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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그’라는 이상향 (17/120)

17화. ‘그’라는 이상향2021.08.28.

올곧은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세나는 움찔 떨리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감췄다. 며칠 전 주말. 우연히 그를 만나 함께 술을 먹었고, 처음엔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술병의 개수가 늘어가면서 그만큼 마음의 거리도 가까워졌었다. 그런데, 마지막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하하 호호 즐겁게 얘기를 나눈 것 같은데. 다른 술은 모르겠지만, 세나에게 소주는 쥐약이었다. 꼭 마시고 나면 필름이 끊기는. 일단 집에도 무사히 들어갔고, 상대 쪽에서도 별다른 말이 없으니 실수는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날 이후, 류강현이 저를 빤히 볼 때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165518526673.jpg‘아마 계약서 때문이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유일하게 나의 본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느끼는 불편함.’

세나는 자신의 책상 서랍에 있는, 아직 서명을 하지 않은 계약서와 강현과의 술자리를 연쇄적으로 떠올리다 이내 떨쳐버렸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고, 일어난 일이다.

165518526673.jpg“여긴 무슨 일이세요?”

보는 눈도 있는지라, 세나는 최대한 상냥한 어조로 류강현을 맞이했다.

1655185266731.jpg“기세나 변호사한테 맡기고 싶은 사건이 있어서요.”

강현 역시 그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동료로서의 예의를 갖췄다.

165518526673.jpg“저희 팀에요?”

1655185266731.jpg“아니. 기세나 변호사님 단독으로.”

뻐젓이 팀을 만들었는데, 단독으로 사건을 맡긴다니. 회의실 안에 있던 변호사들이 일제히 세나를 보았다. 그러나 영문을 모르는 건 세나도 마찬가지였다. 저를 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강현이 손을 들어 다시 자리에 앉혔다.

1655185266731.jpg“지금은 기 변호사님이 뽑은 팀원들 얼굴 한 번 보러 방문한 거고, 이따 회의 끝나면 저 좀 잠시 보시죠.”

165518526673.jpg“한 시간 후쯤이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1655185266731.jpg“그럼 그때 보죠.”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사라졌다. 회의 테이블 끝에 여섯 잔의 커피가 담긴 캐리어가 보였다. 한여진이 캐리어에 담긴 커피를 가져와 나눠주며 ‘잘생겼는데, 센스까지 있어. 넘 완벽한 거 아냐?’ 하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모르긴 몰라도 여자 변호사들은 류강현을 굉장히 매력적인 신사로 생각했고, 남자 변호사들은 그를 어떤 영웅적인 존재로 여겼다. 아직 그에 대한 정보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대립하는 사이가 아니니 일단 한 단계 발전했다.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밟아나가다 보면 다른 식으로도 얽힐 수 있지 않을까. 꼭 남녀관계가 아니라 파트너로서의 합이 잘 맞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1655185266731.jpg“맞아. 친구 없어.”

  갑자기 왜 그 말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덤덤한 얼굴로 팩트 폭행을 흔쾌히 인정하던 모습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짜 친구가 없는 건지 아님, 친구가 필요 없는 건지. 자기 딴에는 몇몇 가지 농담을 던진 것 같았는데, 누가 봐도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터라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한 가지 새롭게 알게 된 사실. 류강현의 취향은 미국식 블랙 코미디다. 세나는 그간 묵혀두었던 질문을 팀원들에게 던졌다.

165518526673.jpg“우리 로펌 식구들은 류강현 변호사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세나의 물음에 시니어 변호사들은 어깨를 으쓱였지만, 주니어 변호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165518526673.jpg“궁금하잖아. 우리 팀 자문이고, 또 오자마자 큰 사건도 수임하고, 뭔가 멋있지 않아요?”

세나가 가볍게 얘기해도 된다는 투로 말을 던졌다. 그러자 눈치만 보고 있던 주니어 변호사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1655185269702.jpg“지난번에 제가 맡았던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입사 2년 차 하정수 변호사였다. 그는 주로 프로보노, 즉 힘없는 약자나 소외계층을 위해 대형 로펌들이 공익활동 차원에서 제공하는 무료 법률상담과 사건을 담당하는 주니어 변호사였다.

1655185269702.jpg“의뢰인이 자꾸 저에게 거짓말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사실 자기는 죄가 없다. 정말 몰랐다. 억울하다면서.”

1655185269702.jpg“그래서요?”

1655185269702.jpg“이미 구치소에는 범인은 잡혀있고 제 의뢰인은 범인은닉죄로 재판을 받는 상황이었거든요. 근데 사건을 파면 팔수록 제 의뢰인이 범죄사실을 몰랐던 게 아니라 아예 공범인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변론 방향을 못 잡고 있었어요.”

