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맹견의 비밀2021.07.27.
그는 예나 지금이나, 좋든 싫든, 여기서나 저기서나 화제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대외비에 함구령까지 떨어졌다고 하니 여간 큰 사고를 친 게 아닐까 더욱 호기심이 동했지만, 박 검사 성격상 절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류 검사님 말이야, 말석들 사이에선 은근 사수로 두고 싶은 사람이었어. 빡세서 그렇지.”
“피하고 싶은 맹견에서 성공했네.”
-“뭐?? 뭔 견? 그게 무슨 소리야?”
“몰라도 돼. 이쪽도 대외비입니다. 암튼 고마워. 끊는다.”
세나는 툭 튀어나온 혼잣말을 별거 아니란 듯 웃음으로 무마시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제 미간을 긁적이며 박 검사의 말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조직 생활에 특화됐나? 후배들한테 신망이 높네. 하긴 군대도 뭐 특전산가 갔다 왔다지? 나이 먹고 철이라도 든 건가??’
좀처럼 웃는 모습을 보기 힘든 선배. 지각 한 번 하지 않은 선배.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지만, 동기건 선후배건 친한 사람도 없고, 절대 자취방에 들이지 않는 거로도 유명했다. 게다가 어찌 된 게 함께 듣는 전공 강의에서 그렇게 저랑 사사건건, 부딪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웃기시네. 대학 다닐 때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한 번은 조별 과제를 함께 하게 된 적이 있었다. 다들 조원들의 탈주는 콧방귀나 뀌던 양반이 어찌 된 게, 세나만은 들들들들 볶아대며 삼 일 밤낮을 갈궈 과제를 완성했다. 결과적으로 최고점을 받았지만, 탈주한 조원들의 이름을 싹 지워버린 사건이었다. ‘무임승차도 경범죄로 벌금을 내는데, 법학과 학생의 부정을 묵인하는 건 미래의 법조인으로서 가당치 않다.’라며 조별 과제를 낸 교수에게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교수는 미래의 법조인으로서의 매우 바른 자세라며 크게 칭찬했고, 무임 승차한 학생들에게 F가 아닌 D라는 애매한 점수로 응징했다. 물론 그 순간에는 속이 시원했다. 그러나 탈주한 조원들이 류강현이 아닌, 만만한 기세나를 찾아와 하소연하거나 윽박지른 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자신이 저지른 짓을 끝까지 책임지던가, 그때 그 사건으로 선배들 사이에서 욕이란 욕은 다 먹었던 기억이 떠올라 세나는 학을 뗐다. 그 후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얼마나 숱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지는 글로 쓰자면 대하소설 급이었다. 조별 과제로 마무리될 줄 알았던 류강현과의 인연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학과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앙심을 품은 선배들이 그와 세나를 엮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류강현이 수업과 관련된 행사가 아니면 절대 참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고로 둘이서 해야 할 일들을 고스란히 세나 혼자 하게 됐다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참다못한 세나가 류강현을 찾아가 제발 나와달라 빌었을 때 무감각한 표정으로 도리어 질문을 던졌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그 일을 해야 할 만큼 가치가 있어?”
“선배님이 시키면 해야죠. 후배니까. 그러지 말고 도와주세요.”
“일부러 엿 먹이려고 하는 짓인 게 뻔히 보이는데, 굳이?”
“이 기회에 만회하는 거죠. 어차피 사회에 나가서 일하다 보면 다 얼굴 부딪히고 살 건데,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 이것도 다 인맥 쌓기다 하면 되잖아요?”
“그런 걸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는 거야. 기세나. 그 시간에 법 조항이나 몇 개 더 외워.”
“선배!”
“장담하는데, 그런 멍청한 짓거리에 동참한 놈들 중에 너랑 얼굴 보고 살 놈 없어.”
도대체 이 인간은 나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나 싶었다. 평온하고 아름답던 기세나의 캠퍼스 라이프가 그때만큼 고달팠던 적이 없었다. 그래도 저의 노력을 알아줬는지 어쨌는지, 그 후로 선배들의 텃세가 사그라들었었다.
“설마 그 일 때문에 일부러 나한테만 그랬던 건 아니겠지?”
