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뉘 집 엄한 자식2021.07.20.
세나는 삼십 년을 넘게 키운 딸 속도 모르고 그저 좋은 데 시집가서 편하게 살라 말하는 제 아버지가 오늘만큼 미운 적이 없었다. 자기가 낳았어도 자식새끼 마음은 모른다고 하던데, 하물며 자식이 부모의 마음은 어떻게 알겠나. 그래도 이건 아니지.
“철마다 보양식에 몸에 좋다는 음식은 죄다 반찬으로 먹으면서 아빠 죽으면 이게 다 내 거라고?”
“…….”
“일주일에 두 번은 골프 치러 필드 나가고, 사회인 야구단이니 조기축구니 꼬박꼬박 운동에 몸 관리를 그렇게 신경 쓰는데! 아빠가 죽으면??”
“……그건 다 회사를 위해서.”
“나보고 언제 올지 모를 날이나 기다리라고? 하! 심지어 이름도 장수야. 기장수! 아빠, 내가 아빠 돌아가시라고 물 떠 놓고 기도한들 그 기도가 씨알이나 먹히겠어요?!”
“무, 뭣?! 너, 너 그게 아빠한테 할 소리야??”
도저히 대화가 안 되겠다 싶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사실 화풀이 삼아 찾아온 것이었지만,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하는 그에게 도리어 더 화가 나고 말았다.
“잘됐네. 이제 새해 소원으로 우리 아빠 좀 제발 빨리 데려가 달라고 빌어야겠네! 내가 대표 자리 꿰차려면!”
“야! 기세나! 너 일로 안 와? 딸 하나 있는 게! 지 아빠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겠다고? 저게 아주 오냐오냐 키웠더니! 너 아주 호적에서 파버려야 정신 차리지?”
“누구세요, 아저씨? 전 제가 알아서 잘 컸거든요?!”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나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기장수는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아이고 머리야! 저거 누가 데려가나 몰라. 저놈의 성질머리하고는!”
그가 두툼한 손으로 뒷덜미를 주물럭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어휴. 저놈의 성질머리하고는……! 쯧! 저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머리가 컸어도 부모에게 자식은 늘 물가에 내놓은 아이였다. 물론 딸의 성공을 못마땅해하는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사회적인 성공이 다가 아니다. 살면서 제 사람 하나 없는 삶이 얼마나 불행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기장수는 완벽에 가까운 모습으로 저를 꾸미려 아등바등하는 세나가 가엾고 또 안타까웠다. 제 딸의 저런 모습조차도 예뻐해 주는 남자를 만났으면, 하는 생각이 한해가 지날수록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기장수는 고민 가득한 얼굴을 하고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가다가 일에 미쳐 시집도 못 가고 노처녀로 독수공방 살아갈까 심히 우려됐다.
“선 자리를 만들어 내밀면 콧방귀나 껴대니 누굴 붙여 줄 수도 없고…….”
저 성질머리를 받아줄 뉘 집 엄한 자식 없나.
“남자는 곧잘 만나는 것 같은데, 데리고 오는 놈 없고…….”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니 뭐니 떠들어 대지만 실속이 없다.
“…….”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데 머릿속에 무언가 ‘팟!’ 하고 떠올랐다. 이사진들의 소개로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쏙 들었던 사내가 있었다. 진중한 얼굴에 말투는 조금 무뚝뚝하지만, 허튼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다. 봉황의 눈매로 눈빛은 매서우나 기개가 확실했다. 그런 사람일수록 신의가 있어 제 사람을 지킬 줄 알았다. 거기에 로펌으로 스카우트하기 위해 제시한 조건을 꼼꼼히 살피며 자신의 실리까지 챙기는 똑 부러진 면모도 있었다. 자신감과 연륜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상당한 기장수는 그것을 온몸에 두르고 있는 류강현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 생각했다. 그래서 파트너 변호사가 되는 것에 더욱 찬성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옳다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기장수가 밖에 있는 비서를 호출했다.
“류강현 변호사 자리에 있나?”
“네. 출근하시자마자 일을 맡기고 싶다는 클라이언트들이 줄을 서서 바쁘신 듯 보였습니다.”
