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시간 낭비2021.08.10.
굳이 따지자면 흥미가 있는 쪽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속내가 읽히는 다채로운 표정들도. 그러나 그녀의 표정이 저에게만 읽힌다는 것도 잘 안다.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하나도 안 고맙거든요?”
바에 온 지 십 분 남짓한 시간 동안 시답잖은 실랑이만 했던 터였다. 세나는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본론에 들어갔다.
“아, 됐고. 그게 뭐가 중요해요, 암튼 할 말이 뭔데요?”
강현이 브리프 케이스에서 파일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요?”
“일단 읽어봐.”
그가 건네는 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지라 세나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파일을 가져가 안의 내용물을 펼쳐 들었다.
“조직도네요?”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읽다 한 부분에서 손이 멎었다. 다른 팀도 아니고 하필.
“가사소송전담팀?”
“그래.”
“이걸 왜 선배가…….”
“대표님이랑 말 다 끝났으니, 너는 그냥 한다고 해.”
“……아버지가 어떤 조건으로 이 팀의 팀장 자리를 제시한 건지 알고 하는 소리예요?”
그가 너무나 태연하게 손안에 든 잔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
“1년 안에 제대로 굴리면 파트너 변호사 자리를 주겠다고 하셨겠지.”
목구멍까지 치고 오르는 답답함에 세나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누구보다 하고 싶었고, 욕심이 났다. 그런데 그 계약의 조건으로 등장하는 남자가 직접 와서 이걸 말할 줄은 몰랐다. 그러다 돌연 전담센터를 만든다는 생각도 그렇고, 류강현이 이렇게 꼼꼼하게 준비된 서류를 건네는 것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선배가 아버지한테 나 여기 팀장 시키라고 했어요? 내가 파트너 변호사 자리 물먹은 게 불쌍해서?”
세나의 예민한 반응에 류강현은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는 식으로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농담 식의 말을 주고받던 분위기가 갑자기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해졌다.
“맞잖아요! 그게 아니면 선배가 왜 내 일을 신경 써요? 이 센터 만들면 뭐가 좋은데요? 파트너 변호사 자리 차지하고 나한테 이깟 한 자리 내주면 내가 좋다고 할 줄 알았어요?”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선배가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내 자리, 내 위치, 내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다구요.”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아니 그전에 네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가 안 가는…”
“선배는 늘 이런 식으로 일해요?! 상대가 어떤 마음인지 생각한 적도 없고, 무조건 밀어붙이고!”
“기세나. 말 함부로 하기 전에 생각부터 하고 말해.”
“무슨 생각을 해요? 아귀가 딱딱 맞는데. 선배하고 아버지가 무슨 거래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이런 식으로 뒤에서 수작을 부릴 줄은 몰랐어.”
그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한 치의 흔들림이 없는 눈동자로 또렷하게 세나를 응시했다.
“대표님은 내 의견을 물었고, 난 제안했어. K 법무법인을 위해서.”
“그리고 승진에 미끄러진 나를 달래줄 겸 말이죠!”
거기에 아버지는 이걸 기회 삼아 결혼하라 조건을 붙인 거고. 하. 정말. 파트너 자리로 뒤통수를 맞은 것보다 더 큰 배신감이 들었다. 세나는 마주쳐 오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그만큼 화가 났다. 안 그래도 자존심이 짓밟혀서 너덜너덜한데, 그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더욱 못마땅해졌다. 지금 당장 기장수 대표에게 전화해 계약이고, 팀장이고, 하지 않겠다 소리치고 싶었다. 류강현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한동안 말없이 세나를 응시했다. 그가 목을 옥죄고 있던 넥타이 매듭을 슬쩍 끌어 내리며 도리어 답답한 듯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술 대신 물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분위기 속에 류강현이 또박또박 힘을 실어 답했다.
“네가 그 자리에 제격이니까, 추천한 거야.”
