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도를 믿으십니까?2021.07.31.
“조건 얘기하다가 갑자기 왜 류강현? 그냥 대학교 선배지.”
“류강현 변호사 집으로 데려와서 인사시켜.”
“그건 내가 아니라 아빠가 하는 게 더 빠르지 않나? 당장 내일이라도 집으로 데려와 식사하면 되잖아요?”
갑자기 엉뚱한 소리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결혼할 사람으로 데려오라는 소리야.”
“켁……! 컥, 어흑……!”
아무 생각 없이 넘기던 오렌지 주스가 순식간에 역류해 목구멍을 후려쳤다. 세나가 쿨럭쿨럭, 기침을 토하며 눈을 홉떴다. 뭔 사람?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입가에 흐르는 노란 액체를 손등으로 닦으며 다시 한번 아버지의 말을 되새겼다.
“……누구랑 누가 결혼? 우리 집에 나 말고 숨겨둔 딸이 하나 더 있나?”
“기세나. 아빠 농담하는 거 아니다.”
“저도 농담하는 거 아닌데요, 기장수 대표님.”
“그것도 못 하겠으면, 파트너 변호사는 꿈도 꾸지 마. 남자 하나 제대로 못 잡는 놈이 회사는 어떻게 이끌겠어. 쯧. 아니면 나가서 네 사무실 차리던가.”
“아니, 그거랑 이거랑 뭔 상관인데요?! 잘나가다 갑자기 왜 하필 류강현이야!”
“대표로서, 아버지로서 봐도 그만한 인물도 없어.”
“아빠가 그 사람에 대해서 뭘 아는데?”
“보면 알아. 사람 상대 한두 번 해? 오히려 네 짝으로 류 변호사가 아깝지.”
“여자 있을걸??”
“없다더라.”
“아빠!!!”
“난 할 말 다 했다. 이 조건이 싫으면 협상 가능한 다른 제안을 가지고 오든지.”
기가 찬 세나가 기장수의 빈자리를 노려보다 ‘허, 참, 미쳤어, 말도 안 돼.’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두 손으로 머리칼을 벅벅 긁으며 악악 소리를 질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넓은 거실에 덩그러니 홀로 남았다. 세나는 멍한 얼굴로 오뚝이처럼 서 있었다. 평소 팽팽 잘 굴러가던 머리가 한순간에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이건 단순히 만나고 안 만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대학 시절 유일하게 적대시했던 사람인 걸로 모자라, 자신의 수많은 추태를 목격한 당사자를 결혼 상대로 데려오라니. 하물며 그 류강현이 뭐가 아쉬워서 저를 좋아하게 된단 말인가. 애초에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 기세나와 류강현의 결혼이란, 아니 결혼이 아니더라도 이성 간의 대화. 그러니까 연애라고 치자. 여튼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그 철옹성 같은 류강현에게 낯선 사람이 다가와 “도를 믿으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가 상냥하게 웃으며
“네. 믿습니다. 우리 도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눠 볼까요?”
라며 맞장구를 칠 확률과 비슷했다. 한마디로 말해, 절대 일어날 일이 없다는 소리였다. *** 전신거울을 앞에 두고 기세나가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곧이어서 두 눈을 접어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양 볼이 바들바들 경련을 일으켰다.
“프하-.”
가슴까지 부풀려서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이게 아닌데. 불순한 의도를 숨기고 가식 떠는 웃음이란 걸 류강현은 단번에 캐치 할 것이다. 나 기세나.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외모와 능력을 갖췄다. 누구든 작정하고 덤비면 백이면 백, 제게 호감을 느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만약 기장수 대표가 뉴페이스를 들이밀며 ‘정략결혼’이든 ‘연애결혼’이든 하라고 말을 했다면 당장에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끊어냈다고 생각했던 악연의 연결고리가 이다지도 질긴지는 꿈에도 몰랐다. 이건 전생에 어떤 죄를 지으면 맺어지는 인연인가……. 아마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류강현이 기세나를 여자로 볼 확률? 아무리 수포자 문과생이라 해도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제로.”
그 제로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이제라도 매일매일 문안 인사를 드리며, 과거의 실수를 만회해야 하는 게 아닐까?
“미쳤어? 얼굴만 마주쳐도 표정 관리가 안 되는데, 뭔 문안 인사. 임금의 눈에 들고 싶은 무수리도 아니고. 아. 거참. 표현 되게 뭣 같네.”
오락가락하는 정신을 챙기기가 힘들어 책상에 널브러졌다. 난제 중의 난제다. 결혼이고 연애고 그전에 일단은 그와의 관계 개선이 시급해 보인다. 머리만 싸매고 있다간 답도 나올 것 같지 않아 2층으로 향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일단 나 자신은 아주 잘 아니, 상대가 어떤 놈인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계단을 올라와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류강현의 집무실로 다가갔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그의 사무실에선 몇 명의 시니어 변호사가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세나는 부잣집을 염탐하는 어설픈 도둑처럼 사무실을 안을 훔쳐보았다. 오자마자 굵직한 사건을 몇 가지 맡게 됐다고 하더니, 분주해 보였다. 회의를 주도하는 류강현의 모습과 그의 말을 경청하는 변호사들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 파트너 변호사로 왔지만 다른 로펌 출신이 아닌 검사 출신이었고, 무엇보다 아직 K 로펌의 식구들과 호흡을 맞춰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쉽을 발휘했고 단기간에 다른 변호사들의 지지를 얻었다. 후배들의 신망을 받았다던 박 검사의 말을 눈앞에서 목격하니 새삼 그의 능력이 실감이 났다. 데스크 위에 쌓여있는 서류를 빠르게 훑은 눈동자가 매서웠다. 변론 방향을 의논하며 또박또박, 어려운 단어들을 발음하는 억양에도 힘이 있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보이스로는 걸어 다니는 법률 사전인 양 형법들을 줄줄이 읊어대며 막힘없이 쏟아낸다. 무엇보다. 집중할 때 습관인 듯 좁아지는 미간과 그 옆을 지탱하는 커다란 손. 그리고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끼인 볼펜까지. 류강현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와 그의 주변을 구성하는 기운들이 한데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었다.
