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십 분에 대한 수임료2021.08.31.
서류를 넘기던 강현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저 많이 가르쳐주세요. 주는 대로 열심히 받아먹을 테니까. 사골처럼 쪽쪽 다 빨아 먹을 거예요.”
숙이고 있던 그의 고개가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일자로 꾹 다물렸던 입술이 한참 만에야 슬며시 휘었다.
“내가 커피에다 뭘 타진 않았던 것 같은데…….”
“뭐래. 알다시피 내가 쿨하니까 인정할 건 인정한다는 거지.”
시원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남의 능력을 진심으로 인정한다는 건 사과만큼이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기세나-.”
강현이 뭔가 말을 꺼내려는데, 느닷없이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그의 말을 잘랐다. 보안이 생명인 변호사 사무실에, 허락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예의 없는 놈이 대체 누구인가 싶어 세나의 낯이 와락 일그러졌다. 신입이라면 한소리를 해야겠다, 단단히 벼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저보다 강현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여기가 네 집 안방인 줄 알아??”
더없이 낮게 깔린 목소리에 세나조차 움찔했다. 확실치는 않으나 짜증스럽게 내뱉은 숨에는 욕설이 섞인 것 같았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상대는 되레 해맑은 목소리로 자신의 실수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양 대꾸했다.
“아, 미안. 손님이 계신 줄 몰랐네.”
세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채……성민 선배??”
“나 알아요? 어라,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데…….”
그가 자신을 알아보는 세나를 보며 고개까지 갸웃대더니, 이내 뭔가를 떠올린 듯 얼굴에 반가움이 떠올렸다.
“어?! 너! 이름이 뭐더라?”
“기세나요.”
“그래! 기세나! 와 반갑다! 여기서 다 보네? 너 많이 예뻐졌다.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그녀에게 달라붙는 남자의 시선이 묘하게 어긋나있었다. 그러나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이 강현이 끼어들었다.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왜 왔어?”
“그러니까 전화를 왜 안 받아서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
“안 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응. 그걸 모르겠으니 직접 찾아왔지.”
“하아…….”
채성민은 예나 지금이나 냉소적인 강현의 반응에도 천사 같은 얼굴로 방긋방긋 웃으며 제 할 말을 해댔고, 세나는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섰다.
“두 사람 같이 일하는 거야? 지금 미팅 중? 아 나 시간 없는데…….”
“나도 없어. 너한테 줄 시간은 더더욱.”
“나 진짜 삼십 분만. 짧게 끝낼게.”
소맷자락 밑에 감춰둔 시계를 힐끔이며 시간을 계산하던 성민이 세나를 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리를 비켜달라는 듯한 눈치였다. 그들의 사이에서 멀뚱멀뚱 끼어있던 세나가 뒷걸음질을 치며 문을 향했다.
“어. 저 그럼, 제 사무실에 가 있을게요. 말씀들 편하게 나누세요.”
“나가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고마워! 이따가 다시 인사하자.”
세나는 저를 잡으려는 류강현을 뒤로하고 재빨리 그의 집무실을 나왔다. 선한 얼굴과 마음을 녹이는 눈웃음을 가진 채성민. 그런 그와는 다르게 불쾌한 감정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류강현. 거기에 세 사람이 얽힌 스토리가 부담스러워 세나는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 강현의 집무실을 둘러보던 성민이 질 좋은 가죽으로 만든 소파 등받이를 힘주어 눌렀다. 탄성이 높은 쿠션감이 일품이었다. 성민은 자신의 집무실인 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다리를 꼬았다.
“방 좋네. 채광이며 가구며, 어후, 이게 다 얼마야? 파트너 변호사 부럽네.”
강현은 성민에게 물 한잔 내주지 않고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여기저기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고 선택한 곳이 K 법무법인이라니. 이 정도 대우면 올 만하겠는데? 여기 대표가 기장수 변호사 맞지?”
