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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선장과 항해사 (22/120)

22화. 선장과 항해사2021.09.14.

술이 흥건히 취한 김택주는 귀찮게 해서 죄송스럽다며 말을 덧붙이면서도, 자선 파티 취지에 맞게 부부 동반이어야 한다는 말을 다시 한번 전했다. ‘이럴 땐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요?’ 하는 물음을 두 눈 가득 담아 강현을 바라보았다.

16551853710182.jpg“선배?”

나는 이미 던진 말이 있으니, 네가 좀 거절해 봐, 라는 무언의 압박도 함께 담았다. 그러나 강현은 ‘나보고 어쩌라고, 네가 벌인 일이니 네가 책임져야지.’라는 듯 굳게 입을 다물었다. 알싸하게 올라오던 술기운이 찬물을 끼얹듯 확 씻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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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김택주는 자신을 데리러 온 수행비서의 차를 타고 떠났다. 김택주는 마지막까지 세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불안한 눈으로 자선 파티에 꼭 와달라고 신신당부하는 그에게 더는 얼버무리지 못하고 알겠다며 약속을 해버렸다.

16551853710182.jpg“하아……. 죽겠네…….”

근처 편의점으로 이동한 두 사람은 바깥 테라스에 깔린 플라스틱 의자에 각각 자리를 잡았다.

16551853710203.jpg“미련한 건지, 아니면 열정이 넘치는 건지. 도대체 거기서 술은 왜 마시고 있는 거야?”

강현은 편의점에서 방금 사 온 물과 숙취해소제를 건네며 그녀를 한심한 눈으로 보았다. 조금 전까진 견딜 만했던 속이 갑자기 부대껴와 세나는 일단 숙취해소제부터 한 병 원샷을 때렸다.

16551853710182.jpg“어으, 토할 것 같아.”

16551853710203.jpg“그러게 그만 마시라고 할 때 멈췄어야지.”

16551853710182.jpg“그래도 어떻게 그래요. 그런 얘길 듣고, 혼자 술 드시도록 내버려 둬요? 같이 맞장구치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16551853710203.jpg“변호사가 사건만 잘 해결하면 되지, 술친구까지 해줘야 해?”

16551853710182.jpg“나는 누구처럼 냉철하지 못해서 ‘너는 마셔라, 나는 상관없다.’가 안 된다구요.”

16551853710203.jpg“그 누구처럼, 이 나야?”

뭘 모른 척이야, 두 시간 남짓 술을 마시는 동안 입 한 번 제대로 열지 않은 주제에. 세나가 괴로워하는 김 대표를 다독이고 달래는 동안 강현은 팔짱을 낀 자세를 유지, 표정 한번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16551853710182.jpg“그럼 아니에요? 어쩜 그런 얘길 듣고 위로도 한마디 안 해주고, 눈 하나 깜짝을 안 해? 김 대표님이 불쌍하지 않아요? 가슴을 아프도록 쿵쿵 내려쳤을 땐 제 가슴이 다 아프던데, 선배는 아니에요?”

16551853710203.jpg“얼씨구. 아예 같이 울어주지 그랬어?”

16551853710182.jpg“그럴 걸 그랬나?”

16551853710203.jpg“기세나. 매번 의뢰인과 이런 식으로 상담해?”

16551853710182.jpg“우리 말은 바로 합시다. 이 자리 내가 만들었어요? 의뢰인과의 미팅 자리는 선배가 만들었잖아요. 난 의뢰인과 상담하는 과정에서 의뢰인이 마음 편히 털어놓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맞춘 것뿐이구요. 결과적으로 김 대표님의 속사정도 알았으니 된 거 아닌가?”

16551853710203.jpg“하, 그래서 잘했다는 거야?”

16551853710182.jpg“못한 건 또 뭐야. 선배. 선배랑 나랑은 분야가 달라요.”

16551853710203.jpg“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잖아?”

16551853710182.jpg“이혼 상담이라는 게 의뢰인의 이혼을 부추기거나 무작정 화해를 시키는 일이 아니라구요.”

맨날 책상에 앉아 범죄 유무만 따지고 있는 강현이 이혼에 대해서 뭐를 알긴 제대로 알까 싶었다. 하긴 결혼도 해본 적 없는 그가 이런 상담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매일 이혼과 마주하는 전문가였다.

16551853710182.jpg“내 의뢰인에게 어떤 아픔이 있는지, 무엇 때문에 이혼을 고려하는지, 문제개선을 원하는지, 아니면 보상이나 위로를 원하는 것인지. 이 모든 것들을 취합해서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거죠.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부부의 인생이 달린 거니까.”

