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호랑말코의 저주2021.07.17.
싸구려면 상표를 뜯으면 그만이지만, 당당히 명품마크를 달고 있어서 쉽게 떼지도 못하는 그런 존재. 게다가 누군가에게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을 모습을 한번 들키고 나니, 어째서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삐거덕거리기만 했다. 그의 앞에만 서면 발가벗겨진 아이처럼 늘 긴장의 연속이었고, 하지 않아도 되는 실수를 종종 하게 되었다. 남들에게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찌질한 제 모습이 류강현, 그 자식에게 웃음거리가 된 것 같았다. 그는 별다른 노력을 하는 것 같지 않은데 뭐든 쉽게 해내고, 뭐든 쉽게 가지니까. 특히 주변에서 자신을 추켜세워주는 꼴을 보며 시큰둥해하는 모습이 제일 꼴 보기 싫었다. K 로펌 파트너 변호사 자리도 그에겐 그런 자리일 것이다. 크게 공을 들이거나 노력 없이 쉽게 차지할 수 있는.
“9년 차 검사 출신. 게다가 특검에 있었으면 지가 사무실을 차리거나, 전관 대우를 해주는 다른 로펌에 가도 될 텐데. 왜 하필 내가 있는 이 로펌이냔 말이야!”
삼재도 아니고 아홉수도 아닌데 망할 놈의 저주가 따로 없다. 호랑말코의 저주.
[왜 안 와? 오늘 출근 안 해?]
출근하기 싫어 뭉그적거리다 보니 아홉 시가 훌쩍 지나있었다. 한여진 변호사의 메시지에 거울로 얼굴 상태를 확인했다. 한숨이 절로 터졌다.
“이 꼴을 하고 출근은 못 하지. 누구 좋으라고.”
세나는 호텔 로비로 전화를 걸어 아이스팩과 간단한 조식을 주문했다.
“어차피 늦은 거 해장이나 하고 가자.”
세나는 ‘출근하는 중인데, 차 사고 났어. 큰 건 아닌데, 병원 좀 들렀다가 갈게. 아마 두어 시간 걸릴 것 같아.’라고 전송한 뒤 핸드폰을 치웠다. 새로 오는 파트너 변호사가 누구냐는 한여진의 물음에 ‘나야 나.’하고 설레발을 안 쳤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랬더라면 아마 쥐구멍은커녕 ‘여기가 내 무덤이요.’ 하고 호텔 객실이 아닌 화장터 불구덩이에 누워있을 테니까. 창가 테이블에 앉아 죽을 한 숟갈 뜨는데 핸드폰이 징, 울렸다.
[오늘 점심 약속 없으면 같이 하지. -류강현]
메시지 마지막에 누구의 번호인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이름 석 자를 보자 치가 떨렸다.
“문자 꼬라지도 딱! 지 같아요. 저기요. 아직도 내가 그쪽 후밴 줄 아세요?”
출근은 했냐, 어제 많이 놀라진 않았냐,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다. 뭐 이런 상투적인 문자부터 먼저 하고 밥을 먹자, 말자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메시지 함에 수신된 그 어디에도 다른 메시지는 없었다. 딸랑 저 한 줄 말고는.
“으으……. 내가 머리에 총 맞았니? 우리가 사이좋게 밥을 먹을 그런 사이가 아니라 씹고 뜯고 맛봐야 하는 사이지.”
세나는 오만상 인상을 찌푸리며 스케줄러를 확인했다. 하필 스케줄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정까지 이 남자가 알 리는 없었다. 오자마자 윗전 노릇에 기가 찼다. 번호는 어떻게 알아낸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답을 해야 했다. 세나는 입을 비쭉 내밀고 투덜투덜 거절의 메시지를 작성했다.
[죄송해요. 오늘 시간이 안 되네요. 의뢰인이랑 미팅이 있어서.]
“뭐라고 답할래? 저녁 먹자고 할 거니? 넌 무조건 거절이야. 자리는 빼앗겨도 내 신임까지는 절대 못 주지.”
