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기세나가 예뻐 보일 때2021.09.18.
그 기분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강현을 깨웠다.
“다른 변호사들한테는 막 일부러 시간 내서 자료도 조사해주고, 변론 방향도 제시해주면서 나한테는 왜 안 해줘요? 나 안 싫어한다면서요? 근데 왜, 난 안 해줘? 어차피 선배도 가면 좋은 파티잖아?”
“혹시 그거 주사야? 얼토당토않게 떼쓰는 거.”
“저, 주사 없거든요?”
주사가 맞는 것 같은데. 지난번도 그렇고. 맨정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들을 늘어놓는 것도 그렇고. 강현은 눈매를 가느다랗게 만들고, 억지를 부리는 세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녀는 강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란 듯이 제 말을 이어갔다.
“주사는 지금 여기 대자로 드러누워서 선배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게 주사고, 지금은 K 로펌 파트너 변호사 류강현한테, 사건 수임을 위한 정당한 요구를 하는 겁니다.”
“아……, 그럼 이것도 내 업무다?”
“업무의 연장선이 맞죠.”
“업무라고 여긴다면 프로답게, 깔끔하게 처리해야겠네?”
“프로답게, 깔끔하게.”
세나는 강현이 내뱉은 단어에 밑줄을 긋듯 검지로 허공을 두 번 쫙쫙 그으며 그의 말을 따라 했다. 강현의 마음속에 고요한 미소가 드리웠다. 저 호언장담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졌다.
“그럼 우리 기 변호사님의 프로급 실력 좀 볼까? 부부행세를 얼마나 잘하는지.”
내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던 강현이 돌연 샐쭉 입꼬리를 휘며,
“이혼이 뭔지 좀 알게. 파트너 말고 부부로.”
부부라는 단어를 콕 집어 말했다. 세나는 제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그의 결정에 안도하는 한편, 이상하리만치 목덜미가 오싹하게 시려와 본능적으로 푸르르 몸을 털었다.
*** 술 한잔 마시지 않은 강현은 세나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한참을 차 안에 앉아 있었다. 핸들에 올려둔 손이 생각의 흐름을 따라 느릿느릿 박자를 만들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울고불고 바짓가랑이에 매달려도 싫은 건 싫다 단칼에 거절했을 일이었다. 그런데 기세나가 그러는 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낯선 만족감을 불러일으켰다. 떼를 쓰고, 응석을 부리는 기세나라…. 적막이 가득한 차 안 홀로 남은 강현은 세나를 볼 때마다 드는 감정의 정체를 더욱 세밀하게 분류했다.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과 다른 세나의 솔직한 민낯.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과 저를 대할 때 불쑥불쑥 느껴지는 그 괴리감이 재밌었다. 그리고 기분이 좋았다. 다른 사람들이 도도한 그녀의 겉모습을 바라볼 때, 나만은 그녀의 숨겨진 모습을 알고 있다는 우월감일지도. 그와 동시에 충동이 든다.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다. 나 혼자만. 무심코 떠올린 어이없는 생각에 강현의 입에서 픽, 웃음이 샜다.
‘기세나한테, 내가 그럴 리가.’
강현은 골몰했던 생각들을 털어내려 차창을 내리고 담배를 꺼내 들었다. ***
[금요일 저녁에 시간 어때? :) ]
세나의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가 떴다. 문장 끝에 스마일 기호가 눈에 들어왔다. 퍽 친근하게 보이는 문자. 그러나 아무리 봐도 누구인지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문자를 보낼 주변인 중에 저장되지 않은 번호도 없고, 의뢰인일 경우는 더더욱 없었다. 잘못 보낸 문자일까, 무시하려다 ‘누구세요?’ 하고 답을 했다. 그러자 바로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번호 저장 안 했어?
“……누구-.”
-“그렇게 물으니 진짜 섭섭하다. 나 채성민인데.”
“아 선배. 죄송해요. 제가 저장하는 거 깜빡했나 봐요.”
며칠 전 류강현을 찾아 로펌을 방문한 그와 명함을 주고받았다. 분명 책상 어딘가에 잘 내려뒀는데, 정신이 없어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다.
-“먼저 연락할 줄 알았는데, 통 소식이 없길래 무슨 일 있나 했더니, 저장을 아예 안 했었구나?”
“아, 하하……. 그날 제가 좀 일이 있어서 정신이 없었어요.”
-“그럼 금요일 저녁에 나랑 만날까?”