그와 엮이기 시작한 날을 가만가만 더듬어 보니 송년회 때부터였던 것 같았다.
“와, 내가 뭘 어쨌다고, 착각해서 고백 좀 했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쪼잔하게? 내가 돈을 뺏었어, 뭐 피해를 줬어? 그냥.”
콧물을 훔치다 재킷 소매를 조금 더럽힌 것밖에. 아니, 드라이 세탁까지 해서 돌려줬으면 된 거 아닌가, 아니다. 도망치다 넘어져서 찢어먹었던 것 같은데……. 그날의 추태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세나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래서 하나 새로 사준다니까, 기어코 됐다고 했으면 끝난 거 아닌가?!”
십 년도 지난 과거지만 여전히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세나에겐 그만큼 치욕스러운 과거사였다.
“에이. 이젠 잊었겠지. 원래 맞은 놈은 기억해도 때린 놈은 기억 못 한다고 하잖아. 지금부터 이미지 확실하게 잡고, 최대한 안 부딪히면 돼.”
류강현이 파트너 변호사로 온 이상 어찌 됐건 앞으로 몇 년간은 얼굴을 보고 살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 한 손엔 명품 로고가 박힌 선물 가방과 다른 한 손엔 노란 튤립 꽃다발을 들고 세나가 벨을 눌렀다. 잠시 뒤 세나를 반기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어서 오렴.”
“잘 지내셨죠, 어머니.”
어머니라고 부르게 된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그녀는 세나의 입에서 어머니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뭉클한 표정을 지었다.
“생신 축하드려요.”
세나가 빙긋 웃으며 준비해온 선물을 건네자, 그녀는 곱게 눈을 접고 화사하게 웃었다. 품 안에 선물을 받아든 그녀가 얼른 들어오라며 문 옆으로 비켜섰다. 거실로 들어가자, 여전히 어색한 사이로 머문 아버지, 기장수가 괜히 읽지도 않는 신문을 들추며 목을 큼큼거렸다.
“왔냐.”
“네.”
“밥은.”
“밥 먹으러 온 거잖아.”
“…….”
“…….”
“언제까지 꽁해있을 거야?”
“냅둬요. 알아서 풀리니까.”
“……어휴. 저거 언제 철드나 몰라. 나이가 벌써 서른이 넘었는데.”
서로 얻는 것도 없이 끝난 1차전 이후로 세나와 기장수는 데면데면한 사이를 이어갔다.
“밖에서는 고상한 척 우아한 척하면서 사람만 없다 하면 저렇게 돌변하니. 저 모습을 회사 사람들이 볼까 내가 다 무서워요. 아주. 내 딸이지만 이해를 할 수가 없어.”
혀를 끌끌 차며 신문을 반으로 접는 기장수를 보며 세나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치기를 억누르려 했다. 하지만 최근 로펌에서 기대표의 행적들이 떠올라 또다시 울컥했다.
“아저씨. 죄송한데 저 아세요?”
“야! 기세나! 너 아빠한테 자꾸 이럴 거야? 뭐 나는 좋아서 그런 결정한 줄 알아?”
“저 아저씨 같은 아빠 없거든요? 어떤 아빠가 자기 딸 뒤통수를 쳐요? 그리고 좋아 죽던데요? 점심때마다 새로 오신 파트너랑 죽이 아주 짝짝 맞는다고, 서로 반찬도 올려주고 그러나 보죠?”
“어이쿠 속 터져. 너는 정말 네 아빠 마음 모른다. 하긴 자식이 부모 마음을 어찌 알겠어. 저 잘난 줄 알고 그 잘난 맛에 사는데.”
“어머, 제 잘난 맛에 별로 도움도 안 주셨으면 훈수 두지 말아 주실래요?”
다과 차림을 내오던 모연이 거실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두 사람을 살폈다.
“누가 기씨 부녀 아니랄까 봐, 두 사람 또 싸웠어요? 해가 갈수록 싸움이 유치해지네.”
