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도망치려고 머리 굴리지 마2021.08.07.
자리에서 일어난 세나는 마지막으로 책상 옆 스탠드를 끄고 방을 나섰다. 손목시계로 얼핏 확인한 시각은 밤 아홉 시였다. 어딘가 멍한 머리는 여전히 정시연 배우와의 상담 내용에 머물러 있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국민배우가 사실은 게이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위장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흔한 스캔들 하나 없던 국민배우에게 늘 따라붙어 다니는 루머는 바로 ‘게이설’이었다. 남성 스타에게 성소수자임이 들통나는 스캔들만큼 치명적인 건 없었다. 오랜 무명 생활로 이름 한번 알리기 힘겨웠던 여배우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고 싶었던 남배우의 선택. 남편에겐 결혼하기 전부터 만나고 있었던 동갑내기 배우가 있었다. 정시연도 함께 호흡을 맞춘 적 있던. 그 둘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고, 오랜 시간 사랑을 우정이라 억누르며 참아오다 갑자기 불이 붙었다고 했다. 그러나 위장 결혼을 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사랑은 친구이자 연인의 배신으로 무참히 깨졌고, 남편은 한동안 방황을 했다고 했다.
“사실 제가 신경 쓸 필요는 없는 문제였어요. 우리는 동료로서, 서로의 이미지를 위한 협력관계였으니까요. 비밀유지계약서에 사인하고, ‘사랑’을 뺀 ‘결혼’이라는 겉 포장에 충실한 ‘쇼윈도 부부’로.”
쇼윈도 부부였다고 고백하는 연예인 부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계약으로 시작된 관계였을 줄이야.
“저 역시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요. 남편의 사생활을 터치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그날 둘이서 술만 마시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요?”
심적으로 지쳐 있던 남편과 술을 마신 게 화근이었다. 신혼여행을 가서도 치르지 않았던 첫날밤을, 결혼한 지 오 년 만에 치렀다. 한집에 살면서 단 한 번도 같은 침대에 누워보지 않았는데, 함께 술을 마시고 슬픔에 빠진 남편을 위로하다 눈을 떠보니 이미 몸을 섞은 뒤였다. 세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덤덤히 고백하는 정시연을 떠올렸다. 말이 길어질수록 괴로움에 일그러지는 그녀의 얼굴엔 후회와 더불어 상처받은 감정이 묻어났다.
“처음엔 아무렇지 않았어요. 남녀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하룻밤. 술김에 일어난 해프닝 딱 그 정도였죠. 남편의 성 정체성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나쁜 사람이 아니라,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인 것뿐이니까.”
그러나 그날 이후 매일매일 남편을 마주할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고.
“처음엔 그 사람이 나를 안았던 손길이 떠오르고, 나를 바라보던 눈에 담겨있던 감정이 애정이지 않았을까, 우린 어쩌면 진짜 부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희망을 싹틔우고,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을 당시를 설명할 때 아주 조금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를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리기 시작했죠. 계약뿐인 부부지만, 그래도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건 저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그걸로 위안 삼았는데.”
남편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일말의 기대는 휴지 조각이 되었고, 그녀는 절망했다.
“저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남자와 사랑에 빠진 남편이라니. 그리고 그이의 새로운 연인을 향한 질투심에 하루하루가 지옥이 돼버렸어요.”
그녀의 말이 딱 들어맞았다. 지옥. 매일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했다. 그녀의 스토리를 듣는 내내, 세나는 다른 상담자의 말에 추임새처럼 넣던 ‘그랬군요. 마음이 참 많이 아프셨겠어요.’ 하는 흔한 위로의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러게. 저마다 다 각자의 사정이 있지…….”
평소의 기세나에게 상담은 이혼의 유책 사유를 판단하기 위한 정보의 일환일 뿐이었다. 상담자와 라포를 형성하는 건 정신과 의사나 하는 거고, 자신은 변호사로서 이혼 과정에서 필요한 절차를 알려주고, 의뢰인이 원하는 결과를 손에 쥐여주면 끝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자존감마저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순간, 우리 관계는 돌이킬 수 없어진 거죠.’
