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나 이혼 전문변호사야2021.07.10.
“어……, 어?!”
“언제 말하나 했네. 하마터면 숨넘어갈 뻔했어.”
“바람이라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건 순전히 우리 둘 문제야!”
남자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벌떡 일어나 화를 내려다, 세나가 팔짱을 끼며 ‘앉아’하고 낮게 중얼거리자 사색이 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너. 내가 사준 가방 들고 여행 다녀왔더라?”
“……무, 무슨 소리야…….”
“세부는 재밌었니? 이맘때가 놀러 가기 좋은 시즌이지.”
“어, 어떻게 알았어?”
세나는 자신의 핸드폰을 손에 들고 메신저 앱을 열었다. 그리고 ‘추천 친구’에 떠 있는 한 여자의 프로필을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여행용 드레스 원피스를 입고 예쁘게 웃고 있는 어린 여자의 어깨 위로 떡하니 보이는, 손목에 걸린 시계와 가방이 한눈에 보아도 딱 자신의 남자친구였다. 설마 했는데 디데이 날짜까지 친히 알려주시는 걸 보고 확신했다. 무려 100일 기념 여행이었다.
“네가 직접 와서 말하지 않았으면, 이 여자가 나한테 찾아와 고백할 기세던데? 보란 듯이 프로필에 어그로성 사진으로 시선까지 끌고 말이야. 그 여자가 내 전화번호까지 저장했나 봐?”
“난 모르는 소리야. 세나야! 내 말 좀 들어 봐. 바람이라니 그런 거 아냐. 걔는 그냥 학교 친한 후배-”
“개소리는 적당히 하시고. 그 여자는 너에 대해 얼마나 안대?”
“무, 뭘?”
“네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절반 이상이 내가 해 준 거라는 거 알고는 있고?”
“…….”
“하긴, 연구실에 처박혀 놀 줄도 모르고, 멋도 모르던 널 사람으로 만들어줬더니, 진짜 지가 잘나서 그런 줄 알았나 봐.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는 그런 네 모습이 좋았던 거고.”
“기세나. 잠깐 내 말 좀-.”
“내가 방긋방긋 웃으며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주니까 돈 많은 호구인 줄 알았나 봐?”
“그, 그런 거 아니야. 세나야. 정말 오해야.”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어조에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커피잔을 쥔 손까지 벌벌 떨어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가소로웠다. 이런 놈을 이 년씩이나 만났다니.
“왜? 내가 준 거 다 내놓고 꺼지라고 할까 봐?”
“…….”
“추잡스럽게 줬던 걸 뺏겠니? 나 기세나야. 어차피 줘도 쓰레기통에 버릴 거 굳이 귀찮게. 그러니까 얼굴 펴.”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며 안도의 숨을 뱉었다. 그 모습에 세나의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고작 이런 새끼를 만나려고 2년 동안 돈이랑 시간을 썼구나. 적어도 솔직하게 다른 여자 생겼다고 말했으면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을 텐데. 심지어 할리우드 스타처럼 쿨하게 서로의 앞날을 축복해줄 수도 있었다. 그의 한심한 모습에 자존심에 굵은 스크래치가 새겨졌다. 이대로 멋지게 돌아서 저 문을 나가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저 한심한 놈의 낯짝이 구겨질 대로 구겨지는 꼴을 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너같이 덜떨어진 놈이 하는 짓이야 뻔하지. 근데 바람은 그렇다 치고 헤어지자고 하는 거 보니 사고 쳤나 보네. 임신이라도 했대?”
“그건 어떻게…….”
세나는 ‘뭐 이런 쪼다가 다 있지?’ 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일그러트리다 짧게 한숨을 쉬었다. 더는 이야기 해봐야 시간 낭비다 싶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옆구리에 끼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세차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세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이렇게 끝이야?’ 하는 얼굴이었다. 생각보다 허무했다. 때 묻지 않은 순진한 눈망울이 마음에 들어 만났다. 손 한번 잡을 때마다 땀이 차고, 살짝 떨기까지 하는 순박함에 바람만큼은 피지 않으리라 여겼던 적도 있었다. ‘너 같은 여자가 왜 날 좋아해 주는지 모르겠다’라고, 그래서 더 잘하겠다 다짐하는 청년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제는 저 순진한 눈망울이 미련스럽기까지 해 보였다. 세나는 출입문을 향해 돌렸던 몸을 다시 남자를 향해 틀었다. 남자는 자신을 향해 또각또각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세나의 기세에 놀라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리고 물 싸대기라도 날릴세라 재빨리 잔을 비웠다. 끝까지 한심하다. 어디 가서 이런 놈을 만났다는 게 소문이라도 날까 쪽팔려 미칠 지경이었다. 세나는 긴 한숨을 흘리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 애가 네 애는 맞고?”
