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결자해지(結者解之)2021.07.06.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진 사람처럼 망연자실해 있던 세나는 콧물을 훔칠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휘이잉- 서릿발 같은 눈보라가 귓가를 서늘하게 스쳤다.
“……가지가지 한다. 기세나.”
네. 가지가지 하지요. 하느님 여기가 지옥이라면 제 죄명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임자 있는 남자에게 고백하려 했던 못된 이기심 때문인가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아무래도 저 휴학해야겠죠? 스물두 살. 기세나 인생에 다시 없을 흑역사가 만들어지는 현장이었다. *** 매년 첫눈이 올 때면 불쑥불쑥 떠오르는 찌질한 고백에 세나는 연중행사로 이불킥을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치기 어리고 순진했던 그때와 다르다. 찌질한 과거를 이겨내고 누구나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전문직 여성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바라고 바라왔던 하나의 목표를 이루는 날이었다. 그런 줄 알았다. 과학기술이 더욱 발전해 기억을 지워주는 기계 같은 게 개발된다면 억만금을 주어서라도 지우고 싶은 흑역사의 증인이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새로운 소식에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놀라 방에서 튀어나왔다. 다급히 뛰어 올라간 계단에서 이제 막 내려오려는 남자와 부딪힐 뻔했다. 처음에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브라운 윙팁 슈즈가 보였다. 복숭아뼈를 살짝 가리는 기장의 슈트 팬츠의 주름은 칼날처럼 일자로 쭉 뻗어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올리자 다부진 몸매를 가리고 있는 베스트와 한쪽 팔에 걸쳐둔 재킷이 눈에 들어왔다. 세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핥으며 흔들리는 시선을 마저 들어 올렸다. 시원하게 뻗은 눈매는 여전히 사납고, 살풋 찡그려진 눈썹에서 드러나는 위압감은 십 년 전 그대로였다. 아, 왜. 왜 하필! 그때와 똑같이 툭 벌어진 입술에선 반사적으로 앓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나직한 한마디가 형체를 갖춰 불쑥 솟았다.
“선배……가 왜 거기서 나와……???”
*** 아직 봄이라고 부르기엔 쌀쌀한 날씨. 그러나 유난히 햇볕이 내리쬐는 정오였다. 세나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사무실 한쪽 편 옷걸이에 걸어두고 히터를 약하게 틀었다. 그러고는 책상 앞으로 걸어와 상아색 슈트의 재킷의 단추를 풀고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띠링’ 하고 사내 메신저 알림이 울린다.
[기 변, 오늘 파트너 변호사 선정하는 날인데 누가 오는지 알아?]
K 법무법인에 함께 입사한 동료 변호사는 출근하자마자 위층에서 일어나는 이사회 소집에 두 귀를 열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나는 채팅창에 뭐라 쓸까 잠시 망설이다 ‘글쎄 모르겠는데…….’하고 답했다. K 법무법인. K라는 이니셜을 어디서 따온 것인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자그마치 7년. 어쏘 2년에 시니어 변호사를 단 지 5년 차. K 법무법인의 지분도 소량 가지고 있는 기세나는 오늘만을 기다려왔다. 파트너 변호사라는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K 법무법인의 대표변호사가 되는 날을. 내일이면 당당히 파트너 변호사로 출근 도장을 찍을 테니 오늘은 이 사실을 저 혼자 만끽하고 싶었다. 귀까지 걸린 웃음을 애써 지우며 스케줄러를 보았다. 아직 첫 상담 예약 시간까지 얼추 삼십 분이 남아있었다. ***
세나는 책상 위의 수첩과 태블릿 피시를 한 손에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방을 나와 같은 층 복도 끝에 있는 직원 휴게실로 발걸음을 옮기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K 법무법인은 서초동에 있는 15층짜리 빌딩 펜트하우스에 상주한 회사였다. 아래층엔 시니어 변호사들의 작은 사무실이 있었고, 주니어 변호사들과 조사원, 사무장의 데스크가 중앙에 빼곡히 자리하고 있는 대형 로펌. 위층엔 클라이언트를 위한 미팅룸과 파트너 변호사의 개인 집무실, 제일 좋은 위치엔 K 법무법인의 대표실이 있었다. 누가 말했던가. 계급에 대한 욕망이 높을수록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싶어 한다고. 세나는 5평 남짓한 제 사무실과 위층에 파트너 변호사들의 사무실을 비교해보았다. 탁 트인 통유리창에서 쏟아지는 햇살 하며, 따로 미팅룸을 예약하지 않아도 간단한 미팅 정도는 개인 사무실의 편안한 소파에서 고객을 맞이할 수 있는 넓은 방을.
