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제가 잘못했어요2021.08.14.
도대체 정말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가 누구 덕을 보고 살아? 그건 또 어디서 퍼진 헛소문인지 기가 찼다. 그렇게 덕을 보고 살았으면, 지금 그와 자신의 사이가 이 지경까지 파탄 났겠냐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국선변호사인 박정희는 검사 시절의 류강현에 대해 줄줄줄 읊으며 그와 자리 좀 마련해 달라 세나를 졸랐다. 근처 식당으로 들어와 밥을 먹는 동안에도 학교 시절 소문이 너무 와전돼 그와 친해지지 못한 게 한이라고 했다. 하도 친구 덕 좀 보자고 은근히 졸라대는 통에,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듣다 못한 세나는 수저를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가 뭐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강현 선배랑 나랑 진짜 안 친해. 로펌에 오는 것도 당일에야 알았어. 대표랑 이사들끼리 알아서 스카우트한 거고. 심지어 나는 그 선배랑 졸업하고 나서 연락한 적도 없어.”
어제도 싸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소 어색해진 분위기에 식당을 나와 커피숍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걸어가는 동안 정희는 자기가 맡은 사건에 대해 말을 하다가,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원제로 돌아왔다.
“근데, 너 진짜 강현 선배한테 그러면 안 돼.”
뭘 그러면 안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충고하듯 말하는 정희의 표정이 자못 진지했다.
“기억 안 나??”
“무슨 기억?”
“너 그때 그거 뭐지? 형법총론 때 무임승차한 사람들 죄다 D 받아서 너 괴롭혔을 때.”
“그것 때문에 나 혼자 얼마나 힘들었는데! 사고 친 강현 선배는 나 몰라라 하지. 선배들은 나한테 일감 몰아주지. 혼자서 아등바등 고생했잖아.”
지금 생각해도 울컥 화가 치미는데, 그걸 어떻게 잊을까. 축제 준비 기간엔 새벽까지 일을 하느라 집에도 못 들어가고 동방에서 밤을 지새우거나, 택시를 타야 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속옷까지 쫄딱 젖도록 홍보지를 붙이러 다녔는데,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래서 류강현을 찾아간 적도 있었다. 되려 한 소리를 들었지만. 그러나 정희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너 때문에 강현 선배가 학생회 간부들한테 지랄지랄했잖아.”
누가, 누구 때문에? 언뜻 그려지지 않는 상황에 세나는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뭐라고?”
마치 어제 일인 양 십 년도 지난 과거를 생생하게 떠올리는지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이 났다.
“무임승차 건은 자기 독단으로 한 거니까 너 건드리지 말라고. 할 말 있으면 자기 찾아오지, 아무것도 모르는 후배는 왜 괴롭히냐고, 한 번만 더 너 괴롭히면 대자보 붙여서라도 공론화시키겠다고 뒤집어엎었잖아?”
정희의 말에 손바닥 뒤집듯 바뀐 분위기가 떠올랐다. 축제 기간 내내 선배들이 세나를 챙겼었다. 저는 그저 그들이 이제라도 미안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근데 그것이 제가 노력한 걸 알아준 줄 알았는데, 뒤에서 류강현이 뒤집어엎은 거였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원래 사람의 기억이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왜곡되고, 자기의 입맛에 따라 편집되곤 한다.
“네가 착각한 거 아냐?”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조곤조곤하게 선배들 후려치는데, 살벌했어. 소리만 안 질렀다 뿐이지, 학회장이 너 괴롭힌 선배들 불러놓고 제발 쪽팔리는 짓 좀 하지 말라고 거의 빌었다 빌었어. 그래서 더 생생하게 기억해.”
“말도 안 돼. 선배가 뭣 때문에.”
세나의 회의적인 반응에 정희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치더니 만지작거리던 스트로우를 내려두고 팔짱을 꼈다.
