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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놀아 줘? (14/120)

14화. 놀아 줘?2021.08.17.

16551852083165.jpg“…….”

1655185208317.jpg“……저 혼자 열폭한 거였어요. 그리고…… 기회 만들어주신 거 감사해요.”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지만, 확실히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하니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세나는 삐걱 돌아가는 의자 소리를 듣고 허리를 숙여 제대로 사과를 전했다.

16551852083165.jpg“기세나.”

1655185208317.jpg“네.”

16551852083165.jpg“앞으로 잘 부탁해.”

세나는 고민 끝에 처음으로 사과를 했다. 그리고 류강현은 못나게 굴었던 저를 잊은 것처럼 그것을 담백하게 받아주었다. 한 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는 걸음까지, 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몇 발을 더 내디뎌야 그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 또 다른 고민에 잠긴다.

16551852083165.jpg“왜, 뭐 또 할 말 남았어?”

별로 궁금한 건 아닌데. 앞으로 그와 대화를 하려면 필요한 부분이 있긴 있었다. 그의 일정을 관리해줄 사람이 없으면 매번 이렇게 직접 연락하거나 찾아와야 할 테니까.

1655185208317.jpg“그…… 법률비서는 안 뽑을 거예요?”

16551852083165.jpg“원하는 사람이 있어서 기다리는 중이야.”

강현은 보고 있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대답했다. 덕분에 세나는 한결 편해진 기분으로 질문을 던졌다.

1655185208317.jpg“누군데요?”

16551852083165.jpg“검사 시절 같이 일했던 계장님.”

1655185208317.jpg“아, 그럼 수사관 출신?”

16551852083165.jpg“그래.”

1655185208317.jpg“철밥통 내려놓게 하려면 연봉 많이 주셔야겠네요.”

16551852083165.jpg“안 그래도 협의 중인데, 철밥통 때려치우기가 쉽지 않지.”

1655185208317.jpg“얼마나 같이 일했는데요?”

16551852083165.jpg“2년.”

1655185208317.jpg“고작 2년?”

16551852083165.jpg“다른 사람 파트너로 본 것까지 합치면 6년.”

1655185208317.jpg“그래서 언제쯤 오시는데요?”

16551852083165.jpg“…….”

대답하려다 말고 말을 멈춘 류강현이 눈만 들어 세나를 쳐다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칠 때면 늘 이렇게 한 번씩 숨이 멎는다. 통찰력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뭔가를 노리고 있다고 해야 할지. 꼭 몸 어딘가가 날카로운 것에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1655185208317.jpg“……왜 그렇게 봐요? 내가 못 물어볼 거 물었나?”

강현이 책상에 기대고 있던 팔을 떼고 의자에 느슨하게 몸을 기댔다. 그와 맞댄 시선에 세나는 올가미에 묶인 듯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16551852083165.jpg“놀아 줘?”

그런데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세나는 아뜩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되물었다,

1655185208317.jpg“뭐, 뭐라고요?”

16551852083165.jpg“지금 심심해서 놀아달라고 쓸데없는 질문이나 하고 있는 거 아니야?”

1655185208317.jpg“누가요? 제가요??”

16551852083165.jpg“얼굴 한번 보기 힘드신 후배님이 모처럼 놀아달라는데 이깟 일이 중요하겠어?”

1655185208317.jpg“뭐라는 거야 정말…….”

세나가 당황해서 낯을 붉히자 그가 옅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입가에 번진 웃음이 은근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16551852083165.jpg“뭐 하고 놀아 줄까? 기세나.”

1655185208317.jpg“저 바쁜 사람이에요!”

순간 또 울컥 마음속에서 뭔가가 치밀었다.

16551852083165.jpg“차나 한잔할까?”

1655185208317.jpg“아뇨. 대표님이랑 선약 있어요.”

16551852083165.jpg“…….”

1655185208317.jpg“진짜예요.”

16551852083165.jpg“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1655185208317.jpg“가 볼게요.”

휙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왔다. 문을 닫기 전 슬쩍 뒤를 돌아봤는데, 강현은 어느새 다시 노트북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턱을 반쯤 가린 손바닥 사이로 비스듬히 올라선 입꼬리가 인상적이었다.

1655185208317.jpg‘열등감은 내 문제지만, 성격은 또 다른 문제지. 안 맞아. 절대 안 맞아.’