“좀 보자고 전해주게.”
“안 그래도 대표님과 미팅하고 싶다며 시간 괜찮으신지 물어보셨습니다.”
“그럼 점심이나 같이하자고 물어봐.”
“늘 가시던 한식당으로 예약해 놓겠습니다.”
비서의 대답에 그가 턱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만나온 사람만 수만 명이었다. 기장수는 웬만한 일로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류강현을 떠올린 순간 제 사윗감으로 ‘딱이다’는 확신을 했다. *** 식사를 물리자 따뜻하게 데운 보이차가 상 위에 올랐다. 강현이 한 손으로 찻잔 아래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 손보다 훨씬 작은 도자기 잔을 쥔 채 소리 없이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실 때 가볍게 내리깐 눈매는 시원하게 뻗어 있었다. 다시 봐도 남자답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음식을 먹을 때 하는 젓가락질은 또 어떠하고. 절로 감탄할 정도로 유려하고 깔끔했다.
‘가정교육을 참 잘 받았어.’
기장수는 류강현을 앞에 두고 남모르게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딸깍- 찻잔이 테이블 위로 떨어지고 류강현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래서 혼자서 일을 쳐내는 것보다, 다른 변호사들에게 일을 맡기고 자문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데.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검사 생활을 하는 동안 만든 적이 많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강현을 좋게 본 사람들이 있었고, 여기저기에서 K 로펌으로 알아서 일감을 들고 왔다. 그러나 몸은 하나이니 그 많은 일을 혼자서 다 해결할 수는 없었다. 적당한 선에서 수임하되 기존에 있는 시니어 변호사들에게 일임하는 게 어떠하냐는 물음이었다.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던 기장수가 목을 큼큼 두 번 울리고 대답했다.
“류 변호사가 알아서 하면 될 것 같군요.”
“이제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대표님.”
“앞으로 K 법무법인을 이끌어갈 파트너인데 내가 함부로 할 수 있나요.”
“대표님 판사 시절부터의 이력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으로서 저를 잘 이끌어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가르침 달게 받겠습니다.”
“하하하, 류강현 변호사. 사람 면을 살려주는 법도 알고 이거 참 내가 뭐라 할 말이 없구먼. 이미 류 변호사가 온다는 소문이 서초동에 돌자마자 내 전화기에 불이 났는데, 오히려 내가 배워야지.”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들어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오자마자 이렇게 영업력에 두각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검사 옷을 벗어 던진 이유를 들었을 때 내심 걱정했는데. 오히려 내부사정을 잘 아는 검사 출신 변호사는 기업의 입장에선 정답지를 들고 있는 선생님인 셈이었다.
“그럼, 말 편히 하는 김에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괜찮은가?”
“네.”
“혹시 사귀고 있는 사람 있나?”
기장수의 물음에 류강현의 눈썹 끝이 살짝 들렸다. 어떤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한 것인지 파악하려 시간을 끌었다.
“아뇨, 없습니다.”
짧고 간결한 대답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긴장하고 있던 기장수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결혼 생각이 없는 건가, 아니면 아직 짝을 만나지 못한 건가?”
“둘 다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군.”
대화를 더 이어나가 정보를 획득해야 하는데, 뭐라고 물어야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까 고민이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과 풍기는 분위기. 더군다나 말수도 적어, 어설프게 넘겨짚는 방식으로 대화를 유도해 볼까 했지만, 통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기장수는 그런 강현을 눈에 담으며 만만치 않은 상대라 생각했다. 다짜고짜 ‘우리 세나는 어떤가?’ 하고 묻기에는 너무 뻔히 보이는 수였고, 그렇다고 ‘선 자리에 나가볼 생각 없나?’ 하고 묻기에는 단칼에 거절할 것 같아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네 젓가락질을 보다 떠올렸는데. 내 딸이 말이야, 어릴 적부터 습관이 잘못 들어 젓가락질을 아주 이상하게 했어.”
기장수는 뜬금없는 주제로 먼저 운을 띄웠다.
