딱 들어맞았다. 흔들리는 것이 꽃들인지, 아니면 제 마음인지. 밀폐된 공간 가득 퍼져있는 그녀의 향기로부터 의식을 돌려보려 했지만,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달콤함에 아찔하기까지 했다. 내비게이션에선 길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으나, 그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화려한 외모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작정하고 꾸민 그녀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지금 드는 이 생각이 맞는지 정답을 내리기 힘들었다. 이대로 자선 파티에 참석한다면, 사람들의 이목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향할 것이다. 남자 여자, 젊은 놈, 늙은 놈 할 거 없이 그녀의 외모만 보고 수군대거나 침을 흘릴 테지. 사실 그건 그녀가 가진 장점 중 제일 하찮은 것일 뿐인데. 왜 이렇게 답답한 기분이 드는지. 당장 핸들을 틀어 다른 곳으로 향하고 싶었다. 목적지는 없었다. 일단 아무도 없는 곳이면 좋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나가 차창 너머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는 동안 강현의 기분은 점차 가라앉았다. 모든 게 거슬렸다. 제 목을 옥죄는 넥타이도, 저 앞에 후미등을 붉히는 차들도. 핸들을 틀어쥔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고, 밑도 끝도 없이 처박히는 기분을 자각할 때쯤 강현은 운전석 쪽 창문을 살짝 내렸다. 좁은 틈새 사이로 찬 바람이 안으로 불어 들어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꽉 조여오던 숨통이 트이자, 들끓던 감정도 서서히 진정되어갔다. *** 자선 파티는 성북동 산 중턱에 있는 모 갤러리에서 열렸다.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댄 강현이 먼저 내렸다. 그는 세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차체를 돌아와, 보조석 문을 열어주었다. 초대 명단을 확인하기 위해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는 길, 세나가 한 손을 올려 강현의 팔뚝을 슬며시 잡았다. 제 팔뚝에 고이 올려진 손을 확인한 강현이 가만히 세나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자그마한 입 모양으로 ‘협조’ 하고 읊조렸다. 협조. 두 사람이 이 파티에 함께 온 이유. 굳어 있던 강현의 표정이 스르륵 풀렸다. 누군가 그녀를 보고 수군거리든, 아니면 침을 흘리든, 지금 이곳에서 강현과 세나는 부부였다. 그러니 누군가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거나 접근하긴 쉽지 않으리라. 돌연 이곳으로 오는 동안 치솟았던 불쾌 지수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강현은 반대편 손으로 세나의 손목을 잡아 밑으로 끌어내렸다. 세나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강현이 빙긋 웃으며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 깍지를 껴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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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854160193.jpg“뭐 하는 거예요?”

16551854160198.jpg“우리 부부잖아.”

16551854160193.jpg“그런데요? 세상 어느 부부가 이런 곳에서 손을 잡고 다녀요?”

16551854160198.jpg“신혼부부.”

16551854160193.jpg“네??”

16551854160198.jpg“신혼부부 컨셉으로 가지.”

세나가 황당해하며 입술을 뻐끔거리자, 강현은 어깨를 한번 으쓱여 보인 뒤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홀 안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세나는 강현에게 끌려가면서 그와 맞잡은 손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맞잡은 손바닥 사이로 번지는 체온이 따뜻해 간질간질하고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나 싶어, 고개를 들고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16551854160193.jpg‘왜 저래 진짜. 안 오겠다 그렇게 난리 칠 때는 언제고.’

갤러리를 통과해 야외정원으로 나오자, 김택주 부부가 초대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세나는 김택주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보고 조금 놀라고 말았다. 어깨에 숄을 두르고 있는 여인은 가냘픈 몸매에 연약한 인상으로, 동물로 비유하자면 작은 사슴을 닮아있었다. 체구와 외모로만 봤을 때, 오히려 벌레만 봐도 깜짝깜짝 놀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만약 그 사진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남편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했을 사람이라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16551854187619.jpg“류강현 변호사님, 와주셨군요!”

김택주가 둘을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강현은 세나의 손을 잡은 채로 김택주 부부에게 걸어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16551854160198.jpg“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은 제 안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김택주의 부인에게 기세나를 인사시켰다.

16551854160193.jpg“기세나라고 합니다.”

16551854187619.jpg“와주셔서 감사해요. 신주은이에요.”

신주은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두 손 중 하나를 앞으로 내밀었다. 세나는 재빨리 강현과 잡고 있던 손을 빼내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따뜻한 기운이 머무르던 손바닥에 차갑게 식은 손이 닿자, 세나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신주은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였지만, 그 눈빛에선 경계심이 엿보였다. 그녀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리려면 일단 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세나는 자선행사가 진행되기 전 단 삼십 분간만이라도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16551854160193.jpg“제가 이런 자리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괜찮으시다면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16551854187619.jpg“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안 그래도 류강현 변호사님과 나눌 얘기가 있었는데.”

세나의 의도를 간파한 김택주가 제 아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51854187619.jpg“그럼 제가 안내를 해드릴게요.”

16551854160193.jpg“네. 부탁드릴게요.”

신주은이 먼저 몸을 돌려 길을 트자, 세나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16551854160198.jpg“아, 잠시만.”

강현이 불쑥 손을 뻗어 세나를 잠시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그녀의 어깨에 걸쳐진 재킷을 벗겨 들었다. 세나가 고개를 갸웃대며 쳐다보고 있자, 강현은 그녀의 팔을 잡아 재킷 안으로 하나씩 끼워 넣고는 옷매무새를 만져주더니 단추까지 차곡차곡 채워주었다. 일부러 과감하게 빼입은 드레스가 재킷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보다 못한 세나가 강현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16551854160193.jpg“이 드레스에 이 모양새가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16551854160198.jpg“아직 날이 쌀쌀하니까, 감기 조심해야지.”