“……그건 무슨 소리야?”
“그 머리로 박사는 무슨.”
세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남자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다 혀를 찼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명함 케이스를 꺼내 명함 한 장을 손에 들었다. 사무실 번호가 찍혀 있는 명함을 남자 쪽 테이블에 턱하니 내려놓았다.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라는 말은 안 나온다. 너 곧 나 찾아올 것 같거든.”
“그 정도로 한심한 놈 아니야. 나.”
“그게 아니라. 너 꼬락서니 보니 이혼할 것 같아서.”
“뭐??”
“전화는 하지 마, 오늘부로 차단할 거니까. 대신 수임료 빵빵하게 들고 오면 만나는 줄게.”
네모반듯한 흰 명함을 응시하는 남자를 보며 세나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하긴 내가 뭘 하는지 관심이나 있었겠어? 그저 돈 잘 쓰고 바쁜 줄만 알았겠지.”
남자의 눈이 명함에 적힌 ‘기세나’라는 이름 위에 있는 글자로 향했다.
“나 이혼 전문변호사야.”
*** 자고로 남자는 오무(五無)라는 말이 있다. 보증, 도박, 폭력, 주사, 바람. 이 다섯 가지만 없으면 된다고. 세나에게는 그중에서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게 바람. 즉 양다리였다. 멋대가리 하나 없는 놈을 고른 이유도 절대 바람만큼은 안 필 것 같았던 순박한 인상 때문이었다. 부족한 건 자신이 채워주면 되니까. 그런데 바람이라니!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분 단위로 분노가 차올랐다. 그 분노를 해소하지 않으면 도저히 표정을 관리할 수가 없어 차를 끌로 도로로 나왔다. 점심시간이 끝난 시간이라 테헤란로는 한산했다. 세나는 하이힐을 신을 발로 액셀을 콱콱 밟으려다 꾹 눌러 참았다. 이 분노를 시속 140km의 질주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여기가 테헤란로가 아니라 고속도로여야 했다. 그 대신 한 손으로 핸들을 조작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음악을 틀었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한 이별이라고 해도 이별은 이별이었다. 바깥의 소음이 들리지 않도록 창문을 꼭꼭 닫아두고 볼륨을 높였다.
“함부로 나를 대하지 마-------!”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부르던 목청은 고음 부분으로 치받을수록 드세졌다. 사람의 마음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던 남자에게 고하는 이별 노래의 가사가 마음에 콱 박혀,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일부러 선곡해놓고도 실제로 가사를 따라부르니 기분이 더 거지 같아졌다.
“……넌 내게, 가라가라 마라, 니가 도대체 잘난 게 또 뭔데, 개 같은 놈, 내가, 흐흡……. 지한테 어떻게 했는데……!”
내게도 자존심이 있다. 사랑 따윈 구걸하지 않아. 감히 이렇게 완벽한 날 두고 바람이라니. 어디 한번 잘살아 보라지! 한심한 새끼! 찌질한 놈! 씹다 버린 껌보다 못한 새끼!
“흐어엉……! 이 순간 내가 우는 건, 흡, 이별이, 슬퍼서, 아냐……! 쏟았던 내 사랑이 허탈, 흐윽!”
앞 유리를 통과한 햇살이 직선의 궤도로 눈을 찔러와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청명한 하늘, 티 없이 맑은 날씨에 욕이 절로 쏟아졌다.
“흐……, 햇볕이 쨍해서 더 뭣 같아악!!”
운전하고 있는 핸들을 손바닥으로 탕탕 내려치며 큰 목소리로 소찬휘의 ‘CHANGE’를 따라불렀다. 세나는 박자에 맞춰 흐늘흐늘,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지나가는 차들이 함께 흔들리는 차를 보고 뭐라고 할지언정, 세나는 분이 풀릴 때까지 목청껏 노래를 따라부르며 펑펑 울었다. 그렇게 강남 일대를 한 바퀴 돌 때쯤 눈물도 말라갔다. 사무실 근처로 돌아와 횡단보도 신호에 멈춰 섰다. 울음을 삭이며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데, 옆 차선에 선 차량에서 ‘빵!’ 클랙슨이 울렸다.
