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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귀여운 후배님 (7/120)

7화. 귀여운 후배님2021.07.24.

16551850547957.jpg‘함께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학과 내 소문까지 모르는 머저리는 아닌데……. 그래도 광견병 걸린 미친개는 좀 너무하네.’

그녀가 주장한 변론은 나쁘지 않았다. 충분히 현실성 있는 변론이었고 뻔한 변론이었지만, 피고인을 대변하는 변호사로서는 프로에 가까웠다. 단지 그 변론 방향이 잘못됐던 것뿐이었다. 차라리 ‘정당방위’가 아니라 오랜 정서적 학대에 의한 ‘심신미약’을 주장했더라면 자신이 한 방 먹었을 것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시시하지 않은 상대였다. 그 점에 대해 알려주려 몸을 내밀었다가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녀를 못 본 척 몸을 물려 계단을 내려갔다. 강현은 송년회 이후로 저만 보면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구는 세나를 볼 때마다 신기했다. 이따금 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피할 때는 괜히 골려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듯 보였다. 혼자서 분을 삭이려 아무도 없는 이곳까지 온 걸 보니.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꽤 어릴 때부터. 류강현은 남들이 비추지 않는 속내를 읽어냈다. 관찰력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눈치가 빠르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릴 땐 꽤 쓸모있는 능력 중 하나라고 여겼다. 군 제대 후 복학한 학교에서 기세나를 처음 봤을 때, 좋은 사람인 척 가식을 떨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재미없는 복학생의 농담에도 까르르 웃어주었고, 누군가 무리한 부탁을 해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동아리는 몇 개나 가입했는지 게시판 이곳저곳 이름이 적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처신을 잘하는 여우.’ 그것이 기세나의 첫 이미지였다. 가끔 엉뚱한 행동을 보일 때가 종종 있었지만, 제게 해를 끼칠 타입도 아니었기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술에 취해 말 같지도 않은 고백을 한 걸 본 뒤로 그녀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기세나는 여우의 탈을 쓴 미련한 곰이었다. 꽤 귀엽기도 했고. 그가 지난 송년회를 떠올리며 구석진 자리에서 다시 담배를 한 대 꺼내 물 때였다. 털레털레 계단을 내려온 세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한숨을 푹, 쉬고는 재떨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자기가 흩뿌렸던 종잇조각들을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16551850547963.jpg“아, 왜 또 이렇게 잘게 찢겨서, 줍기도 힘들어. 히잉…….”

엄지손톱만 한 조각들을 주섬주섬 모으더니, 하늘을 보며 한숨을 한 번. 쪼그려 앉은 채로 엉금엉금, 조각들을 줍다가 ‘아, 짜증 나! 그냥 구기기만 할걸.’ 하고 긴 한숨을 한 번. 그렇게 십 분을 넘게 쭈그려 앉아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수습했다. 강현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픽, 실소했다. 누가 본다고 저렇게까지 하나, 고개까지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그리고 또 한 번. 광견병 걸린 미친개라고 강현을 욕한 다음 날. 자신이 졌다는 걸 인정하기 죽기보다 싫다는 얼굴로 그녀가 저를 불쑥 찾아왔다. 억울하고 분해서 찾아왔나? 아니면 대놓고 욕하려고 왔나, 그러기엔 도서관이라 보는 눈이 많을 텐데. 남들 앞에서 싫은 소리 한번 하지도 못하면서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 강현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무심한 눈으로 세나를 관망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대뜸,

16551850547963.jpg“제가 만약 심신미약을 주장했다면, 아마 이겼을 거예요.”

하고 휙 사라졌을 때, 류강현은 잠시 얼이 빠져버렸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그녀가 남기고 간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고는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아마 대학 생활 동안 그렇게 크게 웃은 건 처음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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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욕심이 많다. 지는 걸 싫어하고 승부욕이 강하다. 무언가를 쟁취하려 남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정당한 노력을 한다. 거기에 하나 더.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 돌아볼 줄 알고 이내 다른 해법을 찾아낸다. 변호사라면 응당 자신의 변론이 잘못됐다는 걸 아는 순간 그걸 빠르게 인정하고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내 승부수를 띄울 줄 알아야 한다.

16551850547957.jpg“변호사로서의 자질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강현은 들고 있던 찻잔을 받침대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16551850547957.jpg“그녀는 누구보다 좋은 변호사입니다.”

파트너 변호사로 K 로펌에 인사를 온 날, 계단에서 마주친 세나의 반응은 여전히 대학생 때와 같았다.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 엉망으로 일그러지는 그녀의 얼굴에 이상하게도 안심이 됐다. 그때와 같은 사람이라면.

16551850547957.jpg“욕심만 많다면 문제지만,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만큼 노력하는 사람이니까요.”