‘내가 저 위에 사무실 하나를 내 걸로 만들려고 그간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내일이면 복작복작한 아래층이 아닌 위층으로 출근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휴게실로 당당히 들어섰다. 커다란 머그잔에 커피 한잔을 내려 손에 들고 창가로 걸어갔다. 이른 아침부터 휴게실에는 전날 야근으로 다크서클이 눈 밑에 짙게 드리운 주니어 변호사들이 광합성을 위해 창가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었다. 세나는 창문에 비치는 그들의 모습을 상기하며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옷도 제대로 못 갈아입어서 꼬질꼬질하고 얼굴엔 윤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초짜 변호사였던 때. 반짝반짝 빛이 나는 시니어 변호사들을 보며 마치 아기 새가 어미 새를 우러러보는 심정이었다.
‘그때는 아침부터 사우나에서 겨우 씻고 나와 또 개미처럼 일했었지.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지금은 몇 날 며칠을 입어도 티가 안 나는 우중충한 블랙 슈트가 아닌 화사하고 밝은 색감의 슈트를 입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며 빙긋한 웃음을 지었다. 게다가 하이힐! 다리가 가장 예뻐 보인다는 11cm의 하이힐을 신고, 무거운 서류 가방 대신에 켈리 백을 손에 든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세나는 아기 새들의 부러운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입가에 여유로운 웃음을 띠었다. 더 우아하고 더 지적으로 보이도록. 커피가 너무 쓴 게 흠이지만 티 내지 않았다. 모름지기 인생의 쓴맛과 닮은 아메리카노는 바쁜 현대인으로서 꼭 즐겨야 하는 음료이니까. 30대 초반의 잘나가는 변호사, 전문직 여성, 더 나아가 한 그룹을 책임지는 파트너 변호사.
‘기세나 변호사님 진짜 너무 멋있어요.’
‘선배님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제 우상이에요!’
‘저도 기 변호사님처럼 되고 싶어요.’
‘어쩜, 얼굴도 예쁜데, 똑똑하기까지 해요? 부러워요.’
입에 발린 소리일지언정 저를 향한 존경 어린 시선을 느낄 때면, 남들의 눈에 비치는 완벽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 같아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그럴 때마다, ‘아니야, 나도 실수하고 혼나고, 그런 때가 있었어.’ 내지는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냐, 좋게 봐주니까 부끄럽다. 호호호.’라며 겸손을 가장한 가식을 떨기도 했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유유자적 호수를 노니는 우아한 백조가 되기 위해 물 아래서 얼마나 발버둥을 치는지는 알고 하는 소리니? 너희들도 나처럼 되려면 그 정도 노력은 해야지, 이게 그냥 거저 얻어지는 일인 줄 알아?’ 하며 내심 비웃기도 했다. 그것은 세나의 궁극적인 인생의 환희였다. 누군가에게나 칭송받는 삶. 더는 이 세상에 ‘찌질한 기세나’는 없다. 그렇게 직원 휴게실에서 허영심을 채우고 있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수신인을 확인 세나의 미간에 옅게 주름이 파였다.
‘그냥 그대로 쭉 잠수를 탈 것이지. 하필 기분 좋은 아침부터 연락은.’
일주일 전 돌연 잠수를 탄 남자친구 놈의 전화였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중 전화는 끊겼다.
‘참을성도 없는 놈. 고작 30초를 못 참고.’
속으로 혀를 끌끌 차는데 플래시가 깜빡깜빡, 문자가 들어왔다.
[오늘 점심에 좀 볼 수 있을까? 내가 사무실 쪽으로 갈게.]