정확히는 ‘제격’이라는 단어에만 힘을 실었다. 당연히 세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선배가 나에 대해 뭘 알고요?”
“너만큼 이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이 없으니까. 아냐?”
“내 열정을 선배가 뭘 보고 판단해요? 우리가 열정에 대해 논할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세나가 더더욱 못 믿겠다는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세나가 제 분에 못 이겨 화를 내는 동안 강현은 아래턱을 사리물었다. 조금씩 그의 표정에도 금이 갔다.
“나를 팀장의 자리에 올려놓고 꼭두각시처럼 좌지우지하려는 속셈일지 내가 어떻게 알고!”
그녀의 말에 강현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하고 세나의 손에서 서류 파일을 뺏어 들었다. 찢어버릴 듯 종이를 거칠게 넘긴 그가 조직도가 나와 있는 부분을 펼쳐 그녀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나를 못 믿겠으면 이 서류나 잘 봐.”
그가 기다란 검지로 한 곳을 콕 찍어 가리켰다. 팀장 기세나의 밑으로 두 개의 네임 박스가 비어 있었다. 시니어 변호사 자리였다. 그 밑으로 주니어 변호사 자리로 보이는 네임 박스 또한 공란이었다.
“내가 멋대로 팀을 만들 거였으면, 이 자리에 누군가의 이름을 적어놨겠지. 난 그저 민, 형사상 법률 조언을 해주는 사람으로 이 팀에 있는 거야.”
줄기처럼 뻗어 있는 조직도에는 그의 이름이 없었다. 제일 하단에 별첨처럼 그의 이름이 적혀있었을 뿐.
“보다시피 이 팀의 팀장은 너고. 누가 너와 손발을 맞출지는 네가 결정하는 거야. 이 말이 무슨 말인 줄 알겠어?”
“가사 전담팀을 만들라는 거잖아요.”
“그게 아니야. 하나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지. 난 지금 너만의 팀을 만들라고 말하는 거야.”
강현이 세나에게 다시 서류를 넘겨주며 마저 말을 이었다. 피곤의 색이 짙은 목소리에서는 단호함마저 느꼈다.
“평소에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충 알겠는데, 난 내가 본 것만 믿고 아는 것만 말해.”
“…….”
“내가 아는 기세나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누구보다 노력하는 사람이야. 근데 세상엔 노력만으로 안 되는 일도 있어. 운도, 기회도 따라줘야지. 지금이 적기고. 네가 가고 싶은 곳까지 갈 수 있는.”
K 로펌 파트너로서의 책임감일까, 아니면 승진에서 고배를 마신 저에 대한 연민일까. 류강현에게 연민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호의적인 태도는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그와 자신이 어떤 사이인데?
“선배가 왜 날 도와주려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
“제 상식으로는 선배의 의도가 명확하지 않아서 더더욱 그래요.”
“내가 널 도와주려 한다고 생각해?”
“그럼, 아니에요? 선배는 이 팀이 아니라도 충분히 바쁘잖아요. 나도 듣는 귀가 있어요. 지금도 수임을 맡기려는 클라이언트가 줄 섰다던데.”
“내가 K 로펌 파트너 변호사로 온 이상, 그게 내 일이고 내가 알아서 할 문제야. 도움?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근데 그게 뭐가 문젠데?”
날카롭게 휘어진 눈썹과 비난 어린 어투에서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여실하게 느껴졌다. 그가 저를 대할 때면 늘 화를 내던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달랐다. 진짜로 화가 난 류강현의 얼굴은 처음 본다는 것을 세나는 깨달았다. 그는 세나가 기억하는 것과 다르게 훨씬 차갑고, 매서웠다.
“잘 들어. 난 지금 K 로펌의 지분을 가진 파트너로서 우리 로펌이 다른 곳보다 잘 굴러가길 원해. 지금보다 더 키울 자신도 있고. 그게 내가 다른 곳도 아닌 K 로펌을 선택한 이유야. 네가 파트너 변호사에 목을 매는 이유는 뭐야? 단순히 남들보다 높은 직급이야 아니면 네 실력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야?”
