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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친절한 세나 씨 (15/120)

15화. 친절한 세나 씨2021.08.21.

16551852237506.jpg“뭐라구요?”

16551852237511.jpg“걱정해준 건 고마운데, 노는 물 정도는 내가 고를 수 있거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강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까만 눈동자가 마치 세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서컹, 서컹, 서컹, 서컹. 그의 무자비한 칼질 아래 두툼한 스테이크가 난도질 되고, 육즙이 아닌 새빨간 핏물이 접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16551852237506.jpg“흐어어어억!!!”

세나가 헛숨을 들이키며 튕기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아하아, 가쁜 숨을 내쉬며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악몽이라도 꾼 듯 목덜미를 따라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핏물이 가득한 고깃덩어리가 강현의 입속으로 들어가, 질겅질겅 씹혔다. 세나는 마치 자신이 그의 입속에 든 고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꿈치고는 너무 생생해 온몸에 소름이 쫘악 끼쳤다. *** L 웨딩홀 주차장으로 새빨간 스포츠카가 빠른 속도로 들어와 빈 공간을 발견했다. 앞으로 확 쏠리듯 멈춰 세운 차량이 곧바로 후진해 정확히 한 번에 파킹 라인에 들어갔다. 주차요원은 차주의 환상적인 주차 실력에 저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쾅- 하고 차 문이 닫히는 소리에 차 주인을 확인한 주차요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새카만 선글라스에 종아리를 덮는 새카만 H라인 원피스, 그리고 새빨간 립스틱. 온통 새카맣게 치장한 여자가 검정 하이힐을 신고 자신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만으로 몸이 흠칫 떨렸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누가 한 명 죽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살벌했다. 문제는 이곳이 장례식장이 아니라, 예식장이라는 게 문제였다.

16551852237506.jpg“하. 영악하네. 요즘 어린애들 하는 짓이.”

세나의 손엔 이틀 전 특급우편으로 받은 청첩장이 들려 있었다. ‘아름다운 계절, 하나가 되는 날을 축하해주세요.’라는 판에 박힌 문구가 적혀 있는. 생소한 이름에 누군지도 모르고 받았는데, 열어보니 가관이었다. 얼굴의 특징을 살린 캐리커처가 떡하니 박혀 설마 하고 속지를 펼쳐 보니 아니나 다를까, 한 달 전 헤어진 놈의 결혼 청첩장이었다. 이 청첩장을 놈이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짓을 할 정도로 간땡이가 큰 놈이 아니었으니까. 이 앙큼한 짓거리를 한 사람은 바로 그놈의 어린 신부였다. 헤어진 후로 전혀 기억에도 안 남은 놈인데, 이런 짓거리까지 하며 신경을 긁어주니 맞짱 한번 뜨자는 도전은 받아줘야 인지상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하던 차인데 잘됐다. 나 기세나,

16551852237506.jpg“자고로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말아야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는 옛말이란다, 아가야. 요즘같이 치열한 인생의 전쟁터에선 똥밭에서 뒹구냐, 가시밭에서 뒹구냐 차이지.”

손톱까지 새카맣게 칠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칠하지 못한 게 한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 틈에서 머저리 같은 웃음을 흘리며 축하를 받고 있는 놈에게로 직행했다.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하이힐 소리에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다, 워낙 흉흉한 기세에 모세의 기적처럼 사람들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때 빼고 광낸 놈 앞에 도착한 세나는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끌어올리며 활짝 웃었다. 턱시도를 입은 남자의 동공이 풍랑에 이는 마지막 잎새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16551852237506.jpg“표정 가관이네.”

16551852237539.jpg“여……, 여기 어떻게.”

16551852237506.jpg“너 잘살라고 축하해주러 왔는데, 내가 못 올 곳 왔니? 초대장까지 받았는데.”

16551852237539.jpg“아니……, 세나야…….”

16551852237506.jpg“여기 예식장, 밥 맛없는데. 급하게 식을 올리느라 장소가 마땅치 않았나 봐?”

16551852237539.jpg“…….”

16551852237506.jpg“축의금은 여태까지 너한테 사준 거로 퉁쳐도 되지? 맛없는 밥 돈 주고 먹기 그렇잖아?”

