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남편에게 애인이 있어요2021.08.03.
“그냥, 만나면 으르렁대기 바빠요.”
물론 으르렁댄 건 기세나였다. 류강현은 그저 보고 있기만 했다.
“거참, 이상하네. 아무리 생각해도 기 변은 그런 쪽에선 프로잖아요?”
“네??”
“기 변이 누구랑 뭘 못하겠다는 얘길 하는 건 처음이라. 싫은 사람이랑도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잖아요. 근데 왜 그 사람이랑만 그런 건지, 이유가 뭔가요? 단순히 기 변의 약점을 알고 있어서?”
“어, 그건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냥이란 건 없어요.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뭔지 잘 알고 있지만, 설명하기 힘들어서 그렇죠.”
김정한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잠시 제 턱을 쓸어내렸다. 적당히 얘기만 들어주고 끝내려고 했던 티타임이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았다. 그래도 모처럼 저를 찾아온 그녀를 위한 도움을 주기로 했다.
“때론 그 이유가 스스로도 터무니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냥이라는 말 속에 숨기기도 하죠.”
"……."
김정한은 아무런 말 없이 생각에 잠긴 세나를 느긋하게 기다려주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냥’이라는 말 속에 숨겨놓은 이유를 찾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김정한과의 대화 후 세나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제 사무실로 돌아왔다. 터벅 걸음으로 의자에 앉아 머리를 기댔다. 그러게. 싫은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 왜 꼭 그 사람하고만 엮이면 없던 화도 울컥울컥 치솟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와 마주칠 때마다 까슬까슬한 뭔가가 튀어나와 어딘가를 콕콕 쑤셔댔다. 그건 그가 자신의 추태를 목격한 산증인이기 때문이라고만 여겼다. 협박이나 이용했냐는 물음에, 곰곰이 돌이켜 보니. 류강현은 단 한 번도 그 일을 들먹인 적이 없었다. 휴학까지 고려할 정도로 수치스러운 사건이었지만, 학교 내에 이상한 소문은커녕, 자신이 채성민을 좋아했다는 소문조차 돌지 않았다. 알 듯 말 듯 오묘하고 불쾌한 감정이 어딘가에 숨어있는데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은 새로운 고객과의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책상 위엔 사무장이 미리 작성한 상담일지가 놓여있었다. 의자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한 뒤, 본래의 똑 부러지는 모습으로 돌아와 상담일지를 펼쳤다. *** 같은 시각. 전송된 기세나의 문자를 가만히 보고 있던 강현의 눈빛이 설핏 누그러졌다.
[그냥 문자로 하시면 안 돼요?]
어떻게 빠져나갈지 요리조리 궁리만 하는 기세나였다. 몇 년이 지나도록 변한 게 없는 그녀의 태도에 여전하다 싶어 돌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일부러 답을 하지 않았다. 강현은 한참을 문자를 보고 있다 저를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뗐다.
“변호사님?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르셨습니까?”
사건 방향에 대해 브리핑을 하던 변호사가 갑자기 픽 웃는 강현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아닙니다. 일단 브리핑 계속하시죠.”
강현은 표정을 갈무리하고 다시 보던 파일에 집중했다. 변호사가 된 이후 처음 맡게 된 사건이다. A와 B 기업 두 곳이 인수 합병의 절차를 밟는 도중 일어난 인사사고에 대해 어느 쪽 회사에서 책임을 질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공방이 예상되는 사건. 인수하는 회사는 인사사고의 책임을 떠안아 시작부터 일이 어긋나는 것을 싫어했고, 인수가 되는 회사 입장에서는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일어난 안전사고라고 주장했다. 안전사고냐, 인재사고냐를 두고 양측 다 그럴싸한 논리로 팽팽하게 맞섰지만, 어느 쪽도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 한다는 태도는 똑같았다. 검사의 일은 법을 토대로 범죄 사실관계를 파악해 기소 여부를 따지는 것이라면, 변호사의 일은 클라이언트의 유무죄 여부랑은 상관없이 그들의 이익과 권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류강현의 팀이 변론하는 회사는 인재사고라고 주장하는 A 기업 쪽이었다. 네 명의 변호사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머리를 맞댔다. 강현이 세 명의 변호사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 우리가 배심원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사고는 일어났고, 사람이 죽었어. 그것도 둘씩이나. 지금까지 나온 증거들을 바탕으로 어느 쪽으로 판단이 기우는지.”
류강현의 말에 변호사들은 저마다 근거를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결과는 2:2.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의 손가락 사이에 걸린 펜대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겉으로 봤을 때 안전사고처럼 보이지만 증거 중 몇 가지는 이상하게 합이 맞지 않았고, 사고 당일 CCTV 영상이 알 수 없는 원인으로 훼손됐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상대측에게 원인이 있다고 증명하긴 힘들었다. 심증만으로 수사할 수 없듯 법의 판단 역시 증거재판주의가 원칙이었다.
“사고를 최초로 보고받은 영업지원팀 책임자랑은 연락이 됐습니까?”
“연락은 됐는데, 만남을 거부했습니다. 차라리 법원에 증인출석을 요구할까요?”
“일단 시간이 있으니 계속 연락해서 어떻게든 만남을 주선해봅시다. 우리에게 유리한 증언이 될지, 불리한 증언이 될지 아직 아무것도 파악되지 않았으니.”
볼펜 끝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던 강현의 눈에 흩어져있던 종이 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B 기업이 마지막으로 안전 검증을 받은 게 작년이라고 했죠? 자료 가지고 있습니까?”
