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저 아직 미혼인데요?2021.09.11.
김택주가 정종이 담긴 하얀 주전자를 손에 들고 주둥이를 세나의 앞으로 내밀자, 세나가 얼른 한 잔 받아들었다. 강현의 잔이 채워지고, 김택주의 잔이 채워지는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세나는 슬그머니 작은 그릇 옆에 잔을 내려놓았다. 확연히 가라앉은 분위기에 숨이 막혀 이대로 들고 있다간 저도 모르게 짠을 하자고 내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택주는 엄지로 자신의 잔을 쓸어내리다, 아무 말도 없이 훅, 하고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앞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강현은 한 손으로 잔을 가려 입술만 축이고 내려놓았다. 함께 술을 마셔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한 세나가 분위기를 살피는 동안, 김택주는 한 모금밖에 되지 않는 정종으론 답답한 속이 쉬이 뚫리지 않는지 연거푸 석 잔을 더 마셨다. 상 위로 탁, 떨어진 잔이 파르르 떨렸다. 한껏 힘이 들어간 김택주의 주먹도 바들바들 떨렸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얼굴에 고민이 가득해 처음보다 십 년은 늙어 보였다. 세나는 상 위로 상체를 살짝 숙여 배려의 말을 전했다.
“지금 당장 말씀하기 힘드시다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여전히 복잡한 심경에 말문을 열지 못하는 그를 향해 강현이,
“김 대표님. 혹 제가 있어 말하기 불편하신 거라면 제가 나가 있겠습니다.”
뒷말을 덧붙이자, 김택주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두 사람을 보았다.
“아닙니다. 류 변호사님도 들어주십시오.”
미간 깊게 팬 홈에서 그의 괴로움이 묻어났다. 다시 자리에 앉은 강현은 하얀 주전자를 들더니 김택주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후우…….”
무거운 숨이 바닥을 꺼트릴 듯 길고 짙게 쏟아졌다.
“사진을 보셨나요?”
그의 질문에 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일을 당했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제가 한심해 보이시죠? 마누라한테 맞고 다니는 주제에 기업 대표라고 남들 앞에서 떵떵거리며 폼이나 잡고. 직원들한테는 위신이나 세우고 말이죠. 우습지요.”
남자의 목소리엔 자조의 색이 짙게 묻어있었다. 그가 내뱉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일이 밖으로 누설됐을 때 그가 견뎌야 할 모멸감 중 하나였다.
“올해가 결혼 생활 18년 차쯤 됐는데, 자식은 아들 하나 딸 하나입니다.”
김택주는 오랫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기었다, 이내 자연스럽게 서두를 꺼내 들었다.
“아들은 기숙학교를 다니고 있고, 딸은 캐나다 유학을 가 있는 상태입니다. 그나마 다행이지요. 이런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아도 되니까.”
아이들을 떠올리며 허탈하게 웃는 모습이 퍽 서글퍼 보였다. 그가 울대뼈를 크게 울렁이며 침을 삼키고 마른 입술을 적셨다.
“아내의 폭력이 시작된 건 오 년 전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였습니다.”
맞선을 통해서 만난 두 사람은 혼기가 꽉 찬 나이라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을 올렸다. 서로의 조건을 충족했고, 집안 수준도 비등비등했다. 그러나 결혼한 지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아내 쪽 집안 사업이 부도가 나고 말 그대로 쫄딱 망해버렸다.
“재산을 손에 꼭 쥐고 있으면서 사돈댁 일을 나 몰라라 하는 어머니에게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겠죠.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 어머니는 틈만 나면 아내를 불러다 이혼하라고 겁박하셨습니다. 결혼한 지 일 년도 안 돼 사업이 망하다니, 애초에 사기꾼 집안 아니냐며 명절 때마다 친척들 앞에서 아내를 괴롭혔지요.”
배우자의 직계존속에게 일방적인 부당대우를 당할 때 그것은 이혼 사유가 된다. 그래서 고부갈등에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아예 그 관계를 끊기도 한다. 그러나 김택주는 자신의 사업 자금의 기반이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기에 쉽게 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더는 견딜 수 없다며 이혼을 원하는 아내에게 김택주는 아이를 가지자 제안했다. 손주가 생기면 어머니가 더는 아내를 괴롭히지 않을 줄 알았다고 했다.