16551854160193.jpg“…….”

16551854160198.jpg“왜?”

16551854160193.jpg“선배 지금 좀 이상하다는 생각 안 해요?”

16551854160198.jpg“협조하라면서.”

16551854160193.jpg“와……. 컨셉 진짜 이상하게 잡네.”

16551854160198.jpg“아내의 건강을 걱정하는 다정다감한 남편.”

16551854160193.jpg“이 정도면 다정다감이 아니라 팔불출 아닌가?”

16551854160198.jpg“그것도 나쁘지 않지. 뭐든 열심히 하는 기세나에게 딱 어울리는 남편 아닌가?”

신혼부부에 이어서 팔불출 남편. 입만 열면 남편 타령하는 강현이 어이가 없어 눈을 흘겼다. 그러자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그녀의 어깨를 돌려세워 앞으로 살짝 밀어주었다. 세나는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지우고, 저를 기다리고 있는 신주은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

16551854187619.jpg“연애결혼이에요?”

16551854160193.jpg“네?”

홀 안으로 들어온 신주은이 샴페인 잔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16551854187619.jpg“사이가 참 좋아 보여서요.”

16551854160193.jpg“아……. 네.”

그렇게 보인다면 다행이었다. 사실 속으로는 저 인간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아주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았다. 프로페셔널한 부부행세를 기대한다더니, 왜 자기가 더 신나서 난리인지. 아무리 봐도 이것 또한 저를 놀리려고 하는 짓인 듯싶었다.

16551854187619.jpg“류강현 변호사님을 남편의 회사에서 잠시 뵀을 땐, 말수도 없으시고 차가운 사람이라 느꼈는데. 하긴, 남의 집 사정을 다른 사람들이 알 수는 없죠. 다들 겉만 볼 테니까.”

어쩐지 말에 숨은 가시가 콕콕 돋아나 있는 어투였다. 신주은의 얼굴엔 처음 인사를 나누었을 때 보였던 온화함 대신 조금 지치고 그늘진 음영이 내려앉아 있었다. 신주은은 지금 자신의 남편에게 무엇을 가장 바라고 있을까. 홀을 지나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자, 한쪽 벽면에 전시 중인 미술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16551854187619.jpg“저희가 따로 운영하는 재단이 있어요. 평소엔 형편이 어려운 신인 작가들을 후원하고 작품을 판매해 수익금 중 일부를 요보호아동센터에 기부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오늘은 기존 작품들과 더불어 재단이 가지고 있던 작품도 함께 전시 중이라.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경매에 참여하시면 돼요.”

신주은은 작품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하며 세나를 데리고 갤러리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0호짜리 그림 앞에 섰다.

16551854187619.jpg“이 작품 어때요?”

앞서 그림들을 하나씩 설명하던 때와 달리, 이번에는 세나의 의견을 묻는 신주은이었다. 그림 보는 눈이 없는 세나는 뚜렷한 규칙도, 선도 없이 마구잡이로 어두운 색들이 엉켜있는 그림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인물화도 아니고, 풍경화도 아니었다. 추상적인 그림에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그저 느낌뿐이었다. 전체적으로 검은색 유화가 거친 질감으로 발려있는 캔버스에 보라색과 검붉은색이 뒤엉켜 있는 그림.

16551854160193.jpg“제가 그림을 볼 줄 모르는데, 이 그림은 좀 무섭네요.”

16551854187619.jpg“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16551854160193.jpg“꼭 어둠 속에 뭔가 숨어있는 것 같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아요.”

세나의 감상평에 신주은이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신주은은 세나에게 살가운 듯 굴면서도 미묘하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왜 웃음을 터트린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신주은의 태도는 굉장히 무례했다. 김택주 대표의 부탁이고 뭐고 못된 망아지 같은 성질이 치고 올라오려는 그때, 그녀가 웃어서 미안하다며 무례에 대한 사과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이내 생각이 많아 보이는 눈으로 그림을 보았다. 한참 후에야 그녀의 입이 다시 열렸다.

16551854187619.jpg“누구도 집안에 저런 그림을 걸어놓고 싶지 않을 거예요.”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답을 전했다.

16551854187619.jpg“제가 그린 거예요.”

새카맣게 옻칠한 작품 바로 밑 작은 이름표엔 ‘신주은’이라는 이름이 표기돼 있었다.

16551854160193.jpg“아……. 죄송해요. 제가 그림 보는 눈이 없어서.”

16551854187619.jpg“아니요. 뭔가 튀어나올 것 같다니……. 재밌는 감상이네요.”

신주은은 자신의 그림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고개를 내리며 그림을 감상했다.

16551854187619.jpg“뭐를 표현하려고 했던 건지 잊어버렸어요. 이 그림을 그릴 때, 제 안에 있던 게 분노인지, 슬픔인지,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자아였는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는지.”

그림에 시선을 둔 채로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씁쓸하기까지 했다.

16551854187619.jpg“근데, 무섭다, 라는 말을 들으니 이제야 좀 알겠네요. 제 안에 불쑥불쑥 치솟는 감정이 있었는데, 공포였나 보네요.”

돌연 그녀가 몸을 홱 돌리더니, 세나를 빤히 보았다.

16551854187619.jpg“실례지만 어떤 일 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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