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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153)화 (153/154)

153화 - 153화

결혼식이라고 해서 준비는 라파엘과 내 부모님이 모두 준비하고 있었고, 내가 할 건 잘 먹고 잘 쉬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결혼식은 어느새 당일로 다가왔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다 욕조에서 나온 나는 문득 어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 내일부터는 아가씨 소리 못 듣겠네.”

“……예?”

나를 화장대에 앉힌 소피는 그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는 화장대에 턱을 괴고 푸념했다.

“아니이, 아가씨 소리 듣는 것도 결혼식이 끝나면 끝이잖아.”

“원한다면 아가씨라고 계속 불러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건 이상하잖아. 다들 나보고 마님이라 부를 텐데 너 혼자 아가씨라고 부르면.”

내가 투덜거리자 소피가 빗질을 마저 하며 피식 웃었다.

“우리 아가씨. 파그라시움 공작 부인이 되고 난 다음에는 철 좀 드셔야 할 텐데요.”

“……그건 그렇긴 해.”

“공작 부인이 되시면 아침 일찍 일어나셔야 합니다.”

“…….”

내가 죽어도 포기 못 하는 게 아주 많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아침잠이었다.

나는 오늘 결혼식이라고 꼭두새벽부터 일어났다. 내 기준 꼭두새벽이 아닌 진짜 꼭두새벽 말이다.

그 탓에 지금 엄청 피곤했고, 이런 일상이 지속된다고 생각하니 소피의 미소가 사악하게 보였다.

소피는 결혼식이 끝나도 프라비체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남기로 했는데, 분명 아침마다 나를 엄청 깨우겠지.

나는 중얼거렸다.

“하아. 역시 소피는 마차 태워서 보낼까.”

“제가 어떻게 돌아갑니까. 제가 없으면 아가씨를 감당할 하녀가 없잖아요.”

하여튼 모시는 아가씨한테도 한 마디도 안 지는 지지배.

내가 마님이 되어도 소피의 태도는 변하지 않을 거다.

그런 불편도 본격적으로 단장이 시작되니 쏙 들어갔다. 너무 지루해서 잠이 왔기 때문이었다.

“흐아아암.”

결혼식이니만큼 단장 시간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걸리는 것 같았다.

거울 너머로 보니 하녀들이 이것저것 하느라 분주한 것 같기는 한데, 나는 졸린 상태로 앉아만 있으니 이렇게 잠이 솔솔 올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수마를 이기지 못해 깜빡 졸았고, 내가 눈을 뜬 건 소피가 날 깨우려 말을 건 때였다.

“아가씨, 끝났습니다. 일어나세요.”

“흡, 흐억.”

갑작스레 뒤에서 다가온 목소리에 나는 목을 꺾으며 졸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끝났어?”

“예, 아가씨.”

나는 눈에 초점을 되찾고 거울을 바라봤고, 나는 넋을 놓고 말았다.

“다행히 침은 흘리지 않으셨군요. 흘리셨다면 화장을 수정하느라 더 앉아 계셨어야 했을 겁니다.”

다른 하녀들까지 보는 가운데에서 내 교양은 처절히 짓밟혔다. 소피 이 나쁜 지지배.

다행히 다른 하녀들은 자신들의 역작에 감탄하느라 소피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긴 시간 앉아 있던 보람이 있구나.’

내 얼굴은 원래도 예뻤지만 지금은…… 그래, 심각하게 아름다웠다.

특히 내 매력인 고양이 눈매가 평소보다 더 도드라져 보였고, 고심 끝에 고른 하얀색 웨딩드레스는 자기보다 더 깨끗해 보이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며 시위하는 듯했다.

‘라파엘이 보면 또 숨 쉬는 거 까먹는 거 아냐?’

그럼 또 놀려야지. 장난칠 생각에 내가 킥킥대고 있던 그때였다.

똑똑.

“이블린, 우리 왔다.”

단장을 마친 건 또 어떻게 귀신같이 알았는지, 우리 가족이 신부 대기실에 찾아왔다.

“들어와.”

내 허락에 문이 열렸다. 그리고 가족들은 문이 완전히 열리기도 전에 나를 보며 눈물과 감탄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블린! 너무 예쁘구나!”

“그러게. 누가 낳은 딸인지 아주 예뻐.”

헨리와 타라가 내게 빠르게 다가와 나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어루만졌다. 아실과 더글러스도 어느새 쪼르르 내 곁에 다가왔다.

“이블린, 진짜 결혼 안 하면 안 돼?”

“결혼식의 진짜 볼거리는 신부의 도망이다.”

입만 열면 미운 말만 내뱉었던 더글러스도 오늘만큼은 내 아름다움에 동조하며 아실과 함께 바람을 불어넣었다.

