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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매 맞는 남편 (19/120)

19화. 매 맞는 남편2021.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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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은 애당초 사랑으로 결혼을 한 게 아니었다.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대던 남편은 세나의 의뢰인이 가진 재능을 탐냈고, 빼앗고 싶어 했었다. 그래서 결혼하자마자 부부생활과 임신을 강요, 디자이너로서의 활동을 암암리에 방해했다. 그리고 그는 재판에서 끝끝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매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서로의 아이디어가 비슷할 수밖에 없고, 비슷하다고는 하나 어차피 부부인데 무슨 상관이냐며, 남편이 잘나가면 아내한테도 좋은 거 아니냐며. 왜 이게 이혼 사유가 되냐는 억지를 부렸다. 재판부는 ‘혼인을 지속하기 어려운 중대 사유’라는 판결로 아내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후 세나의 의뢰인은 ‘상처를 훌훌 털어버리고 날아오르는 새가 되고 싶다.’라는 의미를 디자인에 담았고, 국제적으로 이름있는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리고 그 컬렉션 중 하나를 세나에게 선물했다. 자신에게 자유를 찾을 용기를 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16551853152233.jpg“특이하죠? 예전에 상담했던 의뢰인이 선물해준 거예요.”

16551853152238.jpg“화려하고, 머리가 좋아 과시용으로 키우기 좋다더라.”

채성민은 세나와 앵무새 조명을 번갈아 보며 싱긋 웃었다.

16551853152238.jpg“암튼 이 방 분위기랑도 잘 어울려.”

16551853152233.jpg“다음 주쯤이면 저도 위층으로 올라갈 거예요. 거긴 이 방보다 넓으니까, 뭐라도 대접해드릴 수 있을 텐데. 오늘은 마땅한 게 없네요.”

16551853152238.jpg“그래? 잘나가네.”

아까부터 묘하게 거슬리는 어투에 귀가 쫑긋했다. 뭔가 싶어 그의 표정을 살펴보는데, 그는 예나 지금이나 때 묻지 않은 얼굴로 헤실헤실 웃고 있을 뿐이었다.

16551853152233.jpg‘좋은 뜻으로 한 말인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 걸까?’

마음이 무거워지는 찰나, 세나의 곁으로 다가온 채성민이 퍽 다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16551853152238.jpg“다음 주에 K 로펌으로 꽃바구니 하나 보내야겠다. 세나의 성공도 축하할 겸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 만난 거 기념도 할 겸.”

16551853152233.jpg“어, 아니요. 안 그러셔도 돼요.”

세나가 손사래까지 쳐가며 거절하자, 채성민은 눈썹을 살짝 내려트리며 서운해했다.

16551853152238.jpg“왜? 정말 반가워서 그래. 나 외국 나가 있을 때 가끔 네 생각 했어. 너 학과 생활도 엄청 열심히 하고, 선배들 사이에서 예쁜 후배로 인기 많았잖아.”

16551853152233.jpg“제가 뭘요. 인기는 선배가 훨씬 많았죠.”

세나와 채성민은 교환학생을 간 이래로 본 적도 연락한 적도 없었다. 물론 선후배로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마치 어제 만난 친구처럼 살갑게 다가오는 그의 천부적인 친화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16551853152238.jpg“대신 밥 한번 먹자. 같은 서울 바닥에 있는데 연락도 하고.”

16551853152233.jpg“지금 서울에 계세요?”

16551853152238.jpg“나, 들어 온 지 꽤 됐는데, 몰랐구나. 강현이가 말 안 해줬어? 이거 내 명함.”

그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하얀색 작은 명함을 한 장 꺼내 건넸다. 명함을 받아든 세나가 자신의 명함을 찾아 몸을 돌리는데, 채성민은 이미 책상 위에 올려진 명함 케이스에서 그녀의 명함 한 장을 집어 들고 있었다. 명함을 본 그가 한껏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16551853152238.jpg“이혼 전문변호사. 멋있다.”

그의 웃음은 따스한 햇살을 연상케 했다. 새삼 학창 시절 그가 왜 인기가 많았는지 실감이 난다. 그러나 훌쩍 성인이 된 지금, 채성민을 보고 설레거나 하진 않았지만, 류강현과 마찬가지로 제게 좋은 선배가 되어줄 사람인 것 같아 잘 보이는 곳에 명함을 내려두었다.

16551853152238.jpg“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지? 나도 일 때문에 이제 가봐야겠다.”