10대 대형 로펌 중 하나인 K 법무법인은, 대한민국 바닥에서 법을 좀 만졌다 하면 알만할 정도로 정평이 나 있었다. 정보를 취합하던 성민의 눈동자에 돌연 호감 어린 이채가 떠올랐다.
“오, 그럼 뭐야. 기세나가 기장수 대표 딸이야??”
흔한 성씨도 아니거니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강현은 그의 말속에 숨겨진 속내를 간파했다. 하필. 그딴 거에만 꽂히는 성민이 못마땅하다. 강현은 쓸데없는 곳에 쏟아질 관심을 끊어내기 위해 그를 상대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시간 없다며? 용건만 말해.”
“친구 사이에 정 없게 너무 그러는 거 아니다.”
친구는 무슨. 일방적인 교류 관계가 과연 친구일까. 류강현은 채성민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필요에 의해서 서로를 이용하는 사이. 주로 채성민 쪽에서 류강현을 더 많이 이용해왔다. 학교 다닐 때나, 사회에 나와서 무언가 필요할 때나. 상대적으로 아쉬운 게 많은 놈이 매달리는 쪽이니, 서로의 관계를 두고 봤을 때 확실히 강현은 유리한 고점에 있었다.
“이번에 검찰 쪽에서 우리 회사를 탈탈 털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공수처 건으로 몸이 달았나 보던데?”
“왜?”
“왜긴 왜야. 공수처 설치에 찬성하는 의원들 뇌물 먹은 거 있나 없나, 입막음시키려고 증거를 캐다 캐다 우리 쪽까지 손을 대는 거지.”
그의 말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뇌물 혐의가 있는데 증거는 부족하고, 자기가 몸을 담고 있는 회사가 검찰 표적 수사의 대상이 됐다는 말이었다.
“여기까지 달려온 거 보니, 뇌물을 건넨 건 사실인가 보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기업이 어딨어? 다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서로 잇속 채우는데.”
“압수수색은?”
“아직. 다행히 그쪽에도 줄이 있어서. 그런데 어차피 곧 떨어질 거야.”
“뇌물 관련이라면, 이렇다 할 증거가 없으리란 걸 그쪽도 알아. 기업 이미지를 뒤흔들려는 수작이니까.”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파. 이번에 우리 회사에 투자유치를 하기로 한 기업이 사회적인 기업 이미지를 고수하는 쪽이라, 자칫 뇌물 혐의로 압수수색이 들어오면 투자도 물 건너갈 판이야.”
긴 한숨을 뱉은 성민을 뒤로하고 강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폰 화면에 스톱워치 앱을 켜고 내려놓았다. 유려하게 잘 빠진 검지가 주황색 버튼을 누르자 초 단위로 숫자가 빠르게 치고 올라갔다. 이번 사건을 맡은 차장검사는 강현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성향으로 보건대 그는 국회로 나갈 깜냥은 못되고, 은퇴 후 변호사보다는 기업 법무팀의 자문위원으로 안정적인 노후를 보장받으며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기를 희망하는 한량이었다. 척을 지면서까지 무리한 수사를 하는 것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형량을 합의하는 전형적인 철밥통 스타일.
“수준 맞는 임원진 중 한 사람 검찰 출두시켜서 양심고백이라도 해.”
“무슨 양심고백?”
“뒤가 밟혔으면 꼬리를 잘라야 하지 않겠어?”
“누구 꼬리? 뇌물 준 놈? 뇌물 받은 놈?”
“어차피 검찰의 목적은 너네 회사 털어먹기가 아니라, 국회의원 머리통 흔들려는 수작이니. 서로서로 쉽게 옷 벗을 수 있는 사람 던지며 폭탄 돌려막기나 하란 말이야.”
괜히 득보다 실인 관계 때문에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것보다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아 챙기는 장사치의 수법. 공수처 설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물망에 떠오르는 숙원 사업이었고, 이제는 설치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수처장에 어떤 인물을 앉히느냐의 문제로 이미 넘어간 상태였다. 개혁의 대상자인 검찰들은 자신들에게 조금 더 유리한 방향을 선점하기 위한 정보를 필요로 했고, 그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자를 흔들고자 하는 이유는 뻔했다.