금요일. 안 그래도 지금 금요일 저녁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여기도 또 금요일이다. 요보호아동 자선 파티고 나발이고, 프로페셔널한 부부의 모습을 기대한다던 류강현의 눈빛이 상기되자, 절로 입술을 잘근 씹게 되었다.
-세나야?
“아- 어쩌죠, 선배. 저 그날 참석해야 하는 행사가 있어서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요.”
-“……그래?”
“대신 다음에 제가 밥 살게요. 선배 회사 근처가 괜찮겠죠?”
-아무 데나 괜찮아.
“그럼, 다음 주 중에 연락드릴게요.”
-아쉽다. 알았어. 연락해.
목소리가 정말 아쉬운 듯 들렸다. 세나는 채성민과의 전화를 끊은 후 책상 위를 뒤적거렸다.
“분명 여기 놔뒀는데. 왜 없지?”
중요한 명함만 따로 둔 곳을 뒤적이다, 서랍까지 열어보았지만, 채성민이 주고 간 명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쓰레기통을 뒤적여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요즘 이래저래 정신이 너무 없긴 했지.”
기존에 수임하고 있던 사건 플러스 가사 전담센터의 일과 새로 맡게 된 김택주 대표의 사건. 그리고 류강현. 변호사가 된 이후, 이렇게 많은 한꺼번에 일이 휘몰아친 적이 있었나 싶었다. 그러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금요일 7시. 어디로 데리러 가면 돼?]
그녀를 가장 번잡하게 만드는 한 남자의 문자 때문이었다. 한쪽 볼이 깊게 팰 정도로 쓴웃음을 짓던 세나는 청담동 미용실 주소를 입력하고 핸드폰을 멀리 치워버렸다. *** 새까만 세단 차량이 미용실 입구 앞 골목에 멈췄다. 법무법인 이름으로 갓 배차를 받은 신차는 흠 하나 없이 깔끔했다. 짙은 베이지색의 가죽과 차량 내부의 옵션이 어우러져 고급스러웠다. 검사 시절부터 몰고 다니던 차가 아니라 조금 불편하지 않을까 했는데, 전기차라 그런지 특유의 엔진 소음도 없고, 핸들링도 부드러워 금방 익숙해졌다. 차에서 내린 강현은 검은색 드레스 슈트 차림이었다. 그의 몸에 꼭 맞게 재단된 슈트는 탄탄한 그의 몸과 어우러져 유려한 선을 뽐냈다. 생각보다 이른 도착에 시간을 확인한 강현은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그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차체에 등을 기대고 서서 홀로 담배를 태웠다. 그 김에 세나가 보낸 문자를 다시 읽었다. ‘좋아하는’으로 시작하는 질문지였다. 처음 이 문자를 보고 갑자기 무슨 짓이지? 하다가, 오늘 부부(행세) 동반 모임을 위한 질문이란 생각에 실없이 웃고 말았다. 이걸 알면, 뭐가 달라진다고 생각한 걸까? 머리도 좋고, 눈치도 빠른 그녀는 한 번씩 이상한 곳에서 엉뚱하게 굴었다. 누군가 저에 관해 물으면 대충 대답해 주고 말면 될 텐데. 성의도 성의였지만, 고작 저 여섯 가지 질문으로 어떤 걸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궁금했다.
-좋아하는 장소?
└집.
-좋아하는 음식?
└딱히 가리는 거 없음.
-좋아하는 색?
└검은색
-좋아하는 영화 장르?
└범죄 스릴러
-좋아하는 책?
└형법 지식정보법전
-좋아하는 이상형(구체적으로 서술. 연예인을 예시로 들어도 됨.)
└없음.
그래도 나름 성의 있게 답변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협조 똑바로 안 해요?’였다. 그래서 ‘그러는 넌?’이라고 물었다.
고즈넉한 한옥집, 바닷바람이 부는 해안가, 한강,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샤브샤브, 월남쌈, 육회, 대게, 과일은 수박
트루레드, 코발트블루, 라벤더
범죄 스릴러. 로코도 OK
폭풍의 언덕, 오만과 편견, 제인 에어, 암리타.