강현은 찻잔을 들여다보며 저도 모르게 옅게 웃었다. 무뚝뚝하고 냉철하다고 생각했던 류강현에게서 생각지도 못하게 후한 평이 나왔다. 기장수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고민을 털어놓았다.

16551850547993.jpg“이번에 파트너 변호사로 내정될 거라는 기대가 내심 컸던 것 같은데. 이사들은 세나가 영 못 미더운가 보더군. 아직 어리기도 하고, 영업력을 두고 이래저래 말이 많아.”

16551850547957.jpg“그렇군요.”

16551850547993.jpg“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자네가 보기엔 괜찮은 변호사라고 했는데, 기 변호사가 K 로펌 이사들의 입을 딱 다물게 할 만한 역량이 될 것 같은가?”

16551850547957.jpg“흠…….”

기장수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긴 강현은 한 손으로 턱 끝을 매만지며 꽤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16551850547957.jpg“팀을 만드시죠.”

팀이라는 말에 기장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류강현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16551850547957.jpg“지금 기세나 변호사는 가사소송법 전문 시니어인데, 그 분야를 키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세부적인 법률 영역을 두루 다룰 수 있게 가사 전담센터를 만들고, 센터 팀장으로 기세나 변호사를 두면 내부적으로 입지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16551850547993.jpg“K 법무법인 가사 전담센터라.”

16551850547957.jpg“가사 관련 송사 전문팀은 이혼뿐만 아니라 상속, 재산분할,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담당할 수 있는 TF팀인 격이죠.”

16551850547993.jpg“그럼, 거기서 발생하는 민사나 형사 건은 어찌하나?”

16551850547957.jpg“가사법 관련 민사는 기세나 변호사가 저보다 더 나을 테고, 그 외로 관련해서 고문이 필요하다면 제가 맡으면 되니 문제가 없을 겁니다.”

K 로펌엔 이혼을 전문으로 다루는 변호사가 몇 있지만, 모두 개인플레이였다. 만약 팀을 이룬다면, 겉으로 보기엔 가사 분야지만 그 속에 숨겨진 민, 형사적인 부분까지 종합적으로 다루게 될 수 있게 될 터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확실히 다른 곳보다 수익이나 영업적인 측면에서 두각을 드러낼 것이다. 기장수의 생각을 읽은 강현이 날카로운 눈매를 치켜떴다. 까만 동공을 스치는 이채가 호기로웠다.

16551850547957.jpg“요즘엔 시대가 변해 재벌들도 이혼하는 세상이지 않습니까.”

16551850547993.jpg“내가 자네를 파트너 변호사로 맞이한 게 신의 한 수구만.”

만족감을 표하는 기장수의 호탕한 웃음에 별거 아니라는 듯 다시 차 한 모금을 마신 강현은 손목을 젖혀 시간을 확인했다.

16551850547957.jpg“그럼 천천히 생각해보고 말씀해주시지요. 저는 이만, 다음 미팅이 있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팔에 꿰는 류강현을 보는 기장수의 눈에 새삼 감탄의 빛이 서렸다. 올곧은 자세, 좋은 눈빛, 빠른 두뇌 회전. 무엇보다 욕심 많고, 허영심 넘치는 세나를 제대로 봐주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16551850547993.jpg‘아무리 봐도 저만한 인물이 없어.’

기장수는 제 딸의 남편감으로 다시 한번 류강현을 점 찍었다. ***

16551850547963.jpg“하아…….”

하루아침에 목표를 잃고, 의욕도 함께 잃은 세나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나오는 건 한숨이요, 아린 것은 마음이니. 손에 든 파일의 글자가 하나도 읽히지 않았다. 며칠째 들여다본 상담 파일에는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그저 그런 사유로 이혼을 하고, 서로가 좋게 좋게 합의를 봤으며, 양육권 청구조차 분쟁의 여지 없이 무난히 끝을 맺어 머리를 굴릴 거리도 없었다. 모처럼 쓸데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되건만 어찌 된 게 시시한 사건들만 수두룩해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16551850547963.jpg“아……, 짜증 나.”

며칠째.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았던 그 자리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16551850547963.jpg“내가 가구들이랑 배치도까지 다 봐뒀는데…….”

창을 등지는 쪽으로 테이블을 두고 사이드에 오픈형 책장. 그리고 그 위에 그동안 모아두었던 스노우 볼들을 진열하고…….

