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피하고 싶은 맹견2021.07.13.
사무실로 돌아오자 아침보다 더 어수선한 분위기에 어리둥절해졌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점심시간 지난 지가 언젠데.”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사무실을 둘러봤다. 머리를 맞대고 속삭이는 직원을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아침에 메신저를 보낸 동료 변호사 한여진이 불쑥 나타나 세나의 팔짱을 꼈다.
“기 변! 어디 갔다 와?!”
바람난 새끼 조지러 갔다 왔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외부 미팅 다녀왔다고 둘러대는데, 한여진 변호사가 목소리를 죽이며 세나를 방으로 이끌었다.
“점심시간 지난 지가 언젠데, 분위기가 왜 이렇게 술렁거리는 거야?”
“야. 너 없을 때 장난 아니었어!”
“왜? 누가 사고라도 쳤어?”
방문까지 닫아가며 조심스러워하는 태도에 세나도 덩달아 조심스러워졌다.
“너 파트너 변호사로 누가 오는지 진짜 몰랐어?”
“아아…….”
그새를 못 참고 발표를 했나? 내일까지 좀 기다리지. 오늘은 정말 혼자 축하하고 싶었는데. 자기보다 먼저 파트너 변호사를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으니 한여진이 샘을 낼 만도 했다. 그래도 너무 티 나게 좋아하면 빈정 상할 게 분명하니 괜히 미안한 척 애매한 웃음을 얼굴에 둘렀다.
“미안. 너도 알잖아. 나 진짜 많이 노…….”
“너랑 동문이라던데? 정말 몰랐어?”
“응? 나랑 동문?”
한여진의 눈에 의심이 가득했다. 세나는 그게 무슨 소리지, 하는 표정을 짓다 이내 얼굴을 풀었다. 아아. 아직 누군지는 모르나? 이력만 떴나 보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다음 질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유명한 검사라던데 왜 그런 검사가 옷 벗고 여기로 온 거지? 너 정말 아는 거 없어?”
“잠깐만……, 뭐? 거, 검사?”
“뭐야? 너 진짜 몰랐어?? 조금 전 파트너 변호사로 온 남자 때문에 완전 난리 났잖아!”
검사라는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눈을 홉뜬 세나를 보고 한여진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그녀는 세나의 등을 찰싹 소리 나게 치며 새로 온 파트너 변호사에 대해 주르륵 읊었다.
“서른다섯이라던데, 얼굴은 더 대박. 간만에 눈 호강했잖니. 키는 또 어찌나 큰지, 성큼성큼 걸을 때마다 바람 소리 들리겠더라. 지금 대표님 방에서 이사들이랑 인사하고 있을걸? 나가는 길에 봐. 세 살 차이면 아마 너도 아는 사람일 거야.”
서른다섯 살. 검사 출신. 남자. 서른두 살의 기세나. 내가 아니라? 자그마치 칠 년을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한 기세나가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검사 나부랭이가 파트너 변호사를 차지했다고? 왜? 내가 뭐가 모자라서?? 여자라서? 아니면 경력이 모자라서? 내가 왜! 홉떠진 눈알이 빠르게 굴러갔지만, 한여진이 조잘대는 그 검사 출신 파트너 변호사와 자신 사이에는 거리감이 꽤 있어 보였다.
“설마, 나 물 먹은 거야??”
“응? 물?”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 분명 오늘만 지나면 위층에 있는 파트너 변호사 사무실이 제 것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세나는 문 앞을 막고 있는 한여진을 밀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두 칸씩 지르밟으며 올라갔다. 그리고 마지막 계단을 남겨두고 계단을 내려오는 남자와 부딪혔다.
“꺅!”
뒤로 나자빠질 뻔한 위험천만한 순간 남자가 휘청이는 세나의 팔뚝을 낚아채 멈춰 세웠다. 웬만한 성인 남성쯤은 가뿐하게 제압할 수 있을법한 힘과 커다란 손아귀에 덕분에 아찔한 순간을 모면했다. 그러나 세나에게는 감사 인사보다 그 파트너 변호사라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게 급선무였다. 어떤 호랑 말코 같은 새끼가 내 자리를!!! 감히 내 자리를 뺏으러 온 몰상식한 치가 누군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 했다.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급해서……!”