좀스러운 마음을 대놓고 표현할 수가 없어 고작 한다는 게 이 정도지만, 생각지 못하게 거절당하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니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세나는 죽그릇 옆에 핸드폰을 내려두고 팔짱을 꼈다. 그러나 메시지를 읽은 것이 분명한데 한참을 기다려도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뭔가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아니 없다. 노력해서 이루지 못했던 것이 있던가? 아니 없다. 태생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모자람 없이 잘 자란 것처럼 보이기 위해 남들 모르게 몇 배로 노력했고, ‘안 되면 되게 하라.’를 신조로 삼아 살아왔다. 그 결과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다 여겼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군가의 눈에 ‘완벽한 기세나’로 비치는 것은 제가 노력해온 결과의 산물이었다. 그런 저를 두고 허영심이 많다고 손가락질할지언정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떤가. 한번 사는 인생, 실수 없고 완벽한 삶이라면 더 좋은 거 아닌가? 그러니 제가 고수한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류강현을 처리해야 하는 게 맞는데……. *** 출근하자마자 비서실장에게 대표실 호출 소식을 들었다. 안 그래도 한바탕 퍼붓고 싶은데 잘됐다 싶어 2층의 대표실로 가는 길. 류강현이 차지하고 있는 파트너 변호사 사무실을 훔쳐보았다.
베스트까지 갖춰 입은 기품있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흑단 나무로 만든 책상에 앉아 등 뒤로 쏟아지는 햇살을 한껏 받으며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남자의 존재 자체가 거슬린다. 그는 오자마자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쉼 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당신이 있는 그 방. 그 방이 내 방이었어야 해. 당신이 앉은 책상. 그 책상이 내 책상이었어야 해.’
도끼눈을 하고 노려보는데, 방 안에 있는 남자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느라 바빠 보였다.
‘누가 보면 여기서 한 십 년 일한 줄 알겠네.’
부러운 마음에 비아냥거리긴 했지만, 확실히 기존에 있던 집무실의 새로운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제집처럼 어울렸다. 하물며 일하는 모습은 또 어떻고. 볼펜 끝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다 서류를 넘기고, 또다시 걸려온 전화를 받고, 그 전화를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운 채 노트북에 뭔가를 입력하는 모습이 흡사 ‘일 잘하는 남자’의 표본이었다. 심지어 팔뚝까지 걷어붙인 와이셔츠마저 완벽해 보였다.
‘그를 밀어내고 저 자리를 차지하는 게 빠를까, 아니면 내가 나가떨어지는 게 빠를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류강현은 그런 남자였다. 빈틈도 없고 누군가에 휘둘린 적도 없고. 대학 시절 모의법정에서도 단 한 번 져본 적 없는 불패의 신화. 검사 측을 할 때도, 변호사 측을 할 때도 그는 언제나 승자였다. 모의법정이란 말 그대로 법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교육 훈련의 목적을 가지고 가상으로 하는 재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상대측을 너덜너덜하게 몰아붙여, 전의를 상실케 만드는 악독한 남자였다.
‘범죄자들 상대할 때야말로 신이 나서 작두라도 탈 사람인데. 왜 뜬금없이 변호사로 나온 건지? 그쪽을 파보면 뭐가 나오려나?’
동기 중 서울중앙지검에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하며 대표실로 걸음을 옮겼다. 대표실에 도착하자 그의 비서가 세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리고 수신호를 주고받은 양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자리를 비켜주자 세나는 일부러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벌컥 열고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아이쿠, 깜짝이야!”
골프 퍼팅 매트 옆에 서서 공을 굴리고 있던 기장수 대표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닫힌 문 앞에 서서 아무 말 않고 있자 한숨을 푹 쉰 기장수가 골프채를 내려놓고 테이블로 걸어왔다.
“……왔으면 앉아. 거기 서 있지 말고. 아침은?”
“대표님 같으면 밥이 넘어가겠어요?”
“성질머리하고는 누굴 닮아서…….”
“내가 누굴 닮았겠어요, 콩 심은 데 콩 나지. 팥 날까. 그것도 모르고 나 물 먹였어요?”
“목소리 낮춰. 김 비서 듣겠다.”
“없어요. 내가 자리 비워달라고 했거든.”
“무……, 뭐? 왜??”
