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어설픈 유혹2021.08.24.
평소의 관심사가 뭔지, 취향이 어떤지, 뭐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을 다짜고짜 상대하기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두 번 다시 볼 사이가 아니라면 아무 얘기나 툭툭 던지다 웃고 치워버리면 그만인데. 거기에 하나 더. 필요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호감을 사야 하는 사람이다 보니 여간 조심스러워지는 게 아니었다. 류강현은 무뚝뚝하기 짝이 없어 말수가 많은 편도 아니었다. 아마도 할 수만 있다면 상대가 불편해하든 말든 종일 아무 말도 안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먼저 밥을 먹자고 해 놓고,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걸 견디지 못한 세나가 한 손을 번쩍 들었다.
“사장님, 여기 소주 한 병만 주세요.”
세나는 초록색 병을 좌우로 흔들어 뚜껑을 딴 후, 잔을 채웠다.
“선배도 드실래요?”
대낮부터 무슨 술이냐, 차는 어찌할 거냐, 하는 허튼소리 대신 그가 빈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세나가 두 손으로 공손히 병을 잡고 강현의 잔을 채웠다. 챙- 술잔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꼴딱,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리도 시원했다. 탁, 테이블 위로 떨어진 술잔에선 단호한 결의마저 엿보였다.
“크으. 소주가 달면 인생이 쓰다고 하던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달죠?”
“오늘따라 더 인생이 쓴가 보지.”
“그럴 리가. 저 오늘 정말 기분이 좋거든요. 모처럼 속도 후련했고.”
“그런 것치곤 메뉴 선정이 잘 못 됐어.”
“왜요? 결혼식에 왔으면 갈비탕 정도는 먹어줘야지.”
“진짜 축하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역시 성격이 나빠. 뒤끝도 있고.”
어차피 가식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면, 솔직함으로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 깔 수 있는 패는 까고, 상대의 반응을 보고. 다시 한번 패를 까 보일지, 아니면 숨길지 결정해야지.
“진짜 성격이 나쁜 사람이 누군데. 선배한테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거든요?”
강현이 픽 웃으며 세나 앞에 놓인 술병을 가져가 그녀의 잔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병을 달라는 세나의 손을 물리고 제 잔을 채웠다. 세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그와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물색했다. 얼마 전 저를 찾아온 정희가 강현을 소개시켜달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선배 정희 알죠?”
“그게 누군데?”
“박정희요. 같은 과 후배. 기억 안 나요?”
쉽게 잊히는 이름이 아닌 터라 세나는 희망을 걸어보았다. 그러나 짙은 눈썹이 설핏 어그러져 처음 듣는 이름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대는 그의 모습에 공통분모 찾기는 실패로 돌아갔다.
“정희는 선배랑 자리 좀 마련해달라고 난리인데, 기억도 못 하면 진짜 속상해하겠네. 국선하는 친구인데, 선배랑 재판에서도 한번 봤다고 하던데요?”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 뒷말을 이었다.
“총학에서 4년 동안 쭉 서기였고. 우리 같이 강의들은 적도 있는데?”
“글쎄.”
공통분모를 찾기 위해 애쓴 보람도 없이 단칼에 끊긴다. 학교를 다니면서 누구 하나 제대로 사귄 적이 없는 강현에게서 함께 아는 사람을 찾는 게 이렇게 막막한 일인 줄 몰랐다. 막막할수록 술잔을 들이키는 속도가 빨라졌다.
“선배 학교 다니면서 뭐 했어요? 학과 행사엔 코빼기도 안 비췄잖아요.”
“강의 듣고, 과제하고, 시험 치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어, 난.”
“무슨 재미로 다녔대?”
“기억할만한 추억이 없을 뿐이지, 재미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
그에게 재미있었던 일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학교를 다니며 굵직굵직한 사건들도 몇 있었고, 한 학기 내내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소문들도 많았다. 그중에 강현이 기억하는 게 과연 있을까 싶었다.
“선배 제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
“그 사건은 알아요? 왜 체육대회 끝나고 어디 과였지. 암튼 웬 미친놈이 술에 취해 학교 정문에 있는 말 동상에 올라타 신나게 허리 흔들었던 거.”
“아, 바지 홀딱 벗고 반나체로?”