“뭐야??”
아무것도 없는데 웬 클랙슨? 하고 고개를 돌리자, 횡단보도의 초록 불이 깜빡깜빡 곧 빨간불로 바뀔 조짐이었다. 그러나 아직 건널목엔 사람이 있었다. 허리가 굽어 걸음이 느린 할머니 한 분이 자신에게 클랙슨을 울린 차의 눈치를 보며 힘들게 발을 놀렸다. 곧이어 보행자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고, 이때다 싶은 차주가 ‘빵빵!’ 하고 재차 클랙슨을 울렸다.
“좀 기다려주지. 뭐 얼마나 빨리 가려고. 그러다 황천길도 빨리 가겠네.”
클랙슨 소리에 깜짝 놀란 할머니가 몸을 휘청이는 순간, 상대 차량이 위협적인 엔진음을 울렸다. 혀를 ‘쯧’하고 찬 세나가 옆 차선의 차주를 노려보았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놈이 낄낄거리며 웃었고, 그 옆엔 할머니를 손가락질하는 다른 한 놈도 눈에 들어왔다.
“저런 싸가지 없는 놈들.”
할머니가 건널목을 다 건너자마자, 놈들의 차가 곧바로 출발했다. 그 움직임에 놀란 할머니가 뒤로 넘어질 수도 있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세나는 그에 질세라 액셀을 밟았다. 제로백으로 치자면 그녀의 스포츠카가 훨씬 빠르니까. 그리고 싹수없는 놈들의 차 앞으로 잽싸게 끼어들어 브레이크를 콱 밟았다. 뒤따라오던 차가 클랙슨을 ‘빵!’ 울리며 옆으로 오더니 차창까지 내려가며 욕설을 퍼붓는다. 뭐라고 소리를 치는 것 같은데, 유리창에 막혀 웅성웅성 들리기만 할 뿐 타격감이 제로였다. 세나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추스르지도 않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운전석 창에 이마를 꾹 문지르며 창 너머 옆 차선의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자고로 오무라고……. 오무. 넌 딱 보니 무뢰배 관상이다. 이목구비가 폭력적이네……."
눈썹이 독이 잔뜩 오른 새처럼 휜 남자가 손가락질까지 해대며 뭔 말을 마구 퍼부었다. 분명 욕이겠지. 알게 뭐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지. 저런 놈들에게는 원시적인 방법이 제격이다. 세나가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엄지를 추켜세웠다. 꼿꼿이 세워진 엄지를 보는 남자들의 시선이 의아하게 풀어지는 것을 확인한 순간, 세나는 어느 때보다 빵긋 웃으며 자신의 목 아래를 쓱, 그었다. 그와 동시에 옆 차선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씹다 버린 껌을 싸는 종이처럼. 할 말을 잃은 남자는 세나를 미친년 취급하며 몇 번인가 더 욕설을 날리다 제풀에 지쳐 사라졌다.
“하아……. 별게 다 지랄이야.”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긴 숨을 몰아쉬고 고개를 들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한데 모아 높게 묶었다. 그러고는 머리 위의 선바이저를 내려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검게 번진 마스카라와 볼 부근을 붉게 만든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눈꼬리에 매달린 미처 닦지 못한 눈물방울도. 코를 한번 훌쩍인 세나는 손끝으로 얼룩진 마스카라와 눈물을 쓱쓱 닦아냈다.
“오케이. 여기까지. 난 쿨하니까.”
곧이어 보조석에 놔둔 가방을 앞으로 가져와 팩트를 꺼내 들고 눈가와 볼을 야무지게 두들겼다. 얼룩덜룩한 마스카라 자국도 꼼꼼히 지우고 마지막으로 레드오렌지 빛깔의 립스틱도 덧발랐다. 거울 속 얼굴이 아침에 봤던 완벽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이별은 이별이고 승진은 승진이지. 내가 울 때가 아니야. 샴페인을 터트릴 때지.”
어차피 바람피우는 놈이란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정이 뚝 떨어졌었다. 단지 그런 하찮은 놈 때문에 자신의 감정과 기분이 오락가락한다는 게 더 자존심 상한 거지. 잊으면 그만이고 그 새끼보다 더 멋진 놈을 만나면 그만이다. 그녀의 입술만큼 새빨간 스포츠카가 기분 좋은 엔진소리를 내며 회사 주차장으로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