마지막 최후의 방패마저 자리를 비웠다니, 소파 팔걸이를 꼭 쥔 기장수의 주먹이 애처롭게 떨렸다. 자존심 하나만큼은 63빌딩보다 드높은 제 딸이 뭐라 쏘아붙일까, 심장이 떨려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왜?? 딸내미 뒤통수쳐놓고 무사히 넘어갈 거로 생각했어요? 내가 누군지 다시 말해줘? 애지중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K 로펌 대표 기장수의 외동딸이잖아요!!”
“야야, 기세나! 아침부터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아빠 귀 안 먹었어.”
“귀는 안 먹었는데, 그럼 양심을 술안주로 잡수셨나? 나한테 어떻게 그래요?? 차라리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지 그랬어요? 그럼 배신감에 이렇게 허탈하지도 않을 거야. 아빤 딸을 그렇게 몰라??”
“……알지. 너무 잘 알아서 달래주려고 불렀잖냐.”
“병 주고 약 줘? 여태껏 실컷 부려 먹고! 나도 낙하산 소리 듣기 싫어서 밑바닥부터 기어 올라왔어요! 아빠 덕 봐서 한 자리 차지한 거 아니냔 소리 듣기 싫어서.”
“…….”
“내가 언제 거저 달라고 했어요?? 나 밤낮없이 일해서 우리 로펌 매출 탑도 찍어 봤고! 어쏘들도 잘 키웠어! 이혼전문가로는 이 바닥에서 나름 유명하기까지 해! 그런 내가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파트너 변호사가 못 되는데요?!”
다다다 숨 쉴 틈도 없이 쏘아붙였다. 말하면서도 억울했다. 울컥 치밀어오른 울분을 삭이려 식식대는데 세나의 말을 듣고 있던 기장수가 나직한 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아빠는 네가 고생도 많이 하고 노력한 거 누구보다 잘 알지.”
“근데, 이유가 뭔데요?”
“이사들 눈엔 네가 파트너 변호사를 하기엔 이혼 전문이다 보니, 영업적인 측면에서 다른 쪽 변호사가 더 파트너에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거지.”
“여자라서가 아니고?”
세나의 일침에 기대표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지분이 제일 많은 대표라 하더라도 다른 이사들의 말을 허투루 흘릴 수는 없는 거 알아요. 근데, 대표님은 그럴 수 있어도 아빠는 나한테 그럼 안 되지.”
기대표는 나이도 어리고, 여자인 데다 시집도 안 간 처녀라 훗날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른다던 이사들의 말을 제 딸에게 차마 전할 수 없었다. 저 고집쟁이가 납득할 만한 이유 역시 찾지 못했다. 기장수는 에라 모르겠다. 그냥 그동안 마음에만 담아두고 있던 말을 던졌다.
“파트너가 되면 로펌의 전체매출뿐만 아니라 개인 실적과 영업 쪽도 책임져야 하는데, 왜 그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하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거냐? 그냥 맘 편히 너 하고픈 거 하다가 좋은 남자 만나 편하게 살면 그만인 것을.”
“내가 남자나 만나서 편하게 놀고먹을 거면, 애초에 왜 힘들게 노력해서 변호사가 됐겠어요? 그냥 아빠한테 용돈이나 받아 살면 되지!”
“이제라도 그럴래? 아빤 그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아빠!!!”
고막을 직격으로 때리는 날카로운 외침에 기장수는 귀를 막았다. 그러다 세나의 눈이 향한 곳을 확인한 그가 화들짝 놀라 소파 옆 협탁에 놓인 분재 화분을 감싸 안았다. 아름답게 똬리를 튼 소나무 분재였다.
“이것만은 안 돼!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불과 일여 년 전 애지중지 키운 고급 난들이 세나의 가위질에 처참히 잘려 나갔었다. 저놈의 성질머리라면 이 여린 생명을 가차 없이 부러트릴 것이다.
“와- 나, 되게 서운하네. 지금 나보다 더 그게 중요해요?”
“어차피 내가 죽고 나면 로펌도 다 네 건데, 그냥 편하게 가면 안 되겠니?”
“그걸 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