“다 제가 모자라서 그런 거지요. 되도록 어머니와 아내를 마주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는데, 제가 회사 일로 바쁘거나, 출장을 가는 날엔 득달같이 찾아와 아내를 모욕하고 자극하기 일쑤였습니다.”
깊은 한숨. 과거를 떠올리는 김택주의 낯빛이 어두웠다.
“그때마다 제가 아내에게 해준 거라곤 심리적 보상이 아닌 물질적 보상뿐이었고. 집안에 한가득 쌓이는 아내의 옷들과 명품 가방들을 보며 내심 안심했던 것 같습니다.”
아내뿐 아니었다. 김택주는 한순간에 가난해져 버린 아내의 친정에도 꼬박꼬박 용돈을 보내드리고, 시골 한적한 마을에 집도 한 채 지어드렸다. 그러나 그걸로는 갈등의 골이 메워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내를 욕하고 패악을 부리셨습니다. 제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며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아세요?”
김택주는 괴로움과 함께 술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알코올의 쓰디쓴 기운을 잇새로 뱉으며 그가 고개를 푹 떨궜다.
“후련했습니다. 해방감을 느꼈죠. 이제 더는 아내를 괴롭힐 사람이 없으니 나만 잘하면 되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러나 아내는 증오 대상이었던 시어머니가 사라지자, 그 원망을 남편에게로 돌렸다. 하필이면 그때, 신약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김택주의 회사가 미국의 큰 제약회사와 계약을 하게 되면서,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빠졌다. 시차 때문에 밤낮없이 일해야 했고, 연구소의 방문과 줄줄이 잡힌 미팅으로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그 날. 아내는 처음으로 김택주에게 폭력을 가했다. 욕을 하고, 작은 물건을 하나둘 던지다가, 결국에는 발과 주먹으로 직접적인 폭력을 행했다. 그렇게 오 년. 오 년을 버텼다.
“아내에게 정신과 치료도 권해보고, 별거도 권해보고 다 해봤는데. 오랫동안 쌓인 상처는 쉽게 치료되지 않는가 봅니다. 다 제가 잘못한 거겠지요.”
감당하기 힘든 폭력을 당하면서도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저를 때리는 아내도, 아내에게 증오심을 심어준 자신의 어머니도. 오로지 저 혼자 감내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듯 그는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과연 이들 부부의 갈등은 누구로부터 시작한 걸까. 결혼한 지 일 년 만에 망해버린 친정. 여유가 있음에도 도와주지 않았던 시댁. 거기에 한술 더 떠 시어머니의 지독한 괴롭힘. 남편의 노력에도 나아지지 않는 관계. 끊어낼 수 없던 천륜. 많은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행복하게 잘 살겠다는 맹세와 미래를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로서의 삶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원인이 어디에 있건 부부는 서로 배려하고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렇게 자책하면 오히려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더 줄 뿐이에요.”
세나는 자책하는 김택주를 다독였다.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웃는 모습이 예뻐서 첫눈에 반했는데, 화내고 우는 모습만 보다 보니 더는 견디기 힘들어서요. 망가지는 아내를 보며 저도 함께 망가져 가는 거겠죠.”
어느새 비워진 주전자에 새로운 술이 담겼다. 여러 감정이 뒤엉킨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세나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혼자서 술을 마시는 김택주가 안쓰러워 세나도 함께 술잔을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 번째 주전자가 방에 들어오고, 약간 알딸딸한 기운이 돌 때쯤 술잔을 든 손등 위로 강현의 손이 올라왔다.
“그만 마셔.”
그가 김택주를 한번 힐끔이더니 소리 없는 입 모양으로 말을 했다. 혹시 실수할까 봐 그러나? 내가 이런 상담을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닌데, 걱정이 지나치시네. 의뢰인과 밖에서 술을 마셔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자신은 프로였다. 세나는 콧등을 한번 찡긋거리며 ‘노 프라블럼.’이라 자신만만하게 속살거렸다. 양쪽 볼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여놓은 주제에 또 한 잔 꿀떡 삼키는 세나 때문에 강현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 자리를 어떻게 마무리하면 좋을까, 강현은 상 위에 팔꿈치를 대고 제 관자놀이를 짚었다. ***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상담이 길어졌다. 자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세나를 향해 김택주는 고맙다고 한 잔 주고, 세나는 그동안 참 많이 힘드셨겠다, 위로하며 한 잔을 건넸다. 김택주와 세나는 긴 시간 동안 서로의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신뢰를 쌓아갔다.