“여전히 눈을 얻다 두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네.”
“…….”
자로 잰 듯 반듯한 눈썹과 오만하리만치 높게 솟은 콧대. 운동선수와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는 큰 키와 다부진 어깨. 제 팔뚝을 단단히 거머쥔 커다란 손.
‘아니야. 이건 꿈일 거야. 말도 안 돼.’
졸업과 동시에 두 번 다시 보지 않아도 돼서 홀가분함까지 느끼게 했던 악연. 자신의 지우고 싶은 흑역사의 산증인.
‘꿈이라면 깨야 한다. 이건 악몽이니까.’
세나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세차게 흔들리는 동공은 착실하게도 제 기능을 잃지 않았다. 차라리 앞이 보이지 않았으면 좋았으련만, 넘어지기 직전의 세나를 붙들어준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은 또렷하게 보였다.
피하고 싶은 맹견 류강현.
“선배……. 가 왜 거기서 나와……?”
왜 여기 있냐고, 당신이 새로 온 파트너 변호사냐고 물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탈곡기로 탈탈 털린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때마침 대표실 문이 열리고 기장수와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나오던 이사들이 계단에 멈춰 서 있는 기세나와 류강현을 보고 한마디씩 던졌다.
“벌써 인사했나? 우리 로펌의 자랑 기세나 변호사랑?”
“동문이라더니 아는 사인가 보군.”
“특수부 출신 검사가 파트너 변호사로 오니 이제 K 로펌도 더욱 내실을 다질 수 있겠지. 기대하네. 류강현 검사. 아니 이제 류 변호사지.”
그들이 세나와 강현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류강현은 별다른 말 없이 그들에게 길을 터줬고, 세나의 낯빛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회포는 나중에 풀고, 일단 점심부터 하러 가지. 류강현 변호사.”
세나의 레이저 눈을 의식한 기장수가 마지막으로 계단을 내려가며 류강현의 어깨를 툭 쳤다.
“아……!!”
하마터면 자신을 모른 척 지나치려는 기장수를 보고 대표님이 아닌 ‘아빠’라고 부를뻔했다. 세나는 재빨리 입을 다물고 제 아비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시근거렸다. 그러자 가벼운 한숨을 쉰 뒤 뒤를 돌아본 기장수가 ‘나중에’라며 입 모양으로 말을 했다. 되려 그 모습에 설움이 폭발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아버지에게 뒤통수를 맞은 꼴이었다. 소리를 빽! 지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아직 자신의 옆에 류강현이 고목 나무처럼 뻐젓이 서 있었다.
“인사는 내일 하지. 기세나.”
머리맡에서 울리는 낮은 중저음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리고 흩어지듯 따라붙은 짧은 웃음소리. 분명 들릴 듯 말 듯한 웃음소리였는데, 세나의 귀에는 지옥에서 올라온 수문장이 네까짓 게 감히 이 자리를 넘봐?! 하며 저를 비웃는 것처럼 왕왕 울렸다. ***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세나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고 책상에 머리를 쾅 찍었다. 꿈이 아니다. 이마도 아팠지만, 류강현의 손아귀에 잡혔던 팔뚝 또한 여전히 욱신거렸다. 불과 한 시간 전에도 남자 때문에 울었는데. 이젠 또 다른 남자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한다니. 도대체 오늘 일진이 얼마나 사납길래 이따위냐. 아침에 보았던 별자리 운세엔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고 분명 쓰여있었는데. 새로운 인연이 악연이었구나. 세나는 손목을 살짝 비틀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책상 제일 밑 서랍을 열었다. 로즈골드의 금박 포장지가 스탠드 조명을 받아 더욱 영롱하게 빛이 났다. 오늘을 위해 거금을 들여 산 ‘돔 페리뇽 빈티지 로제’였다. 근사한 호텔 방에서 욕조에 장미꽃잎을 띄우고 예쁘게 잘빠진 샴페인 잔에 이 핑크빛 술을 가득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하루를 마무리하려던 계획이 산산조각이 났다. 심지어 당일 예약 취소는 안 된다는 호텔직원의 말에 울며 겨자 먹기로 퇴근 후 호텔을 찾았다. 창 너머로 보이는 야경이 아름다워 다른 객실에 비해 조금 더 비싼 값을 하는 방에서 세나는 잔도 없이 돔 페리뇽의 얇은 병목을 잡고 침대에 드러누워 한 병을 모조리 비워냈다. 물론 혼자 쓰기 넓은 욕조는 아침까지 뽀송뽀송하게 말라 있었고, 장미꽃은 당연히 없었다. 오직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실크 시트와 베개만이 엉망으로 젖었다. *** 골을 지끈하게 울리는 숙취와 퉁퉁 부어오른 눈 때문에 기세나는 아침부터 저기압이었다.
