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완결) - 154화
예상대로 라파엘은 날 보자마자 숨을 들이켰다. 하여튼 생긴 거랑 다르게 숙맥이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가족들에게 말했다.
“다들 먼저 들어가 있어.”
내 말에 가족들은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신랑 신부와 함께 입장할 게 아니라면 지금 들어가는 게 맞았다.
“너, 결혼식 전에 우리 동생한테 손대기만, 아야야.”
“들어가라, 아실.”
“더글러스 너도. 공작을 째려본다고 뭐가 달라지니?”
“…….”
마지막까지 입을 가만히 있지 못하던 아실과 라파엘을 째려보던 더글러스는 각각 타라와 헨리에게 연행되었다.
드디어 문이 닫히고 나와 라파엘 둘만이 남았다.
나는 라파엘의 손을 꼬옥 잡으며 물었다.
“긴장돼?”
“조금요.”
솔직한 대답에 나는 킥킥 웃으며 공감했다.
“나도 결혼식 처음이라 긴장돼.”
“서로 처음이라 다행이군요.”
당연한 소리를 했는데도 라파엘은 거기에 맞장구를 치며 슬쩍 웃었다.
우리는 손을 통해 온기를 나누며 잡담을 떨었다.
“너 오늘 몇 시에 일어났어?”
“음…… 새벽 5시쯤에요.”
“나랑 비슷하게 일어났네. 아, 그래도 난 단장 중에 좀 잤다.”
“다행입니다.”
“넌 안 피곤해?”
“이런 기쁜 날에는 피곤할 시간도 없습니다. 아깝잖아요.”
라파엘이 그렇지 않냐며 슬쩍 웃었다.
수다를 떨며 긴장을 풀다 보니 어느새 우리가 입장할 시간이 되었다.
“아가씨, 공작님.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아, 그래.”
하녀들은 뒤에서 내 베일과 드레스를 점검해 주었다. 그리고 문이 활짝 열리며 주례의 목소리가 우리의 귀에 꽂혔다.
“신랑 신부, 입장.”
홀이 소박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가니 느낌이 달랐다.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 쏠리니 설상가상 얼마 되지 않는 버진 로드가 무척이나 길어 보였다. 발걸음이 무거워 떨어지질 않았다.
내가 긴장한 걸 알아챘는지, 라파엘은 팔에 힘을 주었다. 손이 그의 팔과 갈비뼈에 꽉 끼여 그를 바라보니, 라파엘은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다독여 주었다.
“괜찮습니다, 이블린.”
“……응.”
나는 라파엘의 다독임에 힘을 업어 천천히 버진 로드를 걸었다.
박수 소리가 내 등을 떠밀어 주고 있는 듯했다.
간신히 주례 앞에 다다른 우리는 주례에게 인사를 했다. 본격적으로 주례문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 하나의 가정을 꾸리게 되는 의미 깊은 날입니다. 마치 신이 축복하듯 날이 쾌청하니,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는 것만 같습니다.”
흐…….
앗. 나도 모르게 하품이 나올 뻔했다.
어디서나 주례문이 긴 건 공통인가 보다. 하지만 기껏 부모님이 섭외해 온 주례였다. 일단 듣자.
“부부가 되는 것은 참으로 복되고,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분명 난관도 찾아오겠지요. 그럴 때일수록 서로 의지…….”
“잠깐만.”
그때였다.
뭐야? 누군가 주례의 말을 끊어 먹고 일어섰다.
더 볼 것도 없이 샬럿이었다. 가만히 잘 앉아 있나 싶더니 왜 일어난 거야? 샬럿의 기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주례석에 난입한 것이다.
“어어?”
“어?”
왜, 왜 주례석에 서는데?
라파엘도 나도, 주례도 당황했다. 갑자기 나타나 뻔뻔하게 주례석을 차지해 놓고 샬럿은 점심 메뉴를 정하듯 말했다.
“역시 주례는 내가 직접 하고 싶어서 말이야.”
“엥?”
그런 건 절차에 없는데.
그렇다고 여기서 황제를 쫓아낼 수도 없었으니, 덕분에 다들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우리의 당황스러운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지 샬럿은 태평하게 주례에게 물었다.
“여기 쓰여 있는 대로 읽으면 되나?”
“예, 예. 폐하.”
“흠, 그럼…….”
샬럿은 주례문을 살짝 훑어보더니 그대로 뒤로 내던졌다.
“에잇, 장황한 건 다 생략하자.”
“흐어억.”
피땀을 짜내어 쓴 주례문이 찬밥 취급을 당하자 주례가 기겁했다. 심지어 그는 곧바로 하인들에 의해 퇴장당했다.
‘아이고…….’
나를 대신해 하객석 여기저기서 이마를 짚었다.
멀쩡한 주례를 퇴장시켜 놓고 샬럿은 태평하게 입을 열었다.
“신랑, 라파엘 파그라시움.”
“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풍이 부나. 언제나 신부 이블린 프라비체를 지키고, 존중하며, 위하고, 평생 동안 그녀가 행복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까?”