“그런데 학교에서 무슨 소릴 들었나, 어디서 아기 교육용 젓가락을 사 오더니 땀을 뻘뻘 흘리며 완두콩을 옮기는 연습을 하는 게 아닌가.”
스스로 고치려는 점은 기특했지만, 밥을 먹을 때마다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며 흘리는 통에 보는 사람조차 체할 것 같았다. 게다가 제대로 먹질 못해 살이 쏙 빠지는 딸이 걱정이었다.
“그렇게 젓가락질을 한두 달쯤 연습했나? 이제는 젓가락으로 좁쌀도 집어 먹을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네.”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그는 목덜미를 쓱 주무르며 류강현의 눈치를 살폈다.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도통 속내가 읽히지 않는 상대였다.
“뭐, 다 어릴 때 일이지. 고집불통에 어디서 싫은 소리 듣기 싫어하고.”
“싫은 소리는 누구나 듣기 싫어합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은 걸 고치려고 노력하는 건 대단한 거죠.”
“역시 그렇지? 누굴 닮았는지 한다면 하는 성격이야.”
기장수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어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차를 마시며 잠시 뜸 들이다 본론을 꺼냈다.
“기세나 변호사와 동문이라지?”
“네.”
"나이 차이를 보니, 학교에서 만난 적이 있겠군.”
“1년 정도…… 몇몇 강의를 같이 들었습니다.”
“류 변호사도 알다시피 세나가 내 딸일세.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이니 비밀도 아니고.”
강현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기에 그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내 딸에게 변호사로서 자질이 있는지 궁금한데.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내 눈엔 너무 욕심이 많아서 걱정일세.”
자신의 딸이 변호사 자질이 있냐고 묻는 대표의 말에 류강현은 학창 시절의 세나를 떠올려보았다. *** 법학과 강의동 계단 아래. 사시사철 그늘진 구석에는 학생들만 아는 흡연 구역이 있었다. 툭 튀어나온 비상계단에 가려 보이지 않는. 강의가 끝난 강현이 그곳에서 홀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흰 부스러기들이 하나, 둘 바닥으로 떨어지길래 뭔가 싶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머리맡으로 흰 종이 부스러기들이 잔뜩 떨어졌다. 처음에는 꽃잎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잘게 부서진 종이에 까만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쓰레기 무단 투기. 폐기물관리법 제8조 제1항 위반. 벌금 오만 원.”
머리에 떨어진 종이들을 한 손으로 툴툴 털고 몇 층인지 세었다. 아직 공중엔 미처 떨어지지 못한 종이 쪼가리들이 팔랑팔랑 흩날리고 있었다.
“바로 밑이 흡연 구역인데 불나면 어쩌려고. 어떤 멍청한 놈이야?”
어떤 놈이 이런 발칙한 짓을 하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강현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툭 던져넣고 계단을 올랐다. 그러다 3층으로 올라서는 난간에서 우뚝 멈춰 섰다. 서러움에 북받친 목소리 때문이었다.
“선배면 선배답게 후배 위할 줄도 알아야지. 거기서 그렇게 쪽 주냐, 진짜. 흑.”
귀에 익은 목소리. 조금 전 강의실에서 격하게 토론을 벌였던 기세나였다.
“재수 없어. 진짜! 누가 몰라? 아니, 뭐 저렇게 기를 쓰고 사람을 깔아뭉개냐. 누가 광견병 걸린 미친개 아니랄까 봐!!
바닥을 직직 그어대는 발소리가 퍽 억울해 보였다. 씩씩대고 흐느끼고 무언가를 북북 찢어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모의법정이 말 그대로 모의법정이지! 아마추어들끼리 경험 좀 쌓겠다는데. 내가 이거 준비하느라 이틀 밤을 꼬박 새웠다고. 악! 억울해! 왜, 왜 거기서 말을 버벅거려서. 내가 그 꼴 안 보려고, 거울 보며 얼마나 연습했는데. 진짜!!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줘야 했는데……. 씨이.”
그녀가 코를 훌쩍이며 욕을 하는 인물이 본인이라는 걸 눈치챈 강현은 벽에 기대어 몸을 낮췄다. 귀여운 후배님의 하소연에 피식 실소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