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악처(惡妻)2021.09.07.
“말도 안 돼. 되레 위자료를 주겠다니. 의뢰인이 약점이라도 잡혔대요? 바람이라도 피웠어요? 아무리 바람을 피웠어도 이건 아니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위자료까지 지급하면서 이혼을 하고 싶은데, 사유에는 가정폭력이 없을 거라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세나를 보며 강현이 난감한 듯 미간 사이를 긁적였다. 그가 한 손은 허리춤에 얹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기세나. 가정폭력사건 한 번도 안 다뤄봤어?”
“그럴 리가. 숱하게 만나는 사건인데.”
“의뢰인은 보통 어느 쪽이지?”
“대다수가 부인 쪽이죠.”
“왜?”
“가정폭력사건 가해자의 83%가량이 남편이고, 가부장적인 사고방식과 사회적 스트레스로 인한 분노 표출, 음주가 원인인 경우가 많았죠.”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편은 사회적으로 질타를 받고, 법적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옹호할 가치도 없어.”
힘이 들어간 턱선이 예리한 날을 그렸다.
“그런데, 네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어.”
강현이 두 팔을 넓게 벌려 세나의 책상 모서리를 잡고 상체를 내렸다. 별거 아닌 행동. 그러나 떡 벌어진 그의 어깨와 책상 위에 드리운 그림자만으로도 위압감은 충분했다. 책상 모서리를 잡고 있는 손등에서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단순히 생각해서 똑같이 주먹을 휘둘렀을 때 누가 더 위협적일까?”
아무리 세상이 ‘남녀평등’을 외친다고는 하나 체급이나 힘의 우위를 따졌을 때, 여성이 상대적으로 연약하고 덜 폭력적인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연약한 여자가 남자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면?
“경제지에 이름을 올리는 중견 100대 기업의 대표가 알고 봤더니 ‘매 맞는 남편’이었다, 는 어떨까?”
“아…….”
그제야 세나는 강현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깨달았다. 의뢰인의 사회적인 위치. 그리고 그가 무엇을 지키고 싶어 하는지. 오랜 시간 동안 확립된 사회적 프레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자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여성보다 큰 힘을 가졌다. 그렇기에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그 프레임 안에서 남자는 없었다. 잘못된 관습으로 빚어진 또 다른 역차별. 실제론 매 맞는 남편에 대한 동정 여론보단, 도대체 그 남자가 얼마나 무능하고 모자랐으면 여자에게 맞고 사냐는 비웃음을 살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물며 수백 명의 직원과 한 기업을 책임지고 있는 대표에게 ‘매 맞는 남편’이란 이미지는 최악이었다. 묻어둘 수만 있다면 무덤까지 들고 가고픈 비밀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 부인은 남편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이혼을 완강히 거부했다. 만약 무리하게 이혼을 진행한다면, 남편이 감추고 싶어 하는 비밀을 만천하에 까발리겠다는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쉽지 않네요.”
“아, 하나 더.”
“선배. 이것만으로도 이미 벅찬데, 뭐가 또 있어요? 패키지 상품이야, 뭐야?”
세나의 불만에 강현이 조소를 씩, 흘리며 숙였던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부인 쪽에서 이혼을 하고 싶으면 재산분할의 명목으로 회사의 지분을 달라 요구하는데, 그건 절대 안 돼.”
유책배우자라고 하나 재산형성에 기여도가 있다면 합당한 재산을 분할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그 재산엔 당연히 주식 또한 포함된다.
“최악이네요.”
“어려운 케이스야. 멀쩡한 사유가 있는데 그 사유는 밝힐 수 없고. 소송까지 가면 재산분할 기여도를 판단할 때, 이 사유가 드러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합의로 가야 해.”
“그럼 폭력을 제외한 다른 이혼 사유가 있어요?”
“자세한 내막은 의뢰인과 만나서 이야기를 해봐야지. 부인 측에게 다른 사유가 있는지 이제부터 차근차근 파헤쳐봐.”
“…….”
“그리고 그걸로 조용히 합의 이혼을 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를 짜는 건 기세나 변호사의 능력이고.”
그녀에게 골치 아픈 사건을 던져준 강현은 무신경하리만치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딱한 자세가 몹시도 여유롭다. 세나가 강현을 한껏 노려보다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어쩐지 나한테 단독으로 사건 맡기겠다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혼 소송은 다른 재판과 다르게 매우 지저분하다 못해 추잡한 전쟁이었다. 배우자의 유책 사유에 따라 얼마나 많은 총알을 장전했는지, 이 총을 언제 쏴야 하는지, 적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뺏어올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전쟁. 모멸감을 무기로 서로의 뼈와 살을 깎아 먹는 전쟁. 이미 끝날대로 끝난 사이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원초적인 감정뿐이었다. 진흙탕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아주 똥이 천지로 깔린 밭에서 뒹굴어야 하는 싸움도 있다. 그런데 이번 케이스는 오히려, 의뢰인에게 숨겨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이기기 위해 준비한 총알은 불발탄. 자칫하면 자폭이 될 수도 있는. 세나는 문득 강현이 왜 이런 사건을 제게 들고 왔는지가 궁금했다.
“선배. 내가 만약 이거 수임 거절하면 어쩔 생각이에요?”
“그건 생각 안 해봤는데?”
“왜요?”
애초에 다른 대안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 턱 끝에 닿은 손이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한참 만에야 굳게 다물린 강현의 입술이 열렸다.
“글쎄. 너라면 당연히 맡을 거라 생각해서.”