“…….”
“그게 뭐든 기회가 왔으면 잡아. 멍청하게 굴지 말고.”
그의 말이 비수가 되어 세나의 가슴에 퍽 꽂혔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 알아? 너무 한심해서 상대해 줄 가치도 없어 보여. 대학 시절 숱하게 봐왔던 그저 그런 놈들처럼.”
화가 난 류강현. 모의법정에서 서로 다른 변론을 두고 서로를 잡아먹을 듯 싸웠을 때도 이렇게까지 날이 선 느낌은 아니었다.
“넌 여태껏 뭘 배운 거지?”
류강현이 신랄하게 저를 몰아붙이는 동안 세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제 손에 들린 서류의 끝이 구겨지도록 힘주어 잡기만 할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생각하는 네 가치와 스스로가 생각하는 네 가치는 다른가 보군.”
“…….”
“그래도 못 믿겠으면 내가 더는 너를 상대로 시간 낭비 할 필요 없지.”
그런 자신에게 실망이라도 한 듯 한껏 낮아진 목소리에 세나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강현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는 세나를 두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바 탑 위에 놓인 계산서와 브리프 케이스를 한 손에 들고 나가려던 그가 돌연 몸을 돌려 세나의 귓가로 고개를 내렸다.
“기세나. 지금 몇 년도야?”
나직하게 떨어진 한 글자 한 글자가 귓바퀴에 새겨진다. 지금 몇 년도냐는 질문은 정말로 올해가 몇 년도인지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었다. 그 질문에 숨은 의도를 파악하자마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정곡을 찔렸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게 아니라면, 십 년도 더 지난 일들에 감정적으로 굴고 있는 건 저 혼자였으니까.
“결정은 네가 하는 거야. 앞으로 네가 책임질 팀이니까.”
머리를 짓누르던 감정이 홀연히 형체를 갖추어 가슴으로 쿵 내려앉았다.
“하겠다는 결심이 서면 월요일까지 팀 꾸려서 내 사무실로 가지고 와.”
그가 떠난 자리에는 아직 다 마시지 못한 술잔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홀로 남겨진 세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얼어붙어 버린 것처럼.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던 건 어떤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왜 그를 보면 자꾸 화가 나는지. 그것은 바로 류강현을 향한 질투와 시기, 열등감이었다. *** 모처럼 사무실로 찾아온 친구 정희와 이른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녀는 같은 과 동문으로 국선변호사가 되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문이 닫히기 직전, 옆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앞을 스쳐 지나는 강현을 보았다. 그러나 세나는 못 본 척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어젯밤 서로 날카롭게 힐난하던 그 일이 여전히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희는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너희 로펌에 류강현이 왜 있어??”
“얼마 전에 파트너 변호사로 왔어.”
“미친! 그 대박 소식을 왜 나한테 말 안 해줬어?! 야 다시 올라가서 인사해야겠다! 미쳤다. 대박이야. 웬열 웬열?”
정희가 다시 15층을 누르려고 하자, 세나가 재빨리 막았다. 인사고 뭐고 당분간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무겁게 짓눌리는 마음이 류강현을 마주한 순간 언제라도 폭발할 듯 세나를 좀먹고 있었다.
“뭘 인사까지. 언제부터 친했다고.”
“하긴. 나랑은 뭐 없지. 너랑은 꽤 친했잖아? 그래서 K 로펌으로 온 거야?”
“뭐? 누가 누구랑 친하다고?”
“뭐래. 아닌 척은.”
정희가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세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슬쩍 밀었다. 어딜 보면 그렇게 보일까, 싶어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쳐다보자,
“얘 좀 봐라. 너 학교 다니면서 류강현 덕 보고 산 거 사람들이 다 아는데 왜 이제 와서 딴소리야?”
하며 정희가 더 어이없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