모연은 서로 얼굴도 쳐다보지 않는 부녀 사이에 앉아 양쪽에 곱게 깎은 배를 하나씩 건네며 픽 웃었다. 기씨 부녀의 싸움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그녀에겐 이 정도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이렇게 대화로 푸니 얼마나 좋아요? 예전 생각 안 나요? 당신이랑 세나랑 싸우면, 한 달을 묵언 수행하는 스님처럼 둘 다 방에 틀어박혀서는. 중간에 껴서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두 사람 절대 모를 거야. 내가 산후 우울증까지 걸려서 베란다에서 세훈이 끌어안고 뛰어내릴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니까. 그때 뛰어내렸으면 내 생일날 이렇게 오붓한 부녀 사이를 못 보고 갈 뻔했네요. 그쵸?”
단아한 말투로 조곤조곤, 인자한 웃음까지 흘리며 무시무시한 말을 하는 그녀 덕분에 두 사람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이 몸 둘 바를 모르고 어색하게 배나 씹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렸다. 이때다 싶은 세나가 잽싸게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이제 막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온 기세훈이었다.
“기세후니!”
기세훈은 저를 몹시도 반기는 세나를 보고는 고개를 쭉 빼고 안쪽 분위기를 힐끔거렸다.
“싸웠네. 아버지랑.”
“오랜만에 보는 누나한테 인사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냐? 이 새끼가 빠져가지고.”
세훈은 운동화를 벗다 말고 한 손을 내밀었다. 세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 그의 손에 척 올려주었다. 기세훈은 표정 하나 없이 봉투 입구에 후 바람을 불고 안에 들어있는 액수부터 확인했다. 생각보다 큰 금액에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두 손을 공손하게 포갰다.
“누님. 오셨습니까.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한 발걸음을 다 해주시고, 그간 별일 없으셨습니까?”
그러고는 구십 도로 꾸벅 허리를 숙였다 들어 올린 세훈의 표정이 흐뭇하게 풀어졌다.
“너, 내가 좋아, 돈이 좋아?”
“누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질문은 부질없는 것이지요.”
세나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또 다른 흰 봉투를 꺼내 보였다.
“세상에서 누님이 제일 좋습니다. 말해서 무엇합니까.”
“와, 진짜. 내 동생이지만 너 좀 심한 거 알지? 무섭다 무서워.”
“미천한 소인을 좋게 봐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옷 갈아입고 나와. 저녁 먹게.”
*** 저녁 식사 뒷정리를 끝내고 가족끼리 거실에 모여 생일 케이크를 나눠 먹었다. 여느 가족들처럼 고등학생인 기세훈의 진로에 관한 이야기와 다가오는 주말 떠나게 될 부부 여행, 그리고 일상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 적당히 달궈진 가족 간의 대화를 틈타 기장수가 말문을 열었다.
“로펌에 가사 전담센터를 만들까 하는데, 세나 네 생각은 어떠냐?”
“가사 전담센터요?”
“그래. 시니어 둘에 주니어 넷. 여섯 명이 팀을 꾸려, 아예 가사 쪽 소송을 전담하는 팀 말이다.”
“요즘 대형 로펌들이 팀을 꾸린다고는 하던데, 가사소송에도 굵직한 사건들이 꽤 있으니까 우리 로펌에도 있으면 홍보나 영업적인 측면에서 확실히 도움 되겠네요.”
“널 거기 팀장으로 앉힐까 하는데.”
“……!”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세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세나의 표정을 본 기장수가 말을 덧붙였다.
“회의실도 따로 빼주마. 원한다면 위층에 방 하나 비워주고.”
“진짜요??”
“1년 동안 가사 전담센터 잘 꾸려나가면 파트너 변호사 될 수 있도록 이사진들 설득해보마. 사실 너 정도면 다른 로펌에선 충분히 파트너 변호사를 달 수 있는 수준인 거 내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간 K 로펌에 쏟았던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기장수의 말에 억울하고, 원망스러웠던 마음이 한껏 녹아내렸다.
“단,”
믿기지 않는 제안에 두 볼을 씰룩쌜룩하던 세나는 단, 이라면서 조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려고 하자 ‘그럼, 그렇지.’하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조건이 뭐든 간에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자리였다. 가사 전담이라, 이혼 사건뿐만이 아니라 좀 더 세분화된 사건까지 수임할 수 있을 테니까.
“조건이 뭔데요?”
“류강현 변호사 어떻게 생각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