“그건 기억하네요.”
“그걸 어떻게 잊어. 내가 학교 다니면서 겪은 충격적인 사건 중 두 번짼데.”
“……첫 번째는 뭔데요?”
왜인지,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을 뒤로하고 기어이 묻고 말았다. ‘인간이 죽는 수많은 이유 중 호기심이 꽤 높은 퍼센트를 차지한다.’라는 다니엘 클라인 교수의 명언이 떠올랐다. 강현은 세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얕게 젓더니 잔을 들어 비스듬하게 솟은 입꼬리를 감췄다.
“콧대 높은 도도한 여자가 코 찔찔 흘리며 고백한 사건?”
세나의 머리통이 갈비탕 그릇을 비켜나 테이블 위로 쿵 떨어졌다. 소주잔을 쥔 손도 부들부들 떨렸다. 긴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귓등이 어느새 붉어져 열기를 더했다. ‘후아후아-’ 라마즈 호흡법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린 후 고개를 들었다. 그가 악의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알기에 날을 세우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때론 서로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주고받으면서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언제까지 그걸로 놀릴 거예요??”
“놀리는 건지 용케 알아들었네. 화낼 줄 알았는데.”
“제가 선배랑 친해지려고 애쓰는 거 안 보여요?”
“보여. 그래서 어울려주고 있잖아?”
“그럼 이제 그만 그 사건은 기억에서 좀 지우죠? 그래야 우리 관계가 발전할 것 같은데?”
“흠……. 난 그 사건 덕분에 너한테 관심을 가진 건데.”
“도대체 왜요? 그 찌질하고, 구질구질했던 모습에 관심이 왜 가? 선배 취향이 그런 쪽이에요?? 변태야?”
“그것보다 남자 보는 눈이 없구나. 해서.”
“그건 또 무슨 말이래? 제가 남자 보는 눈이 왜 없어요?”
“오늘만 해도 말이야. 별거 없는 여자랑 바람이나 핀 놈을 사귀었다고 하니까 하는 소리야.”
“그전에 성민 선배는 법학과에서 인기 탑이었다구요!”
“넌 그날 그 자리에 내가 있었던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해.”
물론 그건 맞는 말이었다. 사귀는 여자랑 유학 가는 남자에게 대뜸 고백이라니. 강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남은 학기 내내 학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소문의 주인공이 될 뻔했다.
“뭐, 그동안 오해해서 죄송해요. 다른 사람한테 소문 안 낸 것도 감사하구요. 근데 어차피 선배는 말할 친구도 없었잖아요?”
“맞아. 나 친구 없어.”
“뭘 또 그렇게 쿨하게 인정해. 선배가 그렇게 나오니 내가 너무 못된 사람 같잖아요.”
“그럼 네가 종종 놀아주든가.”
“선배는 상대하기 좀 벅찬데, 친구비 줄 거예요?”
“청구해.”
“얼마 줄 건데요? 최저시급? 저 잘나가는 변호사라 좀 비싼 거 알죠?”
“터무니없는 가격이면 법적으로 대응해 볼 용의는 있어. 친구비를 받는 게 불법인지 합법인지.”
“아. 고소당하면 선배를 고용해야겠다. 검사 출신이니까, 전관예우 가능한가요?”
“…….”
막힘없이 술술 받아치던 강현이 허를 찔린 듯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잠시 뒤 강현이 먼저 그녀의 앞으로 잔을 들었다. 세나 역시 술잔을 짠, 맞대더니 입술을 삐죽거리며 할 말 있으면 더 해보시죠, 하고 맞수를 놓았다.
“많이 컸네. 기세나.”
“와. 내가 드디어 십 년 만에 선배를 이긴 거예요? 봐봐! 내가 오늘 상태가 좋다고 했잖아요!”
술잔을 비우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동시에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선배랑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 기대 안 했는데.”
“…….”
“이제라도 오해가 풀려서 다행인 것 같아요. 제가 선배한테 좀 못난 짓도 많이 했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앞으로 잘 부탁해요.”