세나는 한쪽 입꼬리를 귓가에 걸어두고 핸드폰을 한참 노려보았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했다. 쓸데없는 인연에 목맬 필요가 있을까? 질질 끌고 가기 전에 싹을 도려내야 하는 게 맞다. 내일이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테니까.
“굳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시겠다. 그래. 어디 한번 들어나 줄까?”
*** 세나는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카페에 앉아, 곧 전 남친이 될 놈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완벽한 자신에게 유일한 흠이 돼 버린 사람.
“할 말이 뭔데?”
“…….”
“할 말 있어서 보자고 한 거 아니야? 그렇게 입 다물고 앉아만 있을 거면 문자로 하지 그랬어.”
짜증이 다분히 섞인 세나의 말투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기세나.”
“왜?”
“너 나 아직도 사랑해?”
“본론만 말해. 되도록 짧게. 나 시간 없어.”
세나의 일침에 남자는 상처받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세나는 확신했다. 저놈의 입에서 곧 헤어지자는 소리가 나올 거란 것을. 일주일씩이나 잠수를 타는 동안 분명 핑곗거리를 만들어내려 골치가 아팠겠지. 다만 저 입으로 진실을 고하길, 일말의 기대가 있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난 지 2년 동안 나는 좀 많이 힘들었어.”
아, 슬슬 시동을 거는구나. 밑밥 깔기. 남자는 손끝으로 안경테를 추슬렀다. 그 남자의 콧등에 걸려있는 검은색 뿔테 안경은 오십만 원이 훌쩍 넘는 명품 안경테였다. 세나가 사준.
“넌 늘 바쁘고, 일할 때는 연락도 잘되지 않잖아. 내가 연락을 끊으면 네가 한 번이라도 찾아올 줄 알았어…….”
지랄하고 있네. 상스러운 욕설이 울컥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내고 꼿꼿이 턱을 치켜세웠다.
“겨우 그거 말하려고 바쁜데 불러냈어?”
그녀의 냉정한 목소리에 이번에는 그가 셔츠 깃을 만지작거렸다. 공대생들이 교복처럼 입고 다닌다는 체크 셔츠와 다르게 핏도 살아있고 소재도 고급인 브랜드 셔츠였다. 세나가 사준.
“넌 내가 보고 싶지도 않았어?”
세나는 천천히 시선을 흘려 남자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생일날 거금을 들여 사준 남자들의 로망인 명품시계가 떡하니 채워져 있었다.
“…….”
“네가 바쁜 걸 이해해보려 했어. 나도 논문 준비로 바빴으니까. 근데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적어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면 힘들 때 옆에 있어 줘야 하잖아?”
아, 뚫린 입이라고 참 말을 잘하는구나. 연수에다 연구실에서 밤새운다는 같잖은 핑계나 대던 놈이 다른 여자랑 하하 호호 여행을 다녀왔니? 그것도 해외로?
“나 그동안 정말 힘들었어……. 너는 몰랐겠지만.”
그래. 힘들었겠지. 주제도 모르고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으니, 탈이 안 났을까?
“미안해. 난 널 받아줄 그릇이 못 되나 봐.”
내가 사준 옷을 입고, 내가 사준 시계를 차고, 내가 사준 신발을 신고 그때마다 돈 잘 버는 여자친구가 있어 호강한다고 기뻐하던 놈이. 이제는 내가 사준 걸 걸치고 딴 년을 만나는 주제에 그릇? 그르읏??
“그러니까 이제 우리 헤어지자. 나보다 더 좋은 남자 만나.”
“…….”
“이런 말 해야 하는 나도 마음이 너무 아프지만, 서로를 위해서 헤어질 때인 것 같아. 미안해.”
“고작 그 말 하려고 일부러 잠수까지 타서 내 마음 확인하고, 바쁜데 불러냈어?”
“고작이라니. 그래도 헤어지자는 말은 만나서 하는 게 예의잖아……. 2년이나 만났-.”
남자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세나는 헛웃음으로 말을 끊어버렸다. 기가 찼다. 사랑받지 못해 외로웠다는 같잖은 핑계 뒤에 숨겨진 사실을 말하기까지 기다려 줄까도 생각했지만, 아마 저 비겁한 놈의 입에선 절대 먼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예의? 그렇게 예의 있는 새끼가 바람을 피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