“얘 봐라? 네가 누구 때문에 학점을 잘 받았는데, 다 류강현 선배 옆에서 보고 듣고 배워서 교수님이 너 예뻐한 거잖아? 그 선배가 너랑 모의법정 토론을 왜 해줘? 솔직히 그거 안 해도 이미 사법시험 2차 합격에, 교수님들 연구과제 도와주는 거로 학점 채우기는 충분한데.”
“그거야 교수님이 매번 나랑 강현 선배를 짝지어주니까 그런 거지. 나는 뭐, 하고 싶어서 했어? 맨날 선배한테 까이느라 있는 자존심 없는 자존심까지 다 털렸는걸?”
“아무리 그 선배가 독설을 내뱉기로 유명했다지만, 그 선배랑 한번 붙고 나면 레벨 업한다는 소리까지 돌았는데. 그 선배가 유독 너랑만 했잖아. 다들 뒤에서 얼마나 질투했는데.”
“…….”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은근 뒤에서 후배들 많이 챙겼어. 팀플 할 때 일부러 조장 맡아서 후배들한테 뭐 준비해야 하는지 상세하게 알려주기도 하고. 그 뭐지, 그 교환학생 간 선배가 너무 눈에 띄어서 그런 거지, 사실 류강현도 꽤 괜찮은 선배였어. 너 정말 몰랐어?”
“몰라……. 처음 듣는 얘기야.”
“막말로 강현 선배가 후배들 중에서 제일 챙긴 게 너야. 이년아.”
“…….”
정말 몰랐다는 듯 눈만 껌뻑껌뻑거리는 세나를 두고 정희가 ‘하아-’ 한숨을 쉬었다.
“넌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했다. 다른 사람들하곤 그렇게 잘 지내놓고.”
정희는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긴 세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남에게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세나지만, 유달리 류강현에겐 살갑지 않은 모습을 종종 목격한 적이 있었다. 친한 사이기 때문에 툴툴거리는 거라고 여겼는데, 지금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친구로서 바른말 한마디는 해줘야 할 듯싶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노력을 해. 솔직히 말해서, 류강현 선배. 검사일 때도 그랬지만, 일하는 스타일이나 배울 점이 되게 많은 사람이야. 네게 득이 되면 득이 되지 손해 볼 거 없잖아? 이제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 점심시간을 끝내고 사무실. 속이 답답하고 명치가 쿡쿡 쑤시는 게 아무래도 체한 것 같았다. 휴게실로 가 비상 상비약이나 찾아볼까 하다 도로 자리에 앉았다. 곧 있을 의뢰인과의 미팅이 몇 분 남지 않았다. 서툰 손길로 책상 위에 놓인 상담일지를 들추다, 그 밑에 두었던 서류뭉치를 바닥으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류강현이 제게 준 가사 전담센터 관련 서류였다. 세나는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허리를 숙여 집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네 가치와 스스로가 생각하는 네 가치는 다른가 보군.’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띵 할 정도로 머릿속을 맴도는 그의 한 마디. 가치. 세나는 자신의 가치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남들의 인정과 선망 어린 눈길에 자꾸만 매달리는 이유. 자신의 존재를 과시함으로써 인정받고, 그 인정이야말로 제 가치를 증명해주는 것만 같았다. 실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저 상대가 가진 것을 부러워할 뿐. 쉽게 얻었다고, 운이 좋았다고, 어떤 노력을 어떻게 했는지는 뒷전이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걸 가진 사람을 손쉽게 비난했다. 세나는 그런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주변에도 숱하게 많았다. 그래서 그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좌절했는지를 더욱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상냥하게 겸양을 떨었다. 피차 알고 싶어 하지 않았고, 알고자 노력도 하지 않을 테니. 하물며 같은 로펌에서 몇 년을 합을 맞춰도 그녀의 성과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은 수두룩했다.
“아…….”
그런 사람들에게 실망도 많이 하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른 누구도 아닌 류강현이 저의 가치를 알아봐 주다니. 세나는 여태껏 류강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어 한 적이 없었다. 처음엔 도망치기 바빴고, 나중엔 부딪히고, 싸우기 바빴다. 게다가 열등감에 눈이 멀어 저 또한 류강현의 노력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네.”