세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목청을 키웠다.

16551853710182.jpg“이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의뢰인이 이혼이라는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선장’이라면, 이혼 전문변호사는 그 배의 ‘항해사’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함께 타고 있는 배의 항해사로서 선장의 결정을 지지하기도 하지만, 한 발 뒤에서 그 결정을 현실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때로는 앞으로의 항로를 결정하는 데 객관적인 조언도 해야 한다.

16551853710182.jpg“선장과 항해사. 언더스탠드?”

16551853710203.jpg“아, 그래서 우리 프로페셔널한 기세나 변호사님은 프로답게 일 처리를 하겠다는 열정으로 그런 쓸데없는 부탁까지 수락한 거군?”

16551853710182.jpg“……아, 그거는.”

가방에 고이 담긴 남색 봉투가 존재감을 발휘했다. 가는 데엔 문제가 없는데, 부부 동반이라니. 사건이 사건인 만큼 아무나 데려갈 수도 없는 자리였다. 세나의 눈앞에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소의 눈망울을 한 김택주가 어른거렸다.

16551853710182.jpg“이번 경우는 특수한 케이스기도 하고, 의뢰인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아내의 속마음을 아는 거라고도 하고…….”

변호사로서가 아닌, 누군가의 부인으로서 만나달라던 김택주. 갑자기 부담감이 확 몰려와 자신만만하던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16551853710203.jpg"내가 그릇이 작아 기세나 변호사님의 큰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해 잔소리했구나."

16551853710182.jpg"아니.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16551853710203.jpg“이혼 상담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말이야.”

16551853710182.jpg“쥐뿔……, 이라고는 안 했는데……요.”

그냥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아,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나? 잔소리에 열을 받아 흥분했더니, 조금 전 했던 말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커다란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며 변명거리를 찾는 그녀의 모습에 강현은 헛웃음을 삼켰다.

16551853710203.jpg“그래서 어쩔 셈인가요, 이제? 프로변호사님이 한 수 가르쳐주시죠?”

본인의 무지를 나무라며 읊조리던 강현이 돌연 자세를 낮추며 사근사근하게 굴었다. 물론 그가 정말로 사근사근할 리 없다는 걸 알기에 세나는 되레 기가 죽었다. 부드러운 어조와는 다르게 눈빛은 사납기 그지없어 허튼소리를 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럴수록 당당해야 한다. 작은 동물도 궁지에 몰리면 제 몸집을 부풀리기 마련이다. 파티의 초대장은 두 장이었다. 류강현 한 장, 기세나 한 장. 김택주 대표는 기세나뿐만 아니라 류강현에게도 꼭 와달라 당부를 했다. 세나는 눈에 힘을 딱 주고, 턱을 치켜세우며 당당히 말했다.

16551853710182.jpg“어차피 선배도 그 파티에 가야 한다면서요?”

고로 류강현 역시 파트너를 대동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된 거 부부 행세를 해야 한다는 게 매우 걸리지만, 어차피 함께 갈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만나는 여자도 없다고 하던데, 따로 데려갈 파트너가 없을 게 분명했다.

16551853710182.jpg“그러니 좋게좋게 같이 갑시다.”

16551853710203.jpg“누가 그래? 내가 그 파티에 참석한다고?”

그러나 류강현은 세나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본 듯 냉소 가득한 숨을 뱉으며 머리를 잘게 털었다.

16551853710182.jpg“술자리에서, 김 대표님이, 그랬잖아요?”

내 두 귀로 듣고 내 두 눈으로 봤는데 왜 딴소리일까. 일부러 저러나 싶었는데,

16551853710203.jpg“잘 생각해봐. 내가 뭐라고 했는지.”

강현이 제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반문하는 태도가 아주 밉살스러웠다.

16551853710182.jpg“…….”

기억을 돌려 김 대표가 초대장을 건넬 때의 상황으로 돌아갔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가겠다는 의사를 표한 적이 없다. 강현은 귀찮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고, 그의 눈치를 보며 김 대표는 강현 역시 오기로 했다는 식으로 에둘러 말했다. 툭 벌어진 세나의 입술이 도로 다물리자 그의 냉랭한 목소리가 쐐기를 박았다.

16551853710203.jpg“애초에 거절할 초대였어. 클라이언트들의 대소사를 일일이 다 챙기려면 24시간도 모자라니까.”

애초에 거절할 생각이었다니! 세나가 ‘그럼 나는요?!’ 하고 외쳤다.