놈이 막아설 새도 없이 홱 몸을 돌려 예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찾는 움직임엔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녀는 중앙에 있는 무대가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예식이 시작하기 전 지루해 할 하객들을 위해, 한쪽 벽면에 내려진 스크린에서 그들의 연애사를 담은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하루 이틀 만나던 사이가 아니었다. 언제부터 바람을 피웠는지 이제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썸이라는 애매한 관계는 아마 더 오래전부터였겠지. 어차피 끝난 인연, 영상 속의 그들이 행복하든 말든 상관도 없고 마음조차 아프지 않았다. 세나에겐 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녀의 주변으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일단 세나를 만나고부터 안절부절못하는 신랑의 꼴이 우스웠고, 이렇게 청첩장까지 보내놓고 신부대기실에서 저의 예쁨을 뽐내고 있는 그녀가 제 모습을 보고 어떤 표정을 보일지 기대가 되었다. 설마 진짜 올까, 했겠지. 그런데 진짜 왔지. 예식을 끝까지 지켜보고 사진 촬영까지 기꺼이 해줄 생각이었다. 생애 한번 찍을까 말까 한 예식 사진에 얼굴을 남겨주는 전 여친이 어디 있을까? 나중에 얼굴을 칼로 파내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내 속이 후련하면 장땡이지. 기세나가 어떤 성격인지도 모르고 시비를 걸어온 어린 신부는 오늘 일을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이참에 비싼 돈 주고 간 신혼여행지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것도 나쁘지 않고.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해프닝. 세나는 기어코 신부 친구들과의 사진과 신랑 친구들과의 사진 그리고 단체 사진에도 제 얼굴을 당당히 박아넣었다. 어차피 미친 짓 하는 거 마지막으로 하나 더. 신부가 부케를 던지려는 찰나, 세나는 공중에서 그것을 낚아채 바닥에 내팽개쳐버렸다. 퍽 소리와 함께 수십만 원짜리 부케가 너덜너덜해졌다.

16551852237506.jpg“어린 신부님. 앞으로 덤빌 땐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파악하고 덤벼. 천지 분간 못 하는 너에게 이 언니가 한 수 가르쳐주러 직접 온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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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 근래에 있었던 일 중 가장 속이 후련하고 짜릿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쓸려 내려간다는 말을 몸소 실감했다. 사람들이 저를 미친년으로 생각하든 말든, 어차피 두 번 다시 볼 사람들도 아니었다. 세나는 펑펑 주저앉아 우는 어린 신부와 망연자실 넋을 잃은 전 남친을 뒤로하고 아침부터 미용실을 들러 정성스럽게 컬을 넣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새하얀 꽃길로 꾸며진 버진로드를 짓이기듯이 밟으며 퇴장했다. 예식장의 노래는 뚝 끊겼고,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앙칼진 울음소리만이 홀을 가득 메웠다. 세나는 패션쇼 모델 부럽지 않은 자세와 도도한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얼른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저를 태우고 주차장으로 데려다주었으면 했다. 혼자 남은 차 안에서 눈가가 짓무를 만큼 박장대소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있는데,

16551852237511.jpg“성격이 안 좋아.”

등 뒤로 다가온 누군가가 툭-, 떨어지듯 귓가에 속삭였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퍽 귀에 익었다. 기름칠이 필요한 로봇처럼 끼긱끼긱 목이 돌아가고, 기어이 목소리의 주인공과 눈이 마주쳤다.

16551852237511.jpg“친절한 세나 씨는 주말엔 쉬는 건가?”

이제는 정말 익숙해질 만도 한데. 좋은 사람인 척, 고상한 척 낯에 두르고 있는 가면을 벗어젖힐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한 남자.

16551852237506.jpg“……선배가 왜 또 여깄어요?”