라파엘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맹세합니다.”
그러자 샬럿이 눈을 희번덕 뜨며 물었다.
“목숨 걸고?”
“목숨 걸고 맹세합니다.”
“좋아. 그럼…….”
샬럿의 눈이 나를 향했다. 라파엘을 볼 때와 다르게 온화한 눈이었다.
“신부 이블린 프라비체는 평생 동안 신랑 라파엘 파그라시움을 사랑하며 행복할 것을 맹세합니까?”
“……?”
라파엘에게 물은 것에 비해 너무 간결한 거 아냐? 비가 오나 목숨 걸고 어쩌구, 그거 안 해?
나는 작게 물었다.
“샤, 아니. 폐하. 나한테는 왜 이렇게 질문이 짧아?”
“너는 라파엘이랑 행복하기만 하면 되지. 내 동생이지만 꽤 잘났으니 행복하게 잘 부려먹으렴.”
“…….”
저기요, 댁 동생 다 듣고 있거든요.
라파엘의 눈치를 슬쩍 보니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아 보였다. 오히려 웬일로 샬럿의 말에 고분고분 맞장구치고 있기까지 했다.
내 대답이 늦어지자 샬럿이 눈썹을 까딱이며 물었다.
“그래서, 맹세하니?”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예. 평생 동안 신랑을 지키고 존중하며 위하고,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나는 라파엘의 팔짱을 낀 손에 힘을 주고 대답했다. 놀라던 것도 잠시, 라파엘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샬럿 역시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신랑 신부, 반지를 교환하도록.”
라파엘이 나와 마주 보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블린, 손을.”
나는 빙긋 웃으며 라파엘의 손을 잡았다.
라파엘은 혹시나 잘못 만지면 깨지는 유리 공예품 대하듯, 내 약지에 조심조심 결혼반지를 끼워 주었다.
우리가 함께 맞춘 결혼반지는 내가 프로포즈 때 받은 반지처럼 엄청난 화려함을 자랑하지는 않았다.
로즈골드색의 얇은 테두리에 깨끗한 다이아가 박혀 있는, 심플한 반지였다.
이번에는 내가 라파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파엘, 손 줘.”
라파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라파엘의 약지에도 결혼반지가 자리 잡았다. 마치 서로를 구속하는 수갑 같았지만 그게 마음에 들었다.
“신랑 신부, 맹세의 키스를.”
마지막 관례에 우리집 사람들이 뒷덜미를 잡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런 거 다 생각하고 결혼 허락한 거 아니겠어?
나는 라파엘의 목에 팔을 두르고 얼굴을 가까이 댔다. 라파엘이 기꺼이 고개를 기울여 내 입술을 받아 주었다.
입술을 뗀 후, 라파엘의 발그레한 얼굴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목덜미는 이미 토마토색이 된 지 오래였다.
“푸흡.”
“……웃지 마세요.”
“왜, 귀여운데.”
라파엘이라도 사람들 앞에서 키스하는 건 부끄럽구나. 또 한 가지 귀여운 점을 알았다.
이제 남은 순서는 부케 던지기지만, 우리는 생략하기로 했다. 이 부케는 이미 주인이 있기 때문이었다.
‘뭐, 걘 받자마자 이 부케 다 팔고 다른 사람들한테 써 버리겠지만.’
생화도 간간이 섞여 있긴 하다만 압도적으로 다이아의 비율이 더 많은 부케였다.
보통 다이아도 아닌 내 광산에서 나는 최고급 다이아로 만든 부케니 값은 잘 나갈 거다.
“신랑 신부, 퇴장.”
샬럿의 사회에 우리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이블린, 행복해야 된다……!”
“이블린, 결혼 축하해!”
“공작님, 축하해요~”
우리는 하객들의 얼굴을 찬찬히 눈에 담으며 버진로드를 걸었다.
누군가는 눈물 어린 배웅을, 누군가는 환히 웃으며 우리를 축복해 주었다.
그에 대한 인사로 우리는 얼굴 가득 행복하다는 웃음을 지으며 퇴장했다.
* * *
결혼식과 피로연까지 끝나고 우리는 초야를 치르기 위해 침실로 들어왔다.
“흐어어, 피곤하다.”
나는 옷을 벗을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침대에 돌진해 누워 버렸다. 라파엘이 나를 뒤따라 오더니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어르고 달랬다.
“이블린. 불편한 장식은 다 빼고 누우셔야죠.”
“네가 알아서 해 줘……. 나 지금 다리 엄청 아파.”
라파엘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웃더니 내 티아라와 장신구들을 차례차례 풀어 주며 웃었다.
“하긴, 이렇게 오래 서 있던 건 처음이시죠.”
“맞아. 죽겠어.”
마치 갓 태어난 사슴의 다리가 달린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자고 싶었지만 초야를 치러야 하니 잘 수도 없……
‘……초야?’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에 띄게 또랑또랑해진 눈으로 번쩍 일어나니 라파엘이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 갑자기 정신이 확 들어서.”