자존감.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에 대한 존엄성이 타인들의 외적인 인정이나 칭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 내부의 성숙된 사고와 가치에 의해 얻어지는 개인의 의식.
‘사전적 의미의 딱딱한 말을 바꿔 말하면, 너 자신을 사랑하라. 누가 몰라? 쉽지 않으니까 다들 힘들어하는 거지. 그게 쉬웠으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유명해졌을까.’
상담이 끝날 때까지 정시연은 어떤 선택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비밀을 고백한 그녀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어쩌면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일 수도 있고. 결심이 서면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그녀에게 뭐라고 해줄 말이 없어 그냥, 미소만 지었다. 찝찝했다. 화장실에 갔다가 제대로 뒤처리를 못 하고 나온 것처럼. 다른 건 모르겠고, 지금은 딱 아주아주 매운 닭발에 소주를 한잔 걸쳐야 할 기분이었다. 입술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매운맛에 땀을 뻘뻘 흘리며. 물론 포장으로. 머릿속으로 내비게이션을 띄우고 맛집을 검색하던 세나는 바로 옆에 누가 다가와 서는지도 인식하지 못했다.
“지금 퇴근?”
“……네. 수고하셨습니다.”
혼자만의 생각에 몰두하고 있던 세나는 그저 의식적으로 대꾸하며 한남대교 근처의 유명한 맛집으로 가는 길을 떠올렸다. 이 시간에 차는 안 막히겠다 싶어 빙그레 입꼬리가 올라섰다.
“잘됐군. 지금 시간 좀 내.”
“……?”
옆에 누군가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닫고 그게 누구인지 인식하는 순간, 하이힐의 뒷굽이 삐걱 뒤틀렸다.
“엄마야, 깜짝이야!”
“언제까지 나만 보면 깜짝깜짝 놀랄 거야?”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 늦은 시간이라 방심한 사이 그토록 피하고픈 맹견, 류강현을 맞닥뜨렸다.
“선배가 이 시간에 왜 여깄어요? 아직 안 갔어요?”
“시간.”
“네?”
“내가 만들어서라도 내라고 했던 말. 잊었어?”
“어……, 아. 어.”
세나는 벌어진 입을 뻐끔거리며 재빨리 핑곗거리를 떠올렸다. 그러나 닭발에 소주 말고는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기세나.”
저를 내려다보는 류강현의 눈빛은 덫에 걸린 사냥감을 바라보는 사냥꾼처럼 날카로웠다.
“도망치려고 머리 굴리지 마. 중요한 이야기니까.”
***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밥을 먹기엔 체할 것 같고, 카페에서 오순도순 노닥거리긴 힘들 것 같은 상황이었다. 수많은 가게를 물색한 끝에 세나가 그를 데리고 온 곳은 탑으로 되어있는 작은 바였다. 일렬로 나란히 앉은 세나는 강현이 아닌 바텐더 뒤쪽 찬장에 즐비한 술병을 응시했다. 강현은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기를 쓰는 그녀를 보며 얕게 고개를 저었다.
“안 잡아먹을 테니, 긴장 풀어.”
그녀를 오래 보지 않았지만, 몇 가지 아는 것이 있었다. 건드리면 부풀어 오른다. 독을 품은 복어처럼. 다른 건 몰라도 이렇게 자존심을 툭, 하고 건드리면.
“누가 잡아먹는대요?”
거봐. 조금 전까지 눈을 피하고 있었다는 것도 잊은 채 금방 고양이 같은 눈매를 치켜세우고 덤벼들지. 슬그머니 번지려는 웃음기를 무표정한 얼굴 아래 감추며 말을 받아쳤다.
“K 로펌에 온 지 3주. 3주 동안 유일하게 인사를 하지 않은 게 기세나 너 하나야. 신입 어쏘랑도 한 인사를.”
“고작 인사하려고 퇴근하는 사람 붙잡은 거예요?”
“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거야?”