“아내를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
술을 마시는 속도가 점점 더뎌지더니, 김택주의 어깨가 늘어졌다. 거친 숨을 푹푹 내쉬던 그가 주먹을 쥔 손으로 제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괴롭게 심경을 토했다.
“그런데 너무 미워요. 가끔은 저도 모르게 울컥울컥하면서 같이 싸우고 싶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이런 나 자신이 너무 싫고. 도대체가 뭘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아내도, 저도 이대로 가다간 같이 죽자는 것밖에 안 되고.”
“사람이니까요, 매번 혼자 견디기 버거우면 그럴 수도 있어요! 저도 누군가를 미워한 적 많아요!”
“콱 죽었으면 싶다가도, 회사나, 자식들 생각하면 참고 살아야지 하는데. 요즘 그게 잘 안 돼요.”
그는 재차 자신의 가슴을 쿵쿵 내리쳤다. 이렇게까지 의뢰인의 상황에 라포를 형성하고 싶지 않았는데, 눈앞에 50대 남자가 저리 아파하니 자꾸만 위로해주게 되고, 세나 또한 감정이 울컥울컥 치밀었다.
“그러지 마세요. 대표님. 왜 그렇게 혼자 자책해요. 제가, 제가 도와드릴게요.”
팔짱을 낀 채로 술에 취한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강현은 쯧, 혀를 차며 테이블 위에 놓인 술 주전자를 멀찌감치 치워버렸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술판을 벌일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가슴 깊이 숨겨둔 수치스러운 과거사를 꺼내놓기까지의 괴로움과 누군가로부터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위로까지 받은 김택주는 그 기분에 취해 술을 과하게 마시고 만 모양이었다.
“김 대표님.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해드릴 테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정말이죠, 기 변호사님?”
“네. 물론이죠. 저 이 방면에서 전문가예요! 저만 믿으세요!”
“그럼 일단은-.”
김택주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남색 봉투 두 장을 꺼내더니 강현과 세나 앞으로 각각 한 장씩 내밀었다. 뭔가 싶어 열어보니 초대장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주최하는 자선 파티입니다. 여기 오셔서 제 아내를 한 번 만나주시겠습니까?”
흐릿한 눈에 초점을 맞춰 손에 든 초대장을 들여다보았다. 날짜를 보니 이번 주 금요일이었다. 그날 저녁에 큰 미팅만 없다면 참석하기 어려운 날도 아니었다. 의뢰인이 원하는 건 소송이 아닌 합의. 아내를 만나보는 것도 합의서를 작성할 때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갈게요. 제가 한 번 만나보겠습니다.”
평소 사무실에서 딱딱하게 대면해야 했던 상담이 아니라, 의뢰인과 밖에서 술 한잔하며 진솔하게 한 상담이다 보니 더 마음이 쓰인 것도 한몫했다. 이렇게라도 의뢰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근데 요보호아동들을 위한 자선 파티라 부부 동반이 원칙입니다만,”
“부부 동반이요……? 저 아직 미혼인데요?”
한참을 고민하던 김택주가 류강현의 눈치를 보며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저기 류강현 변호사님도 오시기로 한 행사이니, 괜찮으시다면 두 분이 함께 오시는 건 어떨까요. 부부로든, 파트너로든 구색만 맞추면 되니까.”
김택주는 기세나에게, 변호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아내로서 제 아내의 마음에 공감해주고, 그녀의 심리상태와 그녀가 진짜로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 주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 시간까지 수임료를 드리겠다는 말과 함께.
“그러니까.”
커다란 눈꺼풀을 껌뻑거리던 세나는 자신이 들은 말을 재차 곱씹었다.
“류강현 변호사님이랑 저랑,”
흔들리는 눈동자가 못마땅해하는 류강현을 향했다가 다시 초대장을 향하고,
“부부로.”
마지막으로 김택주를 향했다.
“이 모임에 참석해달라는 그 뜻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