16551853152233.jpg“네. 들어가세요. 선배.”

16551853152238.jpg“연락할게. 또 보자.”

세나가 꾸벅 허리를 숙이자, 채성민은 ‘다음부터는 그냥 편하게 인사해.’하고 다정히 속삭였다. 누구는 보자마자 뒷걸음질 치고, 누구는 보자마자 다가오고. 같은 선배인데 많이도 달랐다. 다시 자리에 앉은 세나는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고 제 손 안에 든 채성민의 명함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중재자 역할을 도맡아 하며,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교환학생을 다녀온 후 판사가 됐을 거라 막연하게나마 짐작했는데.

16551853152233.jpg“대기업 법무팀에서 실장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하긴, 채성민이든, 류강현이든 자신이 제대로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본 사람과, 마주치면 으르렁대서 피하고 싶었던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 교내에서 종종 같이 있는 걸 목격하곤 했는데, 주로 옆에서 재잘거리는 쪽은 채성민이었고, 류강현은 시종일관 무뚝뚝한 얼굴로 대꾸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똑똑똑-. 채성민이 나가고 얼마 뒤 가벼운 노크가 방문 너머에서 들렸다. 세나는 손에서 뱅글뱅글 돌리고 있던 명함을 내려두고 시계를 확인했다. 의뢰인치고는 이른 시간이었다.

16551853152233.jpg“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류강현이었다. 그가 자신의 방을 찾아온 게 의아한 것도 잠시, 갑작스러운 손님 때문에 그가 제게 맡기겠다는 일이 있었다는 걸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16551853152233.jpg“아, 그냥 저 부르시지.”

16551853207425.jpg“…….”

뻘쭘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그는 한동안 말없이 세나의 방을 둘러보았다.

16551853207425.jpg“앵무새?”

여기저기 비치해둔 장식품들이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그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나의 뒤에 세워진 스탠드였다.

16551853152233.jpg“전에 소송 대리했던 의뢰인분이 선물로…….”

세나가 하는 대답도 매번 똑같았다.

16551853207425.jpg“특이하네.”

강현은 세나가 서 있는 책상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들어와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건넸다.

16551853152233.jpg“뭐예요?”

16551853207425.jpg“맡기겠다는 사건.”

16551853152233.jpg“이혼?”

16551853207425.jpg“응.”

16551853152233.jpg“누군데요?”

16551853207425.jpg“내가 지금 법률 자문하고 있는 회사 대표.”

그가 법률 자문을 할 정도의 회사라면 꽤 탄탄한 중견기업일 것이다. 그 회사의 대표라고 했으니, 의뢰인 또한 검색하면 쉽게 찾을 법한 큰 고객이겠지. A4용지 크기의 하얀 봉투가 제법 묵직했다. 세나는 책상 위에 놓인 다른 서류들을 정리해 공간을 만들었다. 단단히 밀봉된 서류 입구에 페이퍼 커터를 밀어 넣는데,

16551853207425.jpg“몇 년 전 인도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했어.”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된 얘기에 봉투를 열려던 손이 멎었다. 뜬금없이 인도라니. 인도와 관련된 사업을 하는 회사인가. 이번 사건과 뭔가 관련이 있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들고 강현을 보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제 뒤에 있는 앵무새 스탠드를 향해 있었다.

16551853207425.jpg“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는 사건이라 경찰들이 꽤 애를 먹었지.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이 아니었거든. 주변인들을 물색해 봤는데, 범인으로 단정 지을 만한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지.”

사건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그의 목소리가 낮고 조곤조곤해 더욱 집중되었다.

16551853207425.jpg“그런데 그 사건 유일한 목격자가 있었는데, 살해당한 여자가 키우던 앵무새였어.”

그의 시선이 세나에게로 돌아왔다.

16551853207425.jpg“앵무새의 지능이 다섯 살 어린아이 수준인 거 알아?”

16551853152233.jpg“생각보다 꽤 높네요.”

16551853207425.jpg“그 똑똑한 새가 범죄 현장으로 돌아온 범인을 알아보고 이상 반응을 보인 거지.”

강현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채 비스듬히 서서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휘었다.

16551853207425.jpg“실마리를 찾지 못해 미제사건이 될 뻔했는데, 앵무새 덕분에 범인이 검거됐다더군.”

16551853152233.jpg“이번 사건이랑 관련 있어요?”

16551853207425.jpg“아니.”

16551853152233.jpg“그럼요?”