16551853710203.jpg“이보세요. 기 프로님.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목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그러게 자신은 왜 간다고 했을까.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다 보니 김택주 대표의 상황에 연민을 품었고, 자신을 마치 구명줄이나 되는 양 연신 고맙다는 김택주에게 진짜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제 아내를 만나 달라는 김 대표의 애원에 보기 좋게 넘어갔다. 그때 왜 류강현이 제 손을 잡고 술을 그만 마시라며, 김택주를 힐끔거렸을까.

16551853710182.jpg“설마 그럴 줄 알고, 술 그만 마시라고 한 거예요?”

16551853710203.jpg“…….”

이제야 눈치챘냐는 그가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뀌었다. 일단 물부터 마시고 생각하자 싶어 테이블 위에 놓인 물병을 들고 뚜껑을 열었다. 허탈함에 손에 힘까지 풀렸다. 단단한 뚜껑이 제 맘대로 열리지 않아 낑낑거리자, 강현이 혀를 차더니 낚아채듯 물병을 가져와 대신 열어 건넸다. 세나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입가에 흐르는 물을 쓱 닦아내고는 강현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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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로 넘어갈 순 없다. 명분.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그를 끌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세나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16551853710182.jpg“요보호아동을 위한 자선 파티라잖아요.”

16551853710203.jpg“그런데?”

16551853710182.jpg“가서 기부도 좀 하고, 기부를 하는 김에 김 대표님 부탁도 좀 들어주고.”

16551853710203.jpg“기부는 매년 따로 하고 있으니 굳이 갈 필요 없고. 김 대표님 부탁을 흔쾌히 수락한 건, 내가 아니라 기세나 변호사님이고.”

16551853710182.jpg“기부는 많이 할수록 좋다는 거 몰라요?”

16551853710203.jpg“기부는 형편에 맞춰서 해야 한다는 거 몰라?”

16551853710182.jpg“요보호아동들이 불쌍하지 않아요?”

16551853710203.jpg“불쌍하지. 그래서 보육원에도 따로 기부하고 있어.”

화살을 쏘는 족족 튕겨 나왔다. 철옹성도 저런 철옹성이 없다. 저 정도 수준의 성벽이면 미사일을 쏴도 무너질 일이 없을 것 같다.

16551853710182.jpg“그래서 안 간다고요?”

16551853710203.jpg“어. 바빠. 그리고 바빠질 예정이고.”

강현의 표정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단호했다. 이게 뭐라고. 이게 뭐라고 이토록 서운할까. 서운함이 쌓이자 기필코 그를 데려가리라, 오기까지 생겼다.

16551853710182.jpg“와. 선배 완전 생 양아치다. 이 사건 나한테 넘긴 게 누군데.”

양아치라는 단어에 강현의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강현은 기대고 있던 의자에 몸을 떼더니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세웠다.

16551853710203.jpg“양아치라는 말은 지금 기세나 널 두고 해야지. 사건 물어와서 던져줬더니, 부려 먹기까지 하려고?”

16551853710182.jpg“어차피 김 대표님은 선배님 클라이언트잖아요.”

16551853710203.jpg“내 클라이언트는 바이오제약이지. 엄연히 달라.”

16551853710182.jpg“수임 계약서에 선배 이름도 넣을 거예요.”

16551853710203.jpg“누가 사인을 한대?”

16551853710182.jpg“어, 그럼 나도 이거 안 맡을래요.”

16551853710203.jpg“어쩔 수 없지. 김 대표가 크게 실망하겠네. 뭐든 해주겠다 호언장담하던 기세나 변호사가 한 입으로 두말하면.”

16551853710182.jpg“…….”

16551853710203.jpg“…….”

16551853710182.jpg“선배!! 이러기예요?!”

지나가는 사람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약이 바짝 오른 세나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술기운이 미처 가시지 않은 붉은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있었다. 아, 웃으면 안 되는데. 강현은 커다란 손으로 입과 턱 아랫부분을 가리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분에 겨워하는 세나의 얼굴이 흥미로웠다. 다채롭게 변하는 그녀의 표정이 보고 싶어 좀 더 약을 올리고 싶어졌다. 그럼 억울해서 엉엉 울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관이었다. 그 옛날, 층계참에서 광견병 걸린 개새끼라 욕하던 그때처럼. 강현은 씩씩거리는 세나를 보며 왜 어린 남자애들이 좋아하는 여자애들을 괴롭히는지, 그 심리를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괴롭혀서라도 관심을 끌고 싶어 했던 건 줄 알았는데, 화를 내는 모습이 귀여워서였네. 순 내숭 덩어리 주제에 저에게만 민낯을 드러내는 그녀가 새삼 예뻐 보였다. 그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기세나의 저런 모습을 저만 알았으면 좋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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