“오빠가 도와줄게. 도망갈래?”

“혹시 몰라서 마차 한 대 더 가져왔다.”

“가겠냐고.”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동생 한정 철딱서니 오라비들의 질문에 나는 질린 얼굴로 싸늘하게 응수했다.

“그러고 보니 다들 라파엘 보고 왔어? 어때? 오늘도 잘생겼어?”

“…….”

그러자 북적거리던 방이 놀랍게도 싸늘해졌다.

결혼 허락 받던 날의 훈훈함은 정말 딱 하루 갔다.

타라는 보다 보니 라파엘이 날 포동포동하게 잘 먹여 살릴 것 같았는지 언젠가부터 슬쩍 인정하는 눈치였지만 헨리는 그렇지 않았다.

나름 사위를 사랑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노력에만 그쳤고, 아실과 더글러스는 그런 노력조차 안 하니 당연했다.

나는 기대도 안 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안 가르쳐 주면 내가 라파엘 보러 가야지, 뭐.”

“아, 안 돼! 우리랑 있을 시간 줄어들잖니!”

헨리가 내 치맛자락이라도 잡을 기세로 날 뜯어말렸다. 뒤늦게 들어온 오르페시아도 한 마디 거들었다.

“예끼. 결혼식 끝나면 갈 할미 할아비는 안 보고 싶고, 평생 볼 그놈만 보고 싶어 하고.”

“아,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도 보고 싶지!”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수습했다. 하찮은 변명에도 오르페시아는 넘어가 주더니, 내게 다가와 내 뺨을 쓸며 감상에 젖었다.

“세상에, 타라가 결혼했을 때가 다 생각나는구만……. 어찌 이리 고울까.”

“그때보다 기분이 더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의 딸이 낳은 딸이 벌써 결혼이라니……. 세월이 너무 빨라요.”

피에르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콕콕 찍었다. 분위기가 좀 누그러진 것 같아, 나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라파엘은?”

“이블린! 할미 할아비 내일이면 간다니까?”

아, 아직 일렀구나. 나는 또 혼이 나 버렸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분들이 새파랗게 어린 내 관심 하나 못 받아서 툴툴대는 꼴이 귀엽고 웃기긴 했다.

그래도 라파엘이 지금 뭐하는지는 알려 줘도 되잖아?

다행히 여기에 내 편이 하나쯤은 있었다.

“공작은 지금 손님맞이를 하고 있다.”

바로 내 엄마, 타라였다. 타라는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도록 내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어 주며 입이 댓 발 나온 나를 달랬다.

“조금만 참으렴. 어차피 곧 식이 시작할 시간이니.”

“……응. 엄마.”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얼른 결혼식이 시작되었으면.

얼른 라파엘을 만나고 싶었다.

나를 볼 때마다 세상을 다 쥔 것처럼 환하게 웃는, 내 신랑을.

* * *

장례식이 자식들의 인맥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결혼식은 부모의 인맥이 모이는 자리였다.

하지만 라파엘은 부모가 없다. 그리고 신랑 신부 둘 다 하객석을 채울 친구가 없었다.

그랬기에 이블린과 라파엘은 결혼식은 약소하지만 돈을 퍼부은, 이른바 스몰웨딩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하객은 적지만 다양했다.

귀족부터 파그라시움에서 이블린과 특히 잘 지내던 사람들, 그리고…….

“뭐야. 난 좀 화려한 거 기대했더니.”

“폐하.”

황제까지.

국정도 내팽개치고 동생과 이블린의 결혼을 보러 온 샬럿이 투덜거렸다.

황궁처럼 화려한 홀에서 열리는 식을 기대했건만, 고작 저택의 홀에서 열 줄이야.

하객이 적다는 것을 보여 주듯 적은 의자 수를 보며 샬럿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명색이 황자이자 공작과 그 프라비체의 막내딸 결혼식인데 이렇게 소박해도 돼?”

라파엘은 입구에 서서 통로를 떡하니 막는 샬럿의 모습에 라파엘은 짜증이 나기도 하고 잘됐다 싶어서 곧장 응수했다.

“싫으면 돌아가시면 됩니다. 마차 준비해 드릴까요?”

“얘 좀 봐라? 하나밖에 없는 누나한테 말하는 꼬락서니 좀 봐? 너 그 지위 누가 줬어.”

“글쎄요.”

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

고마운 기색이 조금도 없는 라파엘을 보며 샬럿이 기가 막혔는지 뒷골을 잡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줬잖아, 내가! 간만에 파티 분위기 좀 제대로 느끼나 싶었는데. 내가 너 이러라고 작위고 땅이고 준 줄 아니?”

“파티는 황궁에서 여시면 되지 않습니까.”