16551853207425.jpg“앵무새를 보니까 떠올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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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친 거 아닌가. 뇌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길래 도대체 저 스탠드를 보고 몇 년 전, 그것도 남의 나라 사건을 떠올리는 건지. 이게 류강현 스타일의 감상평인가? 아니 중요한 사건인 것처럼 단단하게 밀봉된 봉투를 던져놓고 할 소리인가? 세나는 저의를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을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황당하단 얼굴로 강현을 보았다. 강현은 어깨를 한번 쓱 올렸다가 내리더니 ‘재밌지 않아?’ 하고 되물었다. 어디에서 웃어야 하냐고 되묻고 싶었다. 이윽고 강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봉투를 향해 열어보라 턱짓했다. 알다가도 모를 사람. 세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봉투를 열었다. 두툼한 내용물의 정체는 수십 장의 사진이었다. 턱 아래로 찍혀있어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상체 군데군데에 피멍이 들어있고, 손목엔 동그란 화상 자국이, 배 쪽엔 날카로운 것에 의한 자상들이 수두룩했다. 처참한 몰골이 찍힌 사진에 세나가 눈살을 와락 찡그렸다. 신체적인 특징을 살펴봤을 때 50대의 남성으로 보였다. *** 사진을 쥔 세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16551853152233.jpg“……이게 다 뭐예요?”

16551853207425.jpg“네가 소송대리를 해야 할 의뢰인의 현 상황.”

16551853152233.jpg“이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이 누군데요?”

하루 이틀 만에 생겨난 상처가 아니었다. 사진이기에 정확도는 떨어질 수 있어도, 못해도 일 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에 의해 학대당하고 구타를 당한 흔적이었다. 이혼을 원하는 의뢰인. 자식에 의한 상처는 아닐 것이다. 그럼…….

16551853152233.jpg“부인이라는 소리예요?”

강현이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세상에. 세나는 경악했다. 가정폭력은 그 누가 됐건 엄연한 범죄다. 예전 같았으면 신고해도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된 도움을 받을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정신적인 학대조차 가정폭력으로 처벌하는 등 특별법까지 제정된 시댄데, 이런 일을 당하고만 있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16551853152233.jpg“이건 이혼이 문제가 아니라, 폭행으로 형사 고소부터 해야죠!”

단순 폭행이 아니다. 팔뚝 군데군데에 나 있는 자국은 분명 담배꽁초로 지진 화상 자국이었다. 폭력뿐만 아니라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고문까지 당하고 있는 듯 보였다.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제 남편에게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하다니. 세나가 당장이라도 신고할 것처럼 흥분했다. 그에 반해 강현은 이런 사진을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16551853207425.jpg“그건 안 돼.”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심각성이 드러날 정도인데 어쩜 저렇게 냉정한 표정으로 안 된다는 소리를 하는지, 속에서 천불이 났다.

16551853152233.jpg“왜요?!”

피해자들은 오랜 기간 폭력에 노출돼 두려움에 떨거나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기력해진다. 자기가 조금만 참으면 되는 일이라고 여기기 일쑤였다. 세나 역시 가정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에게 정신과적 치료를 병행하길 권하곤 했다.

16551853152233.jpg“이 사진들만 봐도 의뢰인이랑 가해자랑은 지금 당장 격리해야 한다고요. 이 정도면 최소 몇 년은 폭력에 시달렸을 텐데.”

16551853207425.jpg“첫 번째로, 의뢰인이 원하지 않아.”

16551853152233.jpg“가해자가 복수할까 봐 무섭대요?! 그것도 법적으로-.”

16551853207425.jpg“그게 아냐.”

16551853152233.jpg“그럼 뭔데요?”

16551853207425.jpg“이혼 사유에 가정폭력은 없을 거야.”

16551853152233.jpg“아니, 그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예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당당하게 내뱉은 강현을 보며 세나는 기가 찼다.

16551853152233.jpg“이 정도 가정폭력이라면 당장 접근금지 명령부터 받아야 마땅하다구요!”

세나의 외침에도 강현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16551853152233.jpg“가정폭력을 근거로 이혼 판결을 받는 쪽이 훨씬 일 처리가 빠른데, 굳이 돌아갈 필요가 뭐 있어요?”

16551853207425.jpg“의뢰인이 원하는 건 소송보다는 협의 이혼이야. 사유에 대해서는 비밀유지 계약서를 쓰길 원하고. 원만한 합의를 한다면 위자료도 줄 의향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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