“……?”
라파엘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기대돼서 잠 다 날아갔다는 말은 죽어도 못 하지.
어쨌든 내가 잠이 깬 걸 다행으로 생각하는지 라파엘이 내 머리에 꽂혀 있는 핀들을 모두 빼내 주며 감상에 젖었다.
“새삼 신기하군요. 당신과 이렇게 한 침실에 있다니…….”
“그, 그치? 우리 같이 잔 적은 없으니까.”
내가 틈만 나면 라파엘의 집을 하숙집처럼 쓰긴 했지만 같이 잔 적은 없다. 라파엘이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처음에 이블린 당신이 절 싫어했던 거, 기억나십니까?”
뜨끔. 그걸 어떻게 알았지. 분명 싫어하는 티는 대놓고 안 냈을 텐데. 나는 슬그머니 물었다.
“……들켰어?”
“예.”
……그랬구나. 들켰구나.
나는 머쓱해져서 괜히 머리를 손가락으로 꼬며 변명했다.
“시, 싫어하진 않았어. 그냥 불편했던 거였지.”
“후후. 싫어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눈을 깜빡였다. 라파엘은 내 뺨을 조심히 어루어 만지며 유혹스럽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결국 당신은 절 사랑하게 되었잖습니까.”
“으으.”
“틀립니까?”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진 기분이었다. 아까는 분명 내가 라파엘을 놀리던 입장이었는데, 왜 이렇게 됐지?
나는 괜히 자존심이 상해 볼을 부풀렸다.
“……얄밉기는.”
“이런 저를 사랑하시잖아요.”
그렇지요? 라파엘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미모 폭력 반대. 아니, 사실은 환영.
나는 진정하기 위해 피했던 라파엘의 눈을 다시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라파엘의 이마에 내 이마를 작게 콩 부딪쳤다.
“사랑해.”
그러자 라파엘이 듣기만 해도 행복이 묻어 나오는 웃음소리를 흘리고는 대답했다.
“저도 사랑합니다.”
라파엘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포개졌다. 식장에서 나눈 키스보다 더 진하고 깊은 키스였다.
숨이 데워지고 난 뒤, 우리는 한참이나 열이 오른 눈동자에 서로를 가뒀다.
“라파엘.”
“예, 이블린.”
“부탁이 있어.”
“무엇이죠?”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듯 라파엘이 물었다. 마치 내가 원한다면 성이라도 사줄 기세였지만 내가 원한 건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안주인으로서는 부족하겠지만 기다려 줘.”
“……예?”
내 부탁이 너무 뜬금없었나. 라파엘이 살짝 당황했다.
“아침에 깨달았거든. 난 오늘부터 공녀가 아니라 공작 부인이더라고. 그런데 잘해 낼 자신이 없어.”
황태자비 경합 때 생각하긴 한 거지만 난 정말 집안 관리에 소질이 없었다. 아마 제대로 한 사람 몫을 해내기엔 꽤 시간이 걸릴 거다.
“그러니까 내가 익숙해질 때까지 네가 많이 도와줘.”
나는 라파엘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긴장했던 라파엘의 얼굴은 사르륵 풀어져 내려갔다.
라파엘이 내 이마에 입 맞추고는 대답했다.
“당연히 기다리겠습니다.”
“진짜지?”
“예, 진짜. 정 뭣하면 집안일도 제가 하겠습니다. 당신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세요. 당신의 행복이 제 행복이니까요.”
집안일 하는 남자라니, 완전 내 이상형이잖아.
라파엘이 저 진지하고 잘생긴 얼굴로 빈말을 할 리는 없겠지만 나는 예의상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 그럼 나 정말 놀기만 한다?”
“예. 마음껏 노세요. 대신 저랑도 놀아 주셔야 합니다.”
“앗싸!”
내가 역시 남편 하나는 잘 골랐다. 나는 꺄르륵 웃으며 라파엘의 품에 안기고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벼 댔다.
라파엘이 실시간으로 헝클어지는 내 머리를 보며 크게 웃더니 날 진정시켰다.
“잠시만요. 아직 핀을 다 빼지 못했습니다.”
“머리 좀 헝클어지면 어때. 식 다 끝났는데.”
나는 배 째라는 식으로 더더욱 라파엘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자 라파엘이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후, 어쩔 수 없군요. 특단의 조치입니다.”
“우왓.”
순간 시야가 뱅글 돌더니 천장이 보였다. 라파엘이 나를 깔아 버린 것이다.
“이러면 더 이상 못 하시겠죠?”
“…….”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두근거렸기 때문이었다. 아래에서 보는 라파엘은, 정말이지 끝내주게 유혹적이었다.
또다시 열이 올랐다. 그리고 라파엘도 내 열병에 감염되었다.
“라파엘.”
“이블린.”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입에 담고는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
함께 살며 행복한 날들이 있는가 하면 싸울 날들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할 것이다.
평생 동안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겠다는 맹세를 나누었으니까.
<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