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잘못된 만남2021.07.03.
“눈깔을 얻다 두고. 그딴 걸 고백이라고 하는 너나, 그걸 듣고 있는 나나.”
싸늘했다. 진눈깨비가 날아와 뜨거운 볼에 달라붙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면……. *** 법학과 총 학년이 모이는 송년회. 며칠 전부터 으슬으슬 몸살기가 보이더니, 자고 일어나자 머리가 어질하고 눈앞이 팽 돌 정도로 열이 올랐다. 겨울 감기라면 당연히 기침과 콧물은 한 세트였다. 지독한 감기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의 기세나는 원래대로라면 아늑하고 따뜻한 이불을 폭 덮고 침대에 누워있을 예정이었다. 친구 정희의 전화만 아니었더라면.
“오늘 3, 4학년 선배님들도 전부 다 오신대. 아 맞다. 이번 학기에 복학했던 성민 선배도!”
“채성민 선배님?”
‘민’이 들어가는 모든 배우가 멋있듯 채성민은 문과 범생이들이 모인 법학과의 혁명이었다.
“너야 뭐 관심 없겠지만, 지금 난리 났어. 알바 하는 애들도 다 알바 취소하고 온다고 난리야.”
“이번 송년회 크게 하나 보네….”
“어! 완전 대박이지? 그러니 지금 당장 죽을 만큼 아픈 거 아니면 튀어나와. 맞다! 얼마 전 사시 합격해서 난리 난 선배 있잖아?”
“류강현 선배님?”
“어! 오늘 장난 아니다. 이번에 면접까지 합격했다던데. 암튼 그 선배님도 오신대! 복학하고 나서 술자리에 참석 잘 안 한다던데, 성민 선배가 끌고 오는가 보더라고. 둘이 친하니까.”
법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 중 채성민과 류강현을 모르는 학생들은 없었다. 다정하고, 똑똑하고. 이미 갖출 건 다 갖췄는데, ‘옜다 이건 덤이다.’ 하는 신의 은총인지 잘생기기까지 해서 더욱 여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청년 ‘채성민’과 그와 상반되는 날카로운 인상에 좀처럼 웃는 얼굴을 보기 힘들다는 무뚝뚝한 ‘류강현’이 있었다. 그 둘이 유명한 이유에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잘생김도 한몫했다. 둘은 함께 있을 때 더욱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채성민은 멘토로 삼고 싶은 천사 같은 선배로, 류강현은 되도록 피하고픈 맹견 같은 선배로. 그중 류강현.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사법시험을 치기 위해 꼭 필요한 법학과 학점을 이수하자마자 시험을 치고 합격까지 해버린, 이제는 H대 전설이 되어버린 남자. 텔레비전에 나와 무감한 얼굴로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인터뷰나 할법한 인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채성민 선배와 술자리라니. 정희의 말대로 당장 죽을 만큼 아픈 게 아니라면 절대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세나는 감기에 걸린 것도 잊고 예쁜 옷을 골라 입었다. 그리고 대학가 주점으로 뛰어와 채성민 옆자리를 사수하고 있던 후배와 동기를 제치고 간신히 근처 자리를 꿰찼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가 주는 술을 꿀물이라 생각하고 연거푸 들이키고 있을 때였다. 그의 입에선 청천벽력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나 다음 학기 교환학생으로 가기로 했어.”
비단 실망한 건 세나뿐만이 아니었을 거였다. 거기에 앉아있던 모든 학생의 입에서 아쉬운 탄성이 터졌다. 와글와글 공간을 채우고 있던 소음들이 아득히 멀어지고, 세나의 눈동자도 세차게 흔들렸다. 교환학생이라고 하면 해외로 간다는 말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말 한번 섞어보지 못했는데……. 다음 학기에 그와 같은 수업을 듣게 되면 지금보다 더 친해지지 않을까. 조별 과제라도 있는 수업이라면 채성민과 한 조가 돼서 누구보다 열심히 함께하리라, 내심 기대하고 있던 세나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허무함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채성민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아픈 몸을 이끌고 왔는데……. 이럴 거면 오지 말 걸 그랬다.
***
“송년회가 아니라 송별회잖아…….”