“아, 아까운데. 요즘 꽤 인망이 있는 양반이라.”
“인망?”
뇌물이나 받아 처먹은 놈이 인망은 무슨. 강현이 코웃음을 쳤다.
“너네가 뇌물 먹인 국회의원이라고 해봐야 뻔히 보이는데, 지금 이렇게 흔들리면 다음 정권까지 살아남지도 못해. 싹을 도려낼 거면 뿌리까지 도려내. 기득권 세력들이 자기들 밥그릇 놓치기 싫어서 이 난리인데, 과연 이번 한 번으로 조용히 넘어갈까?”
“흐으음. 그나저나 뒤처리를 깔끔하게 해야겠네.”
“원하는 만큼 쥐여줘. 얌전해지도록.”
표적 수사로 있는 이미지 없는 이미지 탈탈 털려서 나중에 기업 이미지 회복을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 손해 보는 것보다, 우환이 될 싹을 미리 도려내는 것이 낫다.
“넌 변호사 하지 말고 전략기획실에서 일해야 했어. 우리 회사 왔으면 좋았잖아. 법무팀 팀장에 연봉 10억 거절했다며?”
“주는 대로 처먹어야 하는 것보다 골라 먹기를 하는 게 낫지.”
“하여튼 난놈이야.”
강현은 스톱워치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10분도 지나지 않은 숫자가 찍혀있었다.
“원래라면 이런 같잖은 상담도 돈을 받아야 하는데, 십 분도 안 지났으니 오늘만 무료로 해줄게. 대신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마.”
“여전히 냉정하네. 차라리 돈을 줄게. 나 여기 자주 오게 될 것 같거든.”
“하아. 채성민. 개 버릇 남 못 주지?”
강현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투박한 손길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의 검은 눈동자엔 혐오감이 가득했다. 그의 눈빛을 마주한 채성민은 익숙하다는 듯 눈가를 샐룩 접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게 피해 갈 일은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
“들어가도 돼?”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리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남자가 세나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은 방문을 허락한 적이 없음을 잊게 했다.
“아, 성민 선배. 말씀은 잘 나눴어요?”
채성민을 맞이하려 세나가 의자에서 일어나 데스크를 돌아 나왔다. 그동안 채성민은 세나의 사무실을 천천히 살폈다. 집무 테이블 하나, 일인용 소파 두 개와 접객 테이블. 색깔별로 정리되어있는 책장. 자칫 건조해 보일 수 있는 공간에 개인의 취향으로 보이는 소품들이 곳곳에 비치되어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신의 첫사랑. 사실 남들에겐 첫사랑이 애틋하고 설레는 단어일지 몰라도, 세나에겐 이루지 못한 실패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를 만나 반가운 것도 잠시, 너무 오랜만이라 전엔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세나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귓등으로 넘기며 어색하게 맞이했다.
“강현 선배 방보다는 많이 작죠?”
“아니야. 너랑 잘 어울려. 작고 아담하고. 아늑한 기분을 들게 하네. 특히 앵무새를 본떠 만든 스탠드 조명, 너랑 잘 어울리네.”
채성민은 세나의 뒤에 주홍빛 조명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는 스탠드를 콕 찍어 가리켰다. 세나는 성민이 말한 스탠드를 바라보며 수줍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 방의 장식품 중에 앵무새 스탠드는 세나에게 조금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작년 이맘때쯤 조명 디자이너 의뢰인의 이혼 소송을 대리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같은 조명 디자이너인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삼 년 만에 소송으로 종료했다. 이유는 남편이 아내의 디자인을 훔쳐 세계적인 대회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배신과 신뢰가 무너져 더는 결혼 생활을 할 수 없다.’였지만, 증거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실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