진 것 같은 게 아니라 누가 봐도 명백한 기세나의 패배였다.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지. 왜 저 남자는 저렇게 여유로운 건지. 도대체 그 비결은 또 뭔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그리고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마음 한구석이 따끔따끔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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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회를 잡은 김에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일을 성사시키고 싶었다. 그 덕에 세나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제일 처음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자신의 아버지인 기장수 대표와의 면담이었다. 리스트업을 한 인원들은 새롭게 오픈하는 가사센터로 이동하기 전에 자신이 맡고 있었던 사건들을 처리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세나 또한 수임한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김 비서의 안내를 받아 대표실 안으로 들어서자, 기장수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상석에 떡 하니 앉아 건장한 풍채를 뽐내고 있었다. 그의 앞 테이블 위엔 계약서로 보이는 서류가 놓여있었다. 류강현이 K 로펌에 온 지 한 달 남짓. 많은 일이 순식간에 몰아닥쳤고, 그 사건들의 중심에는 제 아버지 기장수가 있었기에 그를 마주함에 있어 썩 달갑지 않았다. 그래도 고마운 건 있었다.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을 제공해 준 것. 그를 향한 열등감을 쉬이 떨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뭐가 문제인지는 알게 됐으니까. 세나가 앉지도 않고 저를 노려보고 있자, 기장수가 목을 큼큼 다듬으며 김정한에게 차를 부탁했다.

16551852129974.jpg“왔으면 앉고, 그거부터 읽어.”

11cm의 하이힐이 날을 세우며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눈높이가 반 계단쯤 높아지기까지 이를 악물고 달려왔다. 그리고 그 노력이 빛을 발해야 할 때가 지금이라는 걸 알았다. 세나는 자리에 앉아 그가 미리 작성해 놓은 계약서를 빠르게 읽었다. 여타 계약서와 다름이 없었다. ‘본 계약서는 ‘갑’이 정한 남자와 ‘을’의 만남이 성사됐을 시 유효하다. 갑이 정한 남자 이하‘R’이라 칭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계약서였다. 여기서 갑(甲)은 기장수, 을(乙)은 기세나였다.

1655185208317.jpg“이렇게까지 해야 해?”

16551852129974.jpg“내가 널 몰라?”

1655185208317.jpg“…….”

기장수의 일침에 세나는 입술을 질끈 씹으며 도로 시선을 내렸다. [계약의 목적은 남녀관계에 있고 그 관계는 연인을 뜻한다. 제1조 갑과 을이 파트너 쉽을 체결하기에 앞서 을은 “R”과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을 유지한다. 제2조 만남에 대한 정의는 정기적인 보고를 통해 ‘갑’이 확인한다.] 그리고 그 밑으로 계약해지 및 손해배상에 관련 조항들이 주르륵 적혀있었다.

1655185208317.jpg“손해?? 손해가 왜 발생해요?”

16551852129974.jpg“왜 없어? 센터 오픈하면 회의실도 따로 내줘, 팀장인 네 방도 2층에 따로 내줘, 그 팀원들에게 나가는 성과보수며, 뭐며, 다 다른 업계보다 최고로 대우해주는데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그게 다 손해지!”

1655185208317.jpg“변호사가 아니라 회계사세요?”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센터는 분명 K 로펌에 도움이 될 텐데, 손해를 운운하며 세나의 꼼수를 미리 차단하려는 속셈이 틀림없었다.

1655185208317.jpg“만약에 내가 1년, 아니 6개월, 아니지 3개월 만에 R을 꼬시면요?”

16551852129974.jpg“3개월 만에 만났다가 너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고 없던 일로 하시겠다?”

1655185208317.jpg‘아이 씨.’

세나는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

1655185208317.jpg“……아니, 양아치도 아니고, 그건 아니지만. 남녀관계가 다 그렇듯 좋다고 만났다가 싫다고 헤어질 수도 있으니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남녀 사이에도 만약이란 게 있다. 아무리 좋아 죽어도 맨날 좋을 수는 없고,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가 머리채 쥐 뜯으며 헤어지기도 하는 게 남녀관계다. 그건 이혼변호사인 세나가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매일 이혼하는 여자이니까. 불쌍한 척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폭 내쉬자, 기장수가 어림도 없다, 콧방귀를 뀌었다.

16551852129974.jpg“네가 지금 착각하는 게 있어.”