거추장스럽게 여러 말을 붙이는 것보다 그 한마디가 세나의 가슴을 뚫고 쿵 박혔다. 그의 확신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같은 동료로서의 막연한 믿음인지, 아니면 그저 하는 말인지.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기분 좋은 대답이었다.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는 것 같아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흩어진 사진들을 정리해 봉투에 담았다.
“그래서 맡겠다는 말이야, 안 맡겠다는 말이야?”
청량감이 맴도는 향기가 훅, 밀려들었다. 강현이 옛날부터 사용하던 향수였다. 화들짝 놀란 세나가 고개를 들자, 바로 코앞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강현과 눈이 마주쳤다. 지그시 저를 응시하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세나는 시선을 피하는 대신 사건을 맡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골까지 쪽쪽 빨아 먹을 거라고 했지만, 오해 말아요. 이건 그냥 사건이 흥미로워서 맡는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공 들인 시간에 비해 실질적인 이득이 얼마일지조차 가늠이 가지 않는 사건이었다. 그래도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 무사히 일이 성사됐을 때, 성공에 대한 보람은 크겠지. 부러 투덜투덜 뒷말을 덧붙이자, 가까운 거리에서 들릴듯한 작은 웃음이 귓가로 파고들었다.
“이따 저녁에 시간 비워 놔. 의뢰인과 만나기로 했어.”
“내가 약속이 있으면 어쩌려고요? 이것도 생각 안 해봤어요?”
세나는 이 대책 없는 남자에게 뭔가 신선한 한 방을 날리고 싶었다. 사건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의뢰인과의 저녁 약속은 계획에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남자는 당황하는 법이 없다.
“아니. 그 약속 깽판을 쳐서라도 데려갈 계획이었지.”
도통 생각을 읽을 수 없던 표정이 금세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변했다. 세나는 류강현의 근거도 없는 자신감에 넋을 놓고 수긍하고 말았다. ‘벌써부터 윗선에서 까라면 까야지 마인든가’ 싶어 얼른 정신을 차렸는데, 할 말을 마친 강현은 이미 몸을 돌려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갑자기 아까 하던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아까 그 앵무새 사건, 범인은 누군데요? 남편이었어요?”
세나는 강현의 등에다 대고 물었다. 손잡이를 돌리던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너무 뻔하잖아.”
“그러게 왜 중요한 얘기를 쏙 빼고 해요? 사람 궁금하게.”
그는 앵무새 이야기를 할 때처럼 흥미로운 눈빛을 하고 답했다.
“범인은 여자의 조카였어.”
“조카요? 왜요?”
“조카가 이모를 살해할 동기가 뭐겠어?”
“돈??”
강현의 입매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다는 듯 은근한 호선을 그렸다.
“정답.”
*** 의뢰인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한식집이었다. 각각 미닫이문으로 되어있는 한식집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대화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와 있던 의뢰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긴장한 듯 굳어 있던 얼굴이 세나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강현을 보고 눈에 띄게 풀어졌다. 남자는 자신의 앞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앉으라 권했다. 강현은 가볍게 묵례로 인사를 대신하고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재킷의 단추를 풀며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이 앉고 나서야 세나가 자리에 앉았다.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던 기세나 변호사입니다.”
강현이 제 옆에 앉은 세나를 소개했다.
“아, 네. 반갑습니다. 기세나 변호사님. 바이오제약 대표 김택주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기세나입니다.”
상대방이 미리 준비해놓은 명함을 건넸고, 세나 역시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소개를 마무리했다. 손바닥보다 더 작은 명함엔 한 사람의 정보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지표처럼. 세나는 제 손에 들린 명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이오제약 대표 김택주」 얼굴이 나오지 않는 사진에서 보았던 수많은 학대의 상처들과 이 명함이 보여주는 남자의 이미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의 체구는 작지 않았다. 170 중반대의 키에 전체적으로 유순한 느낌은 있었지만, 건강한 50대의 남성이었다. 소개를 끝으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세 사람 중 오로지 류강현만이 무감한 얼굴로 제 앞에 놓인 물수건을 들어 손을 닦았다.
‘저러니 차갑다, 냉철하다는 소리를 꼬리표처럼 달고 살지. 내가 뭘 바라…….’
저에게 그런 사진을 보여주고, 바로 그날 저녁에 의뢰인과의 만남을 주선한 강현의 무신경함에 혀를 내둘렀다. 세나는 김택주의 명함을 테이블 한 편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아무래도 긴 대화가 필요하리란 예감이 들었다.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강현과 김택주는 주로 회사와 관련된 대화를 나눴다. 세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김택주라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에 대한 김택주의 자부심은 남달랐고, 그는 함께 일하고 있는 사원을 진심으로 아끼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중년답지 않게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기까지 했다. 매 맞는 남편이라고 하기에 어딘가 주눅이 들고, 무기력할 거로 생각했던 세나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래서 더더욱 왜 그런 일을 당하고만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유가 뭘까. 식사가 얼추 마무리될 때쯤에 김택주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술 한잔. 괜찮으실까요, 기세나 변호사님?”
“아, 네. 괜찮습니다.”
세나는 육회로 향하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두 손을 모았다.
“김 대표님. 술은 다음에 하시죠. 오늘은 첫 만남이니.”
“아,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강현의 만류에 세나가 다급히 손을 저으며 김택주에게 괜찮다고 말한 뒤, 오히려 종업원을 불러 술을 시켰다.
“아니에요. 힘겨운 얘기를 터놓을 때 술이 필요하기도 하니까요. 한 잔 정도는 괜찮아요.”
어찌 됐든 의뢰인과 상담을 할 때, 의뢰인이 보다 편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또한 변호사의 도리이니까. 강현은 못마땅한 얼굴로 짧게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