팀원들은 조금씩 하정수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1655185269702.jpg“아무래도 변호사가 된 지 얼마 안 됐고, 솔직히 변호사라면 누구보다 의뢰인을 믿어줘야 하잖아요. 만약 제 의뢰인이 공범이라면 전 의뢰인의 범죄사실을 알게 되는 건데, 변호사법상 누설할 수도 없고.”

변호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 저 딜레마에 빠진다. 처음엔 모르고 변호를 하다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의뢰인의 범죄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정의를 생각하면 당장 사실을 실토하고 증언을 해야 마땅하지만, 변호사는 변호사의 품위유지를 위해 변호사법을 지킬 의무가 있다.

1655185269702.jpg“누구한테 물어보기도 좀 그래서 류강현 변호사님이 검사 출신이라길래 한번 찾아뵌 적 있었거든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냐고.”

1655185269702.jpg“어머 그러니까 류 변호사님이 뭐래??”

1655185269702.jpg“제가 내리고자 하는 결정에 확신이 있냐고.”

1655185269702.jpg“그래서 넌 뭐랬는데?”

1655185269702.jpg“……없다고 했어요.”

1655185269702.jpg“그게 뭐야? 그래서. 그럼 류 변호사님은 뭐래?”

1655185269702.jpg“류강현 변호사님은 확신이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어요.”

하정수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변호사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런 조언이라면 여기 있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1655185269702.jpg“근데.”

에이 뭐 대단한 말이라도 할 줄 알았네, 하며 실망한 기색을 보이는 사람들을 하정수는 다시 집중시키며 입을 열었다.

1655185269702.jpg“며칠 뒤 제 책상 위에 류강현 변호사님이 직접 조사한 증거자료랑 형사 조서부터 기소 내용이 담긴 파일을 올려두고 가셨어요. 그리고 한 번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라고. 그리고 확신이 서면 다시 오라고.”

1655185269702.jpg“진짜? 류 변호사님이 직접??”

1655185269702.jpg“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1655185269702.jpg“……그게.”

하정수가 머뭇거리다 볼을 긁적였다. 중요한 순간에서 흐름이 뚝, 끊기자 사람들은 얼른 말하라며 그를 보챘다.

1655185269702.jpg“제 착각이었어요. 제 의뢰인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게 맞더라구요.”

1655185269702.jpg“와 뭐야……. 그럼, 류강현 변호사님이 일부러 네가 맡은 사건을 재조사해서 네가 판단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거야?”

한여진의 물음에 하정수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16551852752599.jpg“너무 멋있는 거 아니에요?”

하정수와 같은 주니어 변호사 이효원은 새삼 그에게 다시 한번 반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

1655185269702.jpg“그러게. 자기 일도 바쁘실 텐데, 돈 되는 사건도 아니고 프로보노인데. 보면 볼수록 진국 아닙니까?”

박종찬 변호사는 류강현의 리더십에 감격스러움을 온몸으로 표했다.

1655185269702.jpg“그럼 만약에 하 변호사가 생각한 것처럼 의뢰인이 범인이었다면 류 변호사님이 뭐라 했을까?”

1655185269702.jpg“너무 당연한 걸 잊고 있었는데, 비밀유지 의무뿐만 아니라 진실 의무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셨어요.”

‘변호사는 그 직무를 수행할 때에 진실을 은폐하거나 거짓 진술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라는 조항이었다.

1655185269702.jpg“만약 그 사람이 공범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1655185269702.jpg“든다면?”

1655185269702.jpg“제가 의뢰인을 설득할 수 있도록 도와줬을 거라고.”

회의실 안의 사람들 모두 류강현을 향한 호감도를 급격하게 높였다. 팀원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연신 감탄사를 뱉어댔다. 세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그의 능력은 어디까지인지, 가늠이 가질 않는다. 이래서야 류강현을 따라잡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더욱 멀어질 것 같아 조바심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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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의가 끝나자마자 서류만 옮겨놓고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165518526673.jpg‘나에게만 의뢰할 사건이 뭐지? 개인적인 사건인가?’

강현의 집무실 문 앞에 서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똑똑,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기 무섭게 허락이 떨어졌다. 세나는 일단 문을 빼꼼 열고 머리만 밀어 넣었다. 부서지는 오후의 햇살을 등지고 업무에 열중하는 류강현의 모습이 세나의 커다란 눈에 콱 박혔다. 음영이 내려앉은 얼굴의 윤곽이 강인한 남성상을 비췄다. 게다가 새하얀 셔츠 위로 팔뚝을 둥글게 감싸는 슬리브 가터는 묘하게 선정적이었다. 류강현은 방문이 열린 지 한참인데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보던 서류에서 눈을 돌렸다.

1655185266731.jpg“거기서 뭐 해?”

콧등에 걸린 안경 너머 매서운 눈빛이 살짝 부드럽게 풀린 것은 착각일까.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165518526673.jpg“아니, 집중하고 있는데 방해하는 걸까 봐서.”