“제가 뭘요?”
“나만 보면 슬금슬금 피하거나 그게 아니면, 꼭 한 대 칠 것처럼 덤벼들고.”
“제가 또 언제 한 대 칠 것처럼 굴었어요?! 그거야 선배한테 이래저래 당한 게 많아서 억울한 마음에 울컥한 거지,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누가 뭐라 그래요?”
강현이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혔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세나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해갔다. 무료하고 따분한 일상에 소소한 재미.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세나를 보고 있으면 류강현은 지루하지 않았다. 서른 살이 훌쩍 넘은 나이에 유치한 말장난을 할 만큼. 물론 상대방은 질색하겠지만. 아니나 다를까 침묵을 견디지 못한 세나가 대뜸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 사건 때문에 이래요?”
“그 사건?”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그때 그건 정말 우발적인 사고 같은 거였어요. 술도 마셨겠다. 심신미약으로 감경을 받을 수 있는,”
“심신미약을 아무 때나 갖다 붙이는군. 이래서 대한민국 법이 개판이란 소릴 듣지.”
강현을 한껏 노려보다 제풀에 지친 세나가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이 성질머리를 참으며 잘도 방긋방긋 웃는다. 물론 저를 보고 웃은 적은 없다. 한 번도. 세나는 그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엇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스스로가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답을 찾지 못했다.
“선배는 제가 아는 선배 중에 제일 별로인 거 알죠?”
“그래도 선배라고 욕은 안 하네. 나름 선배 대접해 주는 건가?”
“선배만 만나면 되는 일 없는 거 알아요?”
“그게 내 탓은 아닐 텐데.”
옆통수가 하도 따끔거려 몸을 비스듬하게 돌렸다. 강현의 시선에 기세나의 빨갛게 물든 귓등이 보였다. 속에서 천불이 나고 답답할 때마다 그녀는 저렇게 귓등을 붉혔다. 옅은 갈색을 띤 눈동자가 한껏 형형하게 류강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묘한 색깔이다. 온순한 색이 분명한데 그 속에 열정이 있었고, 독기도 있었다.
“약 올리려고 시간 만들라던 거야 뭐야, 정말.”
“내가 한가해 보여?”
“피차 바쁜데 문자로 했으면 좀 좋아요?”
“내가 일하는 스타일이 좀 그래. 비대면보다는 대면을 선호하거든. 검사일 때부터. 범죄자 새끼 앞에 앉혀놓고 저 새끼 구라치나 안 치나 보는 재미도 있으니까.”
“그렇게 검사일이 적성에 맞으면 검사 계속하지 왜 때려치웠대요?”
“더러워서 못 해 먹겠더라고.”
“더러워서 발칵 뒤집어엎고 나왔나?”
“나에 대해 뭣 좀 알아냈나 봐?”
순간, 아차 싶었다. 그의 말에 지지 않으려 받아치다 보니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불쑥 튀어나왔다. 검찰 내부에서 입단속을 시키기까지 한 일이라면 여간 불미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아뇨, 하나도 안 궁금한데요?”
“궁금하다고 말하면 알려줄 수도 있는데.”
“하나도 안 궁금하다니까요.”
“여기저기 쥐새끼들이 참 많아. 누구에게 뭘 들었을까?”
좌표를 찍고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세나는 괜히 마음이 뜨끔거려 얼른 고개를 틀었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기가 빨렸다.
“하아, 진짜 왜 하필 엘리베이터 누르는 걸 깜빡해서 마주치길 마주쳐.”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결국 웃음이 비집고 나와 잔을 들고 술을 삼켰다. 대놓고 웃어버리면 분명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버릴 테니까. 류강현이 세나를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와 대화할 시간조차 없을 것 같아 일부러 지켜보고 기다린 거였다.
“어차피 선배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서로 불편한 사이인데. 짧게 끝내죠.”
“안 불편해. 난 오히려 너랑 잘 지냈으면 하는데. 일 때문이라도.”
“선배 저 싫어하잖아요?”
“싫어한 적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