16551850547963.jpg“인제 와서 무슨 소용이야. 이미 다른 주인 놈이 입주했는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저를 비웃고만 있을 호랑 말코 같은 류강현이 떠올랐다.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 한번 안 해봤을 게 분명하다. 자신은 그렇게 그 자리가 갖고 싶어 기를 써도 힘든데, 류강현은 무슨 수로 이사들의 눈에 들어 홀라당 그 자리를 꿰찼을까, 억울하고 분했다. 세나는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는 대신에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를 뒤적이다 서울 동부지검에 있는 연수원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1655185065228.jpg-“기세 변이 전화를 다 주시고, 웬일이십니까.”

16551850547963.jpg“박 검, 바쁘십니까아?”

1655185065228.jpg-“응. 좀. 바빠. 삼 초 사건들이 자가번식 중이지.”

16551850547963.jpg“어우- 그럼 한가할 때 전화할게.”

1655185065228.jpg-“기세 변 전화는 받을 시간은 있어. 말해.”

16551850547963.jpg“별건 아닌데…….”

말끝을 흐린 세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괜히 바쁜 사람 붙들고 물어볼 일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 이건 뒷조사가 아니다. 단지 나의 상사로 온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야 하는 게 당연히 맞지 않나, 하는 얄팍한 대의명분으로 고민을 일축했다.

16551850547963.jpg“그 류강현 검사 말이야. 서울지검 특수부에 있던. 박 검도 혹시 알아?”

1655185065228.jpg-“…….”

전화기 너머에선 대답 대신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리와 함께 어딘가로 이동하는 소리, 찰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잇따라 들렸다. 곧이어 상대방이 볼륨을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1655185065228.jpg-“류 검사님에 대해서는 왜?”

단순히 아느냐고 물었을 뿐인데, 상대의 반응이 이상했다.

16551850547963.jpg“그냥, 좀 궁금해서.”

1655185065228.jpg-“그러니까, 왜 궁금한데? 그분 옷 벗었잖아?”

16551850547963.jpg“알아. 우리 로펌 파트너 변호사로 오셨어.”

1655185065228.jpg-“아……. K 로펌으로 가셨어? 의외네.”

16551850547963.jpg“뭐가 의왼데? 우리 로펌 무시하는 거야?”

1655185065228.jpg-“아냐. 근데, 류 검사님이랑 기 변이랑 대학동문 아냐? 왜 나한테 물어? 안 친해?”

16551850547963.jpg“응. 선배님이시니까 친해질 기회가 없었지.”

앙숙이다, 아주 앙숙. 붙었다 하면 불꽃 튀는. 물론 나 혼자만이지만.

16551850547963.jpg“그래서 일하는 스타일이 어떤가 궁금하기도 하고, 게다가 난 검사를 직접 상대할 일도 없잖아? 가정법원 판사라면 모를까.”

1655185065228.jpg-“음. 나도 같이 일해본 적은 없는데, 지검에서 좀 유명한 분이라……. 실제로 본 건 두 번 정도고, 악명높은 양반이지.”

16551850547963.jpg“뭐가 그렇게 유명한데?”

1655185065228.jpg-“일할 때 장난 없는 걸로. 위아래 없고. 철두철미하고, 형사부일 땐 사건 자료가 조금만 이상해도 현장검증까지 나갔다니 말 다 했지. 수사관들도 학을 뗄 정도였다니까. 특수부일 때는 뉴스에도 몇 번 나왔잖아? 수사 검사로. 그때 국회의원들 줄줄이 소환한 게 아마, 류 검사님일걸?”

16551850547963.jpg“아……, 2년 전 전직 국회의원 뇌물수수 혐의로 발칵 뒤집힌 사건 말이야?”

1655185065228.jpg-“그래. 거기에는 알 만한 정·재계 인사들이 대거 연루돼 있어서 우리 쪽도 완전 난감했거든. 거의 반년 정도 하루도 빠짐없이 야근에, 기자들 브리핑에, 아마 서울지검 사람들 여럿 죽어났을 거다.”

연일 뉴스에 오르내릴 정도로 회자된 사건이라 세나 역시 익히 알고 있었다. 그 사건을 맡은 검사명단에 류강현이 포함된 줄은 몰랐지만.

16551850547963.jpg“그 큰 사건을 처리했으면, 지검에서 입김이 장난 아닐 텐데, 왜 갑자기 옷을 벗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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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850547963.jpg“뭐길래 갑자기 말이 없어?”

1655185065228.jpg-“아……. 미안. 그건 대외비라 말해줄 수 없어.”

16551850547963.jpg“……그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니야?”

1655185065228.jpg-“그냥 지검을 발칵 뒤엎고 나갔다고만 알고 있어. 나도 근무지가 달라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데, 암튼 공문이 하나 뜨긴 했지. 그래서 더 말 못 해.”

16551850547963.jpg“공문까지?”

1655185065228.jpg-“다른 사람한테 물어도 아마 나랑 똑같이 대답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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