세나가 괜히 강현의 탓을 하며 뭉그적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1655185266731.jpg“오늘은 놀아 줄 시간 없는데.”

165518526673.jpg“선배가 호출해서 온 거잖아요!”

농담인 걸 알면서도 또 발끈하고 마는 세나였다. 그녀의 날 선 반응에 강현은 너그러운 고갯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1655185266731.jpg“일단 잠깐만 앉아 있어. 이것만 좀 확인하고.”

그러고는 이내 보고 있던 파일로 시선을 내렸다. 강현은 사람들 앞에서는 기세나를 꼬박꼬박 기세나 변호사라고 부르며 존댓말을 썼다. 그러나 단둘이 있을 때는 친근함이 느껴질 정도로 말꼬리를 가벼이 했다. 예전 같았더라면 그것조차 불만을 품었겠지만, 지금은 되려 여전히 저를 후배로 대해주는 것에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였다. 세나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선배’ 류강현이 아닌 ,’파트너 변호사’ 류강현이라는 사람을 관찰했다. 파트너 변호사 류강현에게는 사내 변호사들을 아우르는 통솔력, 업무능력, 카리스마. 뭐 하나 빠질 게 없었다. 특히 커리어적인 측면에서 완벽했다. 그러니 기장수 대표의 눈에 쏙 들었겠지. 꼬장꼬장한 이사진들도 홀리고. 어디 이사진뿐일까? 이미 로펌의 절반가량은 입을 모아 류강현을 찬양하고 있었다. 사람 볼 줄 안다는 기장수가 호언장담을 했다. 류강현을 잡으라고. 훗날 그가 로펌의 수장이 된다면 지금보다 더 높고, 더 탄탄한 위치에 오를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의 행보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착실히 쌓여가고 있었다. 관계가 불편해 피하기만 했던 사이일 때도 류강현은 흔들림 없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K 로펌을 지금보다 더 키우겠다는 제 포부를 밝혔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높은 자존감. 류강현은 세나가 되고픈 이상향에 매우 가까운 존재였다. 인정해야 한다. 그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그 역시 저만큼이나 노력해서 원하는 성과를 이뤘다는 것을. 질투심에 눈이 멀어 그가 일궈놓은 성과를 과소평가했다. 또다시 제 과거 행적을 떠올리자 부끄러워 얼굴로 확 열이 몰렸다.

165518526673.jpg‘사과라도 했으니 다행이지. 그것도 안 하고 시건방을 떨었다면, 지나가다 뺨을 후두려 맞아도 할 말 없었겠어.’

일하다 말고 시선을 느낀 강현이 고개를 들었고, 저를 관찰하고 있던 세나와 눈이 마주쳤다.

1655185266731.jpg“뭘 그렇게 봐?”

165518526673.jpg“사람 불러놓고 일만 하니까 쳐다보죠.”

1655185266731.jpg“다 끝났어. 1분만.”

그리고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이내 시선이 떨어졌다. 세나는 매끈하게 각을 세우는 그의 턱선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가 저를 보든 말든 상관없이 입을 열었다.

165518526673.jpg“선배.”

1655185266731.jpg“왜?”

165518526673.jpg“사람들에게서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1655185266731.jpg“그래. 흥미로운 이야기네.”

맞장구를 치는 말과는 다르게, 전혀 흥미롭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서류에 있었고, 손에 들린 볼펜은 움직임을 멈출 줄 몰랐다. 세나는 눈을 새초롬하게 접으며 툴툴거렸다.

165518526673.jpg“자기 이야긴데, 관심 좀 가져주죠?”

1655185266731.jpg“남들이 하는 말 신경 써서 어디다 쓸 건데?”

165518526673.jpg“그냥요. 좋은 말 들으면 기분 좋지 않아요?”

1655185266731.jpg“좋은 말 하다 수틀리면 칼 꽂는 게 사람이야.”

165518526673.jpg“선배는 비관론자군요.”

1655185266731.jpg“현실주의자라고 해두지.”

그는 여전히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고 있는 게 나름 성실했다. 세나는 의식 속에 남아 있던 강현에 관한 안 좋은 이미지 한 줄을 또 하나 삭제했다. 그가 제대로 듣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세나는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

165518526673.jpg“선배 진짜 재수 없는 거 알아요?”

1655185266731.jpg“알아.”

165518526673.jpg“얄밉기도 하고.”

고개를 살짝 흔들며 작게 실소하는 그가 정말로 얄미웠다. 자신의 말 한마디가 그에게 전혀 타격을 줄 수 없다는 사실도 억울했다. 그래도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165518526673.jpg“이건 진심이에요.”

재수 없는 것도 진심. 지금 하려는 말도 진심이다.

165518526673.jpg“근데 하나는 알겠어요.”

1655185266731.jpg“…….”

165518526673.jpg“선배도 저만큼이나 노력했다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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