그리고 이상형란에는 강현이 알지도 못하는 남자 연예인의 이름이 좌르륵 줄을 세우고 있었다. 기세나와 류강현이 유일하게 맞는 거라곤 영화 취향이었다. 범죄 스릴러. 불이 붙은 담배가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그녀의 답변을 읽으며, 이 답변을 작성하는 동안의 기세나를 상상해보았다. 핸드폰 화면을 씹어먹을 듯 응시한 채로 두 손으로 토독토독 문자를 작성하는 그녀를. 집중하는 동안 입술이 빼꼼 나온 지도 모르고, 단출한 제 답변에 투덜투덜하며, 오기로라도 더 많은 내용을 적어넣었겠지. 세나의 질문에 짧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귀찮아서가 아니었다. 강현에게는 스스로가 취향이라 말할 것도 없고, 흥미 있는 것들도 별로 없었다. 옷은 대체적으로 어두운색을 선호했고, 차는 잔고장이 없고 기름을 덜 먹을수록 좋았다. 여행은커녕 매일 야근에 시달리느라 집으로 퇴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그래서 휴일이면 오피스텔 지하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를 빼놓고는 집에만 박혀 있었다. 책을 읽는 시간에 형법서를 읽는 게 더 실용적이었고, 그나마 보는 영화가 범죄 스릴러인 이유는 하나였다. 범죄자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각과 그 속에 숨어있는 심리. 손목에 채워진 시계도 그랬다. 비싼 명품인 이유는 간단했다. 어디에나 어울리고, 오래 쓸 수 있기 때문. 옷도 변호사가 된 후로는 테일러 숍을 이용했지만, 그마저도 디자이너가 맞춰주는 대로 입었다. 강현에겐 좋아하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자체가 생소한 일이었다. 뭐가 좋은지 좋지 않은지를 구분 못 할 정도로 천치는 아니었지만, 선택의 기준은 효율성이었다. 시간과 노력 대비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효율성. 투자보다 높은 가성비. 개중에 가장 효율성이 높았던 것은 공부였다. 책을 읽고 이해하고, 문제를 풀면 답이 나온다. 그렇게 숱한 경험이 쌓이자, 보다 쉽게 답을 찾았다. 일이건 사람이건. 그게 전부다. 강현이 유일하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사람은 기세나. 그녀 하나뿐이었다. 지금 약속 시간이 오 분이나 지났음에도 깜깜무소식인 기세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짧아져 버린 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새로 하나를 꺼내 불을 붙이려는데, 미용실 출입문이 열렸다. 가슴 부근이 화려한 비즈로 장식된 홀터넥 드레스를 입은 세나가 어깨 위에 검은색 재킷을 걸치고 계단 위에 서 있었다.
“…….”
강현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것도 잊은 채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풍성하게 컬을 넣은 긴 머리칼을 한쪽으로 쓸어 넘기며 그녀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새하얀 목덜미가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얄팍한 발목을 지탱하는 하이힐이 또각또각, 강현의 앞으로 다가올 때, 그녀의 귓불에 걸린 드롭 귀걸이가 찰랑찰랑, 함께 흔들렸다. 그녀의 뒤를 비추는 조명이 노을이 내려앉는 바다의 수면처럼 유난히 반짝거렸다. 강현은 자신의 눈이 이상해진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서는 그때, 차가운 밤공기가 일렁거렸고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상해진 건 강현의 눈만이 아니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호박에 줄 긋기.”
붉고 선명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어쩌면 정신까지 이상해진 걸지도.
“개 발에 편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강현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 들었다.
“그것도 아니면, 빛 좋은 개살구?”
주어도 없이 이어지는 말에 강현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 그녀를 가만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선배가 날 보는 표정이 딱 그렇다고요.”
빠듯한 그의 시선에 어색함을 느낀 세나가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타박했다.
“저도 이렇게까지 전투적으로 입어본 건 처음이라 어색하거든요?”
“……뭐라고?”
“그래도 나름 노력했는데, 칭찬은 못 해 줄망정, 소 닭 보듯 하고 그래요.”
“아…….”
선뜻 떠오르지 않는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세나는 강현의 손에 들린 담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피울 거예요? 그럼 나 먼저 차에 타고 있어도 되죠?”
강현은 대답 대신 아직 태우지도 않은 담배 개비의 허리를 꺾어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고, 보조석 문을 열었다. 세나가 드레스 자락을 들치며 차 안으로 몸을 밀어 넣을 때, 문을 잡아 주던 강현이 한 손으로 둥근 아치를 만들어 차체로부터 그녀의 머리를 보호했다. 강현은 세나의 두 발이 바닥에 자리 잡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조심스레 문을 닫아주었다. 보닛을 빙 돌아 운전석에 올라탈 때쯤, 강현은 자신의 호흡이 평소보다 흐트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대답하지 못했을까. 잘 어울린다고 한 마디쯤 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예쁘다’로 시작해 문학 시간에 달달 외웠던 수많은 미사여구 중, 그녀를 보고 느낀 감상을 표현할 만한 단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