1655185208317.jpg“무슨 착각?”

16551852129974.jpg“난 류 변호사를 네 남편감으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야.”

1655185208317.jpg“그럼??”

16551852129974.jpg“네가 앞으로 K 로펌의 대표가 됐을 때, 같은 대표의 자리에서 네 옆에 있을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다.”

1655185208317.jpg“무슨……!”

16551852129974.jpg“K 로펌이 아니라 K&R 로펌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알겠냐?”

세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장수를 쳐다보았다. 입은 툭 벌어져 앓는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기장수는 그런 제 딸을 아버지가 아닌 대표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실력이나, 영업력이나. 사내 변호사들 사이에서 그를 인정하는 목소리며, 류강현에 대한 보고를 이미 수 차례 받았다.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파트너 변호사로서의 실적은 이미 로펌 매출의 30%를 넘었고, 류강현의 스카우트에 열을 올린 이사진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더욱 확신하며 그가 대표 변호사 자리까지도 갈 인물이라 입을 모았다. 모르긴 몰라도, 검사 일을 그만두면서 이를 갈았던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클라이언트들이 돈을 싸 들고 달려오진 않을 테니. 나중을 생각했을 때, 세나와 강현을 엮어두지 않으면 대표 자리는커녕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될 게 분명했다.

16551852129974.jpg“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없던 거로 해도 돼. 그냥 그렇게 있다가,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이나 가면 그만이지.”

저를 은근히 자극해 일을 진행하려는 말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그어진다.

1655185208317.jpg“한다구요. 누가 안 한대?!”

세나가 계약서를 낚아채듯 손에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1655185208317.jpg“계약서 다시 쓸 거예요. 너무 일방적이니까. 그리고 여기에 추가로 대표님이 가지고 있는 K로펌 지분, 일부 양도하는 것도 넣을 거예요. 그렇게 걱정해주는 내 입지, 더욱 탄탄하게 하려면 필요한 거니까!”

  *** 계약서를 두고두고 고민하던 세나는 그날 밤 꿈까지 꾸었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고급레스토랑에서 드레스를 쫙 빼입고, 한 손에는 붉은 빛깔 와인이 담긴 잔을 들고 있었다. 빙글빙글 손가락 사이에서 돌아가는 와인이 찰랑찰랑 어여쁜 소리를 낸다. 세나는 고상한 표정을 하고서 자신의 앞에 앉은 남자를 요염한 눈길로 훑었다. 하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커다란 손과 그 손목을 장식하는 명품시계에 눈이 갔다. 각각의 커다란 손에는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은식기가 들려있었다. 몸뚱이가 늘씬하게 잘빠져 끝이 뾰족한 나이프와 그의 손에 비해 조금은 작아 보이는 메인 디쉬용 포크. 조금 더 시선을 끌어올리자, 세련된 컬러의 핏 좋은 슈트와 떡 벌어져 다부진 어깨, 곧게 뻗은 목선이 보였다. 음식을 삼킬 때 크게 일렁이는 목울대와 남자다운 턱선을 지녔고, 보기 좋게 다물린 입술과 시원하게 뻗은 눈매가 매력적인 류강현이 앉아있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칼질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류강현이라니. 이상하다고 여길 틈도 없이 세나의 입술이 열리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655185208317.jpg“나랑 계약 하나 해요.”

16551852083165.jpg“무슨 계약?”

  그는 칼질을 하는 손길을 멈추지 않고,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마치 집무실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태도였다.  

1655185208317.jpg“결혼을 전제로 한 계약 연애.”

  칼질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깃덩어리를 썰어댔다.  

1655185208317.jpg“그게 아니라면 나랑 만나는 척이라도 해줘요.”

  꼭 남자를 유혹하는 것 같은 목소리다. 저런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세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1655185208317.jpg“서로한테 도움이 될 만한 계약 같은데?”

16551852083165.jpg“너랑 만나든 만나는 척을 하든 나한테 무슨 이득이지?”

1655185208317.jpg“득이 왜 없어요? K 로펌의 예비 사위라는 타이틀. 꽤 그럴싸하지 않아요?”

16551852083165.jpg“하!”

  그의 잇새로 짤막한 실소가 터졌다. 그는 그녀의 조건이 같잖다는 듯,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16551852083165.jpg“누굴 개천에 사는 용으로 생각하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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