세나는 감기로 맹맹해진 코를 다시 훌쩍거렸다. 서러웠다. 고백도 못 해 봤는데, 짝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서러운 건지 태어나서 처음 알았다. 누군가를 먼저 좋아해 본 적도 처음이고 늘 고백만 받아봤지, 말을 전하지 못해 전전긍긍한 것도 처음이었다. 속상한 마음에 괜히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마셨다. 눈물이 툭 터질 것 같아 더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 없었다. 신이 난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지도 못한 채 눈치만 보다, 실수라도 하기 전에 얼른 가게 밖으로 나왔다. 세나는 주점 입구 옆 테라스로 나와 더운 머리를 식혔다. 콧방울을 시큰하게 만드는 찬 기운에 세나는 코를 훌쩍거렸다. 새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웅크리고 있던 몸을 조금 더 옹송그리며 가게 안 시끌벅적한 사람들을 멀찍이 쳐다보았다. 고백도 한번 해보지 못하고 길을 잃은 짝사랑의 말로. 가슴 속에 묵직한 응어리가 쌓인다. 세나는 복잡해진 마음을 달래보려 애를 썼다.
‘차라리 잘 됐지. 곧 유학 가는 사람한테 고백을 했어 봐. 남은 시간 동안 얼마나 불편하겠어. 아. 지금이라도 잘 다녀오라고 하자.’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감기 기운과 함께 술기운도 올라오는지 조금씩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아…… 유학 어디로 간댔지? 그 유학 내가 따라가고 싶다……. 왜 하필 지금이야. 2년만 있으면 졸업인데……. 하아. 좀 더 친해져 둘걸. 그랬으면 유학 갔다 와서 연락하라는 말이라도 할 텐데. 아니면 메일이라도 주고받자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때 누군가 나와 세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뭐라 말을 걸었는데 아득하게 들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술 많이 마셨냐?’ ‘취했냐?’ ‘괜찮냐?’ 뭐 그런 질문이겠지. 지레짐작하며 세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머리 위에서 짧은 웃음이 울렸다. 그리고 겨울 날씨에 얼어붙은 어깨 위로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도톰한 갈색 재킷이었다. 슬며시 멀어진 발소리와 함께 라이터를 찰칵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키가 큰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추운 날 자신이 입고 있던 재킷을 덮어 줄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라면 채성민이 확실했다. 재킷에 남아있는 따스한 체온과 그에 어울리는 산뜻하고 청량한 향. 침착하게 가라앉았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이렇게 다정한데 제가 어떻게 포기해요. 선배.’
어쩐지 더 울적해졌다. 자신의 앞날을 향해 한발 도약하는 그를 쉬이 보내줄 정도로 배포도 크지 않았다. 저 잘난 맛에 살고, 가지고 싶은 걸 한 번도 놓쳐본 적 없는 기세나는 고백도 못 해본 이 짝사랑의 결말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루어지지 않을 거란 걸 잘 알지만, 고백만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선배. 유학 가서도 잘 지내요. 가끔 안부 연락해주세요.’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담백한 고백. 좋아한다는 말보다는 좋아했다는 과거형으로.
‘좋아해요. 좋아했어요.’
‘만약에 유학 갔다 돌아왔을 때, 만나는 사람이 없다면. 선배 그땐 저에게도 기회를 주세요.’
아니, 말이 너무 길고 구차하다. 그것보다는 다른 적당한 말이 없을까. 기억에 남으면서도, 담백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는데, 담배를 다 피운 그가 다시 세나 쪽으로 다가왔다.
“……선배.”
“…….”
웃으면서 너무 진지하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그렇게 내 마음을 전해야지.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그렇게 말을 전해야 하는데……. 겨우 가라앉혀 놓았던 마음이 눈앞에 흩날리는 진눈깨비를 본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첫눈이었다.
“흑. 선배……. 저 사실 선배 조. 좋아해요. 진짜 진짜 좋아해요. 흐으으.”
“…….”
“그니까 교환학생, 그거 안 가면 안 돼요? 전 고백도 못 해 봤는데……. 제가, 아니, 그게 아니라. 선배 유학, 흑, 나도 따라가고 싶어, 아니, 그냥 가지 마. 갈 거면 나랑 가. 흐어엉.”