제일 끝에 앉은 막내 변호사가 재빨리 파일을 뒤적여 강현에게 건넸다. 위험성과 안정성이 표기된 산업안전공단의 평가서로만 봤을 때, 뭐 하나 걸릴 거 없이 깔끔했다. 그런데 묘하게 뒷맛이 구렸다.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걸 잘 알지만, 가끔 이런 기분이 들 때면 직감에 따를 때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대개 잘 들어맞았다.
“김 변호사님. B 기업에서 일한 근로자 중 삼 년 동안 퇴사한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 그중에 일 년 미만인 사람은 몇인지 취합해서 리스트를 한번 뽑아보죠. 특히 사유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이 나오면 바로 보고해주시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뒤로는 B 기업 현장검증을 나간 안전 관리 공단 직원이 누군지 한번 캐볼까요?”
강현은 팀원들에게 몇 가지 추가사항을 각각 지시하고는 회의를 마쳤다. 집무실을 나서는 변호사들을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방을 나서는 김 변호사를 불렀다.
"보통 다른 변호사의 스케줄을 확인하려면, 시니어 담당 비서실에 물어보면 됩니까?"
"그렇긴 한데, 그냥 개별 전화로 확인하시면 될걸요?"
"워낙 바쁜 사람이라 연락이 닿기가 쉽지 않네요."
아무리 일이 바빠도 문자 한 통 남기기 힘들까, 누구길래 그러느냐 물어오는 김 변호사에게 류강현은 고요한 표정으로 그만 나가보란 말을 대신했다.
***
“김영희 씨?”
“…….”
세나는 자신의 앞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새카만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 때문에 누군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상담자의 이름을 재차 확인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도 없었다. 세나가 한껏 끌어올린 입꼬리를 어색하게 씰룩거리자, 여자는 자신의 얼굴을 반쯤 가린 선글라스를 벗으며 한숨을 뱉었다. 상담자의 얼굴을 확인한 세나는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었다.
“그래요. 나 정시연이에요.”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시청률 30%를 넘기는 주말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남편을 칼로 찔러 살해한 후, 담소자약한 얼굴로 신고를 하고,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등, 자신을 의심하는 형사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슬픈 미망인의 역을 연기한 정시연이었다. 그녀의 소름 끼치는 연기력은 매회 시청자들의 감탄을 자아냈고, 연일 화제가 되었다.
“팬이에요!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변호사님이 제 드라마를 보셨다고 하니 좀 민망하네요.”
“안 보는 사람 있을까요, 요즘 최고의 드라마인데. 지난주 화 표정 연기 정말 압권이었어요. 저 클로징 샷 보면서 전율했잖아요!”
세나의 칭찬에 감사하다 인사를 하는 그녀는 어딘가 불안한 표정이었다. 세나는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향긋하게 우려낸 허브차를 그녀의 앞에 딸깍, 내려놓았다.
“그런데, 저를 직접 찾아오셨다고.”
“네. 기세나 변호사님이 이 방면에서 전문가라고 누가 소개해줬어요.”
세나는 자신이 이혼전문가라는 걸 상기했다. 그래서 그녀가 어째서 자신을 찾아왔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배우자 역시 천만 관객 배우로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시연 그녀가 이름도 알리지 못한 신인배우였을 시절, 남편은 이미 정상급 배우였다. 그들의 결혼 소식이 세상에 공개됐을 당시, 한동안 미디어 매체는 팔팔 끓어 넘치는 솥처럼 들썩였다. 만남부터 연애 그리고 결혼까지.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에 노출되었고, 남자는 사랑꾼 이미지를 얻었고, 정시연은 스타의 마음을 사로잡은 매력적인 여성으로 단시간에 정상에 올랐다. 서로가 서로의 촬영장을 방문하는 것은 기본. 길거리 데이트를 즐기며 가벼운 스킨십을 하는 사진이 수백 장. 연말 시상식에서 서로를 호명하며, ‘당신을 만난 게 일생일대의 행운이다.’라는 닭살 돋는 수상소감을 남겼다. ‘허물을 가려주는 태양이 있기에, 오늘도 제가 이 자리에 서서 상을 받습니다. 나의 태양 정시연 씨. 사랑합니다.’라는 수상소감은 몇 년이 지나도록 회자됐다. 모든 예비 부부의 워너비인 소문난 잉꼬부부 중 한 사람이 왜 이혼 전문변호사를 찾아온 건지, 그 내막이 무척 궁금했다.
“상담하신 내용은 일단 읽었는데, 알려주신 내용이 거의 없어서 제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드려야 하는지 알려주시겠어요?”
“…….”
정시연은 매니큐어가 깔끔하게 발린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의 지금 기분을 말해주듯 내리깐 눈은 어딘가에 고정되지 않고 이곳저곳에 머물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참을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세나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이혼을 결심해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때론 이게 맞는 건지, 하루에도 열두 번 변하는 마음이 그 방향을 잃어 찾아오는 상담자들도 많았다.
“천천히. 생각이 정리되면 그때 말씀해주셔도 돼요.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여기서 상담한 내용은 비밀유지가 되는 거 확실하죠?”
“그럼요. 변호사법 제26조에 의거 비밀유지 의무가 있습니다.”
세나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상대에게 신뢰를 주었다. 상냥한 미소는 덤이었다. 한참을 고민 끝에 정시연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남편에게 애인이 있어요. 저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그렇군요.”
“남자고.”
“…….”
“그리고 저는 결혼 전부터 그의 성향을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계약 부부예요.”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에 세나는 할 말을 잃었고, 정시연은 밀려오는 수치심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