차림새로 보건대, 류강현 역시 이 웨딩홀의 하객으로 온 듯한 깔끔한 슈트 차림이었다. 강현이 참석하려던 예식은 세나가 깽판을 친 예식 바로 다음 순서였다. 시간 관계상 축의금만 전달하고 떠나려 했는데, 어수선한 홀 분위기에 상황을 살피다 때마침 부케를 바닥에 패대기치는 세나를 목격했다. 몇백 명의 하객의 시선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제 할 말을 하고 돌아서는 세나를 보며 강현은 또 웃고 말았다. 이쯤 하니 그녀의 대담함이 아쉽기도 했다. 이혼 전문이 아니라 형사 전문이었다면, 검사들이 학을 뗐을 법한 승부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차라리, 변호사가 아니라 형사부 검사도 잘 어울릴 것 같다. 아무도 타지 않는 엘리베이터에는 기세나, 류강현 단둘만이 타고 지하 주차장을 향해 내려갔다. 1.5평 남짓한 작은 상자에는 적막이 가득했다. 세나는 왜인지 모르게 옛 노래가 떠올랐다. ‘그대- 앞에서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조금 전까지 의기양양했던 모습은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고 초조한 긴장감에 의식이 널을 뛰었다. 왜 하필. 또. 제 옆에서 서서 아무 말이 없는 남자가 도대체 저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거 이대로 놔둬도 될까, 이성적 매력을 어필해도 될까 말까 한 사이인데 더러운 제 성질머리를 고스란히 목격했을 줄이야. 남의 결혼식 깽판이나 치는 여자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차라리 눈물이나 줄줄 흘리며 처연한 모습을 보였다면 남자의 보호 본능을 끌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젠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나, 수습이 불가능해 보였다. 마땅히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한 세나가 층수가 바뀌는 계기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 ‘전에 만나던 사람?’하고 강현이 먼저 말을 걸었다.

16551852237506.jpg“오늘 우리 못 본 척하는 건 무린가요?”

16551852237511.jpg“원한다면.”

그 꼴을 봤는데 어떻게 못 본 척을 하겠냐마는, 흔쾌히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그의 말에 세나는 잔뜩 웅크리고 있던 어깨의 힘을 풀었다. 어차피 이미지를 망친 건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 끗 차이인데,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16551852237506.jpg“바람나서 헤어졌는데, 보다시피. 그 여자랑 결혼까지 하네요.”

16551852237511.jpg“의외네. 신경도 안 쓸 줄 알았는데.”

16551852237506.jpg“신경도 안 썼죠. 관심도 없었고.”

16551852237511.jpg“상대 쪽에서 먼저 건드렸나 보군.”

비웃거나 아니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냐’는 말이나 들을 줄 알았는데, 담백한 한마디에 구차한 변명을 떠올리던 세나가 입을 다물었다. 류강현은 가끔 제가 꼭 듣고 싶은 말을 하곤 했다. 무슨 생각을 하나 싶어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그의 표정을 살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세나의 새로운 행동에 놀라거나 실망한 내색을 비췄을 텐데, 강현은 시종일관 무감한 표정이었다. 아, 관심이 아예 없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건가? 그건 그거대로 문제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 엘리베이터는 지하 3층 주차장에 다다랐다. 문이 열리고 강현이 먼저 내렸다. 뒤따라 내린 세나는 자신들의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갈 때까지 강현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창한 날씨의 주말. 그리고 예기치 못한 만남. 어쩌면 그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 볼 기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걸어오는 싸움은 마다하지 않는 저였다. 하물며 적의도 없는 강현을 겁낼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그에 대해 뭔가 알고 싶다면 오늘이 적기였다.

16551852237511.jpg“그럼.”

먼저 인사를 한 것은 강현이었다. 얼떨결에 꾸벅 인사를 한 세나는 망설임 끝에 차에 타기 직전 강현을 불렀다.

16551852237506.jpg“선배, 식사하셨어요?”

세나가 있는 쪽으로 뒤를 돌아보던 강현은 대답 대신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16551852237506.jpg“저랑 밥 먹으러 갈래요?”

강현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아졌다. 저만 보면 피하려고 안달인 그녀가 먼저 밥을 먹자고 제안하다니, 뜻밖이었다. 선뜻 대답하기에 앞서 시간을 확인했다. 예정된 스케줄과 기세나와의 식사. 마음속 저울이 팽팽하게 대칭을 이루다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16551852237511.jpg“주소. 문자로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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