“하아…….”
“제가, 제가 더 잘해줄게, 요. 저, 누구 좋아해 본 적 처음이라, 흑, 이렇게 못, 보내요. 어엉. 저랑 딱, 한 달만이라도 만나주면 안 돼요?”
어쩌자고 내뱉는지도 모르게 되는 대로 두서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찌질했다. 살면서 이렇게 찌질한 순간이 있었던가. 결단코 누군가의 앞에서 이토록 찌질한 고백을 해본 역사가 없었다. 그러나 감기 기운과 술기운. 찬바람에 꽁꽁 얼어붙은 뇌세포와 주둥이는 본래 하려고 했던 당당한 신여성의 고백을 철부지 어린아이의 땡깡으로 바꿔놓았다. 대답 없는 선배의 반응에 세나는 더더욱 고개를 푹 숙였다. 마음을 담아뒀던 둑이 터지니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넘쳤다. 세나는 히끅히끅 딸꾹질까지 하며 아이처럼 서럽게 울음을 삼켰다. 어깨를 몇 번이고 떨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꽉 막힌 코를 더욱 세게 훌쩍거렸다.
“기도 안 차네. 너 원래 이런 캐릭터였어?”
시끌벅적한 가게 안 소음이 저 멀리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주위가 삭막하게 가라앉았다.
“눈깔을 얻다 두고. 그딴 걸 고백이라고 하는 너나, 그걸 듣고 있는 나나.”
싸늘하다. 진눈깨비가 날아와 볼에 달라붙었다가 이내 녹아 사라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뺨이 순식간에 식었다.
“그 새끼가 여자랑 유학 간다는데 고백이 하고 싶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여자? 혼자 가는 게 아니라 여자랑 간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세나는 채성민이 유학을 가기로 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거기에만 꽂혀 다음 말을 귀담아듣지 못했다. 앞이 핑글핑글 돌 정도로 동공이 흔들렸다. 어째서 가장 중요한 것을 듣지 못했는지. 여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면, 고백은커녕 이 자리에 남아 있지도 않았을 텐데.
“술에 취해서 사리 분별이 안 되는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생긴 거랑 다르게 캐릭터 독특하네.”
세나의 낯빛이 종잇장보다 더 새하얗게 질렸다. 그게 비단 영하의 날씨 때문인지, 얼음송곳 같은 차갑고 뾰족한 목소리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올해의 첫눈을 보면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
세나는 눈가에 남아있는 눈물을 재빨리 지워내며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이게 정말 무슨 일이지? 악몽이라면 깨야 한다.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가. 채성민이 아니라 류강현이라니. 이 옷은……. 이 재킷은……. 분명. 성민 선배 의자에 걸려있던 게 아니던가? 왜? 아니 왜? 아니 하고많은 남자들 중에 왜 하필 류강현이야??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았다. 정신 차려라. 기세나. 아직도 취해 있는 거니? 아니요. 이미 술기운은 깡그리 사라지고 시야도 또렷했다. 턱을 치켜들고 올려다본들 얼굴의 주인은 바뀌지 않았다. 짙은 눈썹과 시원하게 뻗은 눈매를 불쾌하다는 듯 일그러트리고 있는 남자는 피하고 싶은 맹견, 류강현 본인이었다. 딸꾹.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딸꾹질까지 했다. 그러자 류강현이 얼씨구, 하고 픽 실소했다. 낯빛과 더불어 머릿속 또한 새하얘졌다. 무슨 말이든 던져서 수습해야 하는데 맥없이 벌어진 입술에선 어버버 바보스러운 비음만 나왔다. 세나는 잠시 잊었던 숨을 쉬기 위해 콧구멍을 벌렁거리다,
“푸엣-취!!”
재채기를 터뜨렸다. 시원하게 터진 재채기와 함께 코 안을 틀어막고 있던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곧이어 세차게 흔들리는 세나의 눈동자 속으로 류강현의 찌그러진 얼굴이 성큼성큼 들이닥쳤다. 이젠, 여자가 있는 남자에게 고백이고 자시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