어색함을 이겨내려 급하게 술을 먹기도 했지만, 원래 소주를 잘 마시지 못하는 세나는 단시간에 알딸딸할 만큼 취해버렸다. 강현은 대리기사를 부른 후 비틀거리는 세나를 부축해 뒷좌석에 태웠다. 그녀는 말갛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 쌕쌕 흐트러진 호흡을 뱉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차 문을 닫기 위해 몸을 뒤로 물리려는데 덜컥, 넥타이가 잡혀 안으로 확 당겨졌다. 놀란 강현이 세나를 사이에 두고 얼른 손을 뻗어 휘청이는 몸을 겨우 지지했다. 넥타이를 끌어당긴 세나는 코앞에 강현을 두고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쏟아지는 달콤한 숨과 알싸한 알코올 향이 강현의 코끝을 간질인다.
“한잔 더, 하고 싶은데, 오늘 내가 처음으로, 선배를 이긴 날인데, 축배를 들어야 하는데.”
“…….”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데, 집에 가기 싫은데,”
“…….”
“선배, 나랑 같이 가자, 딱 한 잔만 더해요. 우리 집 가서.”
“기세나. 술에 취해서 아무 남자한테나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아무한테나, 아무가, 선배는, 아무가 아닌데,”
“오늘 많이 마셨으니까 이쯤하고 들어가.”
“……헤어지기…… 아쉬워서, 그렇지…….”
“미치겠네.”
술에 취해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지만, 살짝 풀린 혀로 아쉽다고 칭얼대는 그녀에게 순간 마음이 동할 뻔했다. 강현은 세나의 손에 꽉 붙들린 넥타이를 빼내지 못하고 아예 풀어버렸다. 그녀의 손에 넥타이만 덩그러니 내버려 두고 서둘러 차 밖으로 몸을 물렸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차 문을 닫았다. 쿵 닫힌 문에 그녀의 머리가 기대듯 내려앉았다. 강현은 차체에 등을 기대고 더운 숨을 내쉬었다. 코트 주머니 속에 덜그럭거리는 담배가 손끝에 걸렸다.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한 대 피워볼까 하다, 이 상태에 담배 연기까지 마시면 머리가 팽글 돌 것 같았다.
“하아…….”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턱을 쓸어내리는 손바닥 사이로 얼굴에 오른 열감이 느껴졌다. 누가 더 술에 취한 건지. 한 잔 더 하자는 그녀의 제안이 다른 의미로 들릴 만큼. 어쩌면 지금 취한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먼저 도착한 대리기사가 세나의 차를 운전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강현은 그녀를 태운 차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보고 서 있다, 식당에 도착한 다른 대리기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차주를 두 번이나 찾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차로 돌아와 뒷좌석에 몸을 기대자 허탈한 웃음이 샜다. 그녀의 어설픈 유혹에 이토록 흔들린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강현은 한쪽 팔로 피곤한 눈가를 가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하. 기세나, 진짜 많이 컸네…….”
*** 가사 전담센터 오픈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회사에서 팀을 위해 내준 전용 회의실에 여섯 명의 팀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중에는 세나를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한여진 변호사도 포함돼있었다. 각자가 맡고 있던 사건을 공유하고, 앞으로 맡게 될 사건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한여진은 팀장을 맡은 세나를 의식하면서도, 이 팀으로 일궈낼 성과를 꽤 기대하는 눈치였다. 만약 기세나가 먼저 치고 올라간다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주어질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류 변호사님이 우리 팀 형사 자문을 맡았다고 했지?”
세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한여진의 질문이 곧 다른 사람을 향했다.
“박 변이 형사전문 아냐?”
형사소송전문의 박종찬 변호사였다.
“전 5년 차 시니어도 막 달았는데요. 굵직한 사건을 맡은 적도 몇 번 없고.”
박종찬이 제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었다.
“검사 경력 9년 차면 걸어 다니는 법전일걸요? 저는 명함도 못 내밀어요.”
“아니 가사 전담에서 살인사건이 날 거야 뭐야. 큰 사건이 뭐가 있겠어.”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이 팀에 합류한 이상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가 주먹을 불끈 앞으로 내밀며 제 포부를 당당히 밝혔다. 그를 필두로 앳된 얼굴의 주니어 변호사 세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뼉을 쳤다.
“열심히 하겠다는 포부는 좋은데.”
돌연 문 근처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회의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류강현이 안에 있는 사람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단언컨대 기세나였다.
“이겨야 변호사죠. 안 그렇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