그래놓고 그가 저만 보면 비웃는다고 생각하다니.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있는 저와는 달리 그는 이미 한 발, 아니 두 발은 앞서 있었다. 기세나가 류강현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된 계기는 단순하면서도 꽤 복잡했다. 류강현은 달랐다. 그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기는커녕, 오로지 목표를 위해 전진을 할 뿐이었다. 주변에서 아무리 뭐라고 하더라도, 옳고 그름의 판단은 본인에게 있다는 확고한 의지. 그런 그가 미웠다. 그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하나도 알지 못한 채, 아등바등하는 저와는 달리 앞서나가는 그를 쫓아가는 것조차 버겁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기세나. 너 언제 이렇게 못나졌냐?”
쿨한 여자, 일 잘하는 멋진 전문직 여성이라 매번 스스로를 칭송하던 게 엊그제인데. 실상은 저보다 잘난 사람을 질투하고,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들어와요.”
집무실 문을 두드리기 무섭게 안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세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일부러 더욱 당당한 척 방문을 열었다. 노크의 주인이 세나인 것을 확인한 남자는 쓰고 있던 보호안경을 벗고 눈가를 주물렀다.
“바빠요?”
“조금. 말해.”
“리스트 갖고 왔어요.”
류강현은 대답 대신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어붙인 팔을 테이블을 가로질러 뻗었다. 세나는 쭈뼛대지 않고 곧장 그에게로 걸어갔다. 이 기회를 잡고 싶은 건 누구보다 저였다. 류강현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미워하고 시기하며 이 기회를 저버리긴 싫었다. 욕심이 많다고 손가락질 받을지언정, 잘해 낼 자신도 있었다. 세나는 자신이 건넨 서류를 확인하는 강현을 살폈다. 그는 매서운 눈으로 빠르게 리스트업된 이름들을 훑어내렸다. 혹시 강현이 잘 모르는 인물이 있으면 설명하기 쉽게 따로 프로필 파일도 준비해뒀다. 그러나 그 파일은 펼쳐 보지도 못했다.
“이걸로 만족해?”
“네?”
“이 사람들이면 네 팀이 잘 굴러가겠냐고.”
“아, 그렇게 되도록 제가 잘해야겠죠.”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 테니, 인사발령 준비해.”
너무도 쉽게 허락이 떨어지자, 긴장이 탁 풀렸다.
“잠깐만요, 이렇게 쉽게?”
“또 뭐가 불만이야?”
“아니 불만이 아니라, 선배 정말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요? 거기 적힌 변호사들을 알긴 알아요?”
그도 그럴 것이, 파트너 변호사로 온 지 아직 한 달도 채 되지 않았고, 그를 보좌해줄 비서도 아직 없었다. 자신이 리스트업을 한 변호사들 중에는 류강현보다 늦게 들어온 신입도 있었다. 세나의 물음에 강현은 테이블 한편에 놓인 두툼한 파일철을 턱짓했다. 뭔가 싶어 파일철을 펼쳐 보았다.
“…….”
파일철에는 K 법무법인의 고문 변호사부터 사내외 이사들과 함께, 백여 명이 넘는 변호사들의 프로필과 심지어 법률 보조와 말단 사무직원의 프로필까지 모두 담겨있었다.
“이걸 다 외웠어요??”
“앞으로 더 늘어날 건데, 그걸 못 외운 건 아닐 테고.”
하고 싶은 말이 뭐냐는 표정이었다.
“아니에요.”
업무상 해야 할 말은 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아 볼을 긁적거리고 서 있었다. 그러자 할 말이 남았냐는 듯 강현은 세나에게 적적한 시선을 두었다. 그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지난 과거는 어떨지 몰라도, 바에서 있었던 일은 분명 자신이 잘못한 게 맞으니까.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혀로 살짝 축이며 세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