“아……. 죽을 것 같아……. 으…….”
베개에 머리를 묻고 비비적거리기를 십여 분. 세나는 무거운 머리를 이고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속이 부글부글한 게 어제의 술 때문인지, 고지를 목전에 두고 추락했기 때문인지 잠깐 고민했지만, 정답은 둘 다였다. 그녀가 비척대는 걸음으로 미니바로 향하는데 빈 샴페인 병이 발치에 채였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야무지게 비운 빈 병을 발로 툭 차 멀찌감치 밀어버리고 냉장고에서 캔 음료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시원한 캔의 표면으로 눈두덩이를 마사지하며 도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멍하게 있다 쓴웃음이 터졌다.
“하아……. 망할 영감탱이들! 내가 어떻게 쌓아 올린 건데!”
K 로펌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이사진들이 수를 쓴 게 분명하다.
“돈을 벌어다 줄 때는 잘한다, 잘한다,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하더니. 막상 파트너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주기엔 여자라서 안 된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 기업을 상대할 수 있고 영업력 있는 다른 변호사가 필요하다는 등 같잖은 소리를 했겠지.”
뻔한 스토리. 유리천장이라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서 매달 나오는 배당금이나 받아먹을 것이지! 내가 로펌에 벌어다 주는 수익이 얼만데!! 자그마치 매출의 10%를 차지한다고! 그런데 나를 까?! 능글맞은 구렁이들 같으니라고!”
백여 명에 가까운 변호사가 상주하고 있는 로펌에서 혼자 매출의 10%를 낸다는 건 파트너 변호사로서의 자격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때는 난다 긴다 하던 변호사들이 나이를 먹고 지분변호사가 되거나 이사가 되어, 한 달에 한 건 수임할까 말까 하면서도 억대 연봉을 챙겨가는 것도 배가 아픈데, 쓸데없는 돈 욕심까지 있으니 여간 아니꼬운 게 아니었다. 파트너 변호사가 되는 절호의 기회가 날아가 버렸으니 더욱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또 언제 자리가 날 줄 알고 기다려…….”
목적지를 향해 부지런히 내달리던 열차가 탈선해 버린 듯 몸과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아! 짜증 나!!”
왜 하필. 지금. 이 중요한 순간에. 그 인간이 등장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끝낸 줄 알았던 악연이 다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잊을만하면 떠오르는 콧물 고백 사건과 그때 이후로 1년 넘게 류강현에게 시달린 걸 생각하면 부끄러움에 열이 올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사법연수원으로 곧장 갈 줄 알았는데, 도대체 무슨 심보인지 졸업까지 유예한 류강현과 세나는 매번 강의실에서 마주쳐야 했다. 그때마다 몰려오는 수치심에 추운 날에도 땀이 삐질 흘렀다.
"하여튼 멀끔한 얼굴로 여간 신경을 긁어댄 게 아니었지."
기세나에게 류강현이라는 남자는 옷을 입었는데 목덜미를 자꾸만 따끔따끔 찌르는 상표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