“뭐야, 저렇게 보니까 또 다른 사람 같네.”
세나는 불쑥 튀어나온 제 목소리에 놀라 황급히 입을 막았다. 그때였다. 서류에 집중하고 있던 류강현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집무실 유리창에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있던 세나와 강현의 눈이 마주쳤다.
훔쳐보고 있단 걸 들킨 세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대표실로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대표실의 비서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에 대답도 못 하고 일단 대표실로 몸을 숨겼다.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김 비서가 이상한 눈초리를 하고 세나를 보았다. 혹시나 류강현이 따라오진 않을까, 얼른 문부터 닫았다.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에 그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세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되는대로 말했다.
“대표님, 어디 가셨나 봐요?”
“오늘 오전에 골프 약속 있으셔서 출근 안 하셨는데요?”
“아……. 그렇구나.”
이 능구렁이 영감! 그런 폭탄을 투척하고 나 몰라라 골프를 치러갔다고? 아무리 아버지라지만, 욕이 절로 목구멍에서 솟아오른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그게…….”
지잉- 갑자기 휴대폰 진동이 울리자 깜짝 놀란 세나는 히익, 소리를 내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눈이 마주쳤으면 인사 정도는 하지. 기세나.]
[시간 좀 내. 할 말도 있고.]
류강현의 문자였다.
‘그렇게 정면으로 마주쳤는데 고개라도 까딱여 인사라도 할 걸, 줄행랑부터 치다니. 꼭 겁먹은 것처럼. 쪽팔리게. 아. 뭐라고 말하지?’
메시지 앱을 열어둔 채 멍을 때리고 있자, 김 비서가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을 붙였다.
“기 변호사. 무슨 일 있어요? 안색이 안 좋은데.”
세나는 이 사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도무지 답을 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김 비서님…….”
김정한 비서는 아버지 기장수가 K 법무법인을 설립했을 당시 제일 먼저 스카우트를 한 법률 비서로 세나와는 벌써 십오 년이 넘는 세월을 알고 지냈다. 어릴 적엔 비서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삼촌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지금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차 한잔하실래요?”
세나는 대표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김정한 비서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류강현의 문자를 모른 척할 수 없어 일단 답장부터 했다.
[이번 주는 스케줄이 가득 차 있어서 바쁠 것 같은데요.]
일단 수락이 아닌 회피로. 아직 그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온 문자에선 단호함이 엿보였다.
[만들어서라도 내.]
만들기는 뭘 만들어. 없다니까.
[그냥 문자로 하시면 안 돼요?]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답신은 오지 않았다.
“아……. 싫다. 진짜.”
“고민이 많은가 봅니다.”
두 잔의 차를 내온 김정한은 세나의 앞에 찻잔을 내려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살피던 세나가 슬쩍 말문을 열었다.
“김 비서님, 비서님도 싫은 사람 있어요?”
“싫은 사람 없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근데 그런 사람을 매일 봐야 한다면요?”
“매일 보고 있습니다.”
“네? 싫은 사람이 누군데요??”
“아시면서 뭘 물어요.”
“설마…….”
세나의 동공이 소파 옆 테이블로 향했다. 그리고 ‘K 법무법인 대표 기장수’라고 쓰여있는 명패를 힐끔였다. 김정한은 대답 대신 옅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따라 김 비서님의 마음에 왜 이렇게 공감이 가죠?”
“이것도 다 돈 벌고자 하는 짓이죠. 다른 곳으로 가도 이만한 연봉으로 일자리 구하기 힘드니까요.”
농담이겠거니 했는데,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이 가득했다.
“그건 그렇고, 기 변호사는 무슨 고민이 있어서 저한테 차를 다 하자고 한 건가요?”
“하아…….”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한숨부터 터졌다. ‘저랑 원수지간인 사람이 있는데, 아버지란 작자가 뭣도 모르면서 그 사람을 집에 인사시키래요.’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 대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두리뭉실하게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다.
“그러니까 요컨대, 절대 잘 지낼 수 없는 사람과 잘 지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인 거죠?”
“한 줄로 요약하자면 그런 셈이죠.”
‘흐음.’ 하고 목을 울리던 김정한이 고개를 갸웃하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근데, 기 변호사답지 않네요. 그런 걸 고민하다니.”
그도 그럴 것이 기세나는 K 로펌에서 인기인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금방 잘 어울리고, 새로 들어온 직원이 적응하기 힘들어 상담을 청할 때도 싫은 내색 없이 다독여주었다. 후배들이며 선배들이며, 척을 지는 일이 없는 사람. 영화계에 ‘친절한 금자 씨’가 있다면, K 로펌엔 ‘친절한 세나 씨’가 있었다.
“그 사람이 제 약점을 알고 있거든요.”
약점이라는 단어에 김 비서는 조금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기 변호사 약점을 알고 있다니, 그 사람 누군가요? 대단한 양반일세.”
재밌다는 듯 웃는 김 비서를 향해 ‘농담 아닌데요.’ 하고 세나가 눈을 흘겼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약점을 가지고 기 변호사를 협박했나요??”
“아, 그건 아닌데…….”
“그럼, 이용했어요?”
“그건 아니고…….”
“그럼 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