“다들 내 눈치 보느라 바쁘잖아. 너랑 이쁜이는 내 눈치 안 보고 얼마나 편한데. 그에 비해 요즘 어린 것들은 황제에게 대드는 치기가 없어요.”

“황제가 아니라 싸움꾼을 하셨어야 했습니다, 당신은.”

라파엘은 샬럿의 불평불만을 가볍게 무시하며 한 팔로 그녀를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통행에 방해됩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 결혼식에 와서 잘하는 짓이군요.”

“동생 자식 키워 봐야 다 소용없다더니. 하아아. 내 동생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싸가지가 없을까.”

자연스럽게 스윽 밀린 샬럿은 아직 식장에 들어가기는 싫은지 얌전히 구석으로 가서 제 신세를 한탄했다.

“보스, 아니. 공작님. 저희 왔…… 헉.”

“아, 그래. 유다, 조슈아. 왔나? 이 무뢰한은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

그 탓에 식장에 들어서려는 손님들마다 구석에 있는 샬럿의 모습에화들짝 놀라 서둘러 식장 안으로 피신했다.

라파엘이 참다 못해 한 마디 했다.

“작작 좀 하고 들어가시죠.”

“싫어. 저런 좁아터진 곳에 어떻게 들어가니.”

“…….”

아, 진짜 내쫓을까. 라파엘의 인내심이 끊기기 직전이었다.

“보스~ 저 왔어요~”

멀리서 카밀라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왔다. 그 모습에 라파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모건 후작. 언제까지 보스라고 할 거지?”

“아, 맞다.”

에헷. 카밀라가 애교스럽게 웃더니 입구 한편에서 불만스러움을 표출하고 있는 샬럿을 발견하고는 허리를 숙였다.

“어머, 폐하를 뵙습니다. 왜 그런 곳에 계세요?”

“라파엘 이 자식이 나보고 방해하지 말고 옆으로 꺼지래잖니.”

샬럿의 날조 및 선동에 라파엘은 표정 관리에 애를 쓰고 반박해야만 했다.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습니다. 그리고 들어가세요, 제발 좀.”

“어머머! 하여튼 공작님 성격 너무 안 좋으시다니까요. 어떻게 폐하께도 그러신대?”

“내 말이! 내가 지 어릴 때부터 얼마나 챙겨 줬는데, 하여튼 이래서 사람 새끼 거두는 거 아니라더니.”

“세상에 세상에, 폐하께선 사람이 너무 좋으세요~ 황명만 내리시면 공작님은 그냥 콱인데요. 그쵸?”

“전부터 생각했는데 너 말 좀 통하는구나?”

“호호호, 영광이에요.”

“…….”

웃어야 할 일만 가득한 결혼식 날, 신랑의 전 부하와 하나밖에 없는 누이는 신랑 앞에서 대차게 신랑을 까내리기 시작했다.

라파엘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건 무슨 신종 괴롭힘이지? 다들 입구에서 길 막지 말고 좀 들어가서 앉아 줬으면.

다행히 이 괴롭힘은 얼마 가지 않았다. 간신배의 알랑거림에 샬럿은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드디어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이쁜이랑 카밀라 후작 얼굴 봐서 들어가 주는 줄 알아, 라파엘.”

“예…….”

하하호호. 카밀라와 샬럿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까르륵 웃으며 드디어 라파엘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기가 쪽 빨린 라파엘은 마치 10년은 늙은 기분이었다. 라파엘은 손거울을 꺼내 제 얼굴을 점검했다.

“그렇지 않아도 제일 잘생겨야 되는 날인데…….”

어쩐지 주름이 생긴 것 같기도.

물론 거울에 비친 라파엘의 피부는 매끈매끈했지만 그런 착각마저 들 정도로 샬럿을 상대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하여튼 누나가 아니라 웬수다.

라파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푹 쉬던 그때였다.

“야, 웃어. 우리 이블린이랑 결혼하는데 왜 이렇게 죽상이지?”

“아무래도 파혼하기엔 아직 늦지 않은 것 같군.”

“공자님들.”

프라비체의 두 깡패, 아실과 더글러스가 나타났다. 샬럿과 카밀라가 가고 나니 다음은 이 둘인가.

마치 마왕 성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샬럿에 비하면 참 쉬운 상대라고, 라파엘은 생각했다.

라파엘은 금방 웃음을 띠고 그들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공자님들.”

라파엘의 미소는 강력했다.

속에 독기와 화를 가득 품은 아실과 더글러스는 그의 성스러운 미소에 넋을 놓다가도 정신을 퍼뜩 차리더니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형, 나 생각해 보니 이 결혼 반대야.”

“나도다. 너랑 나, 둘 중 누가 이블린을 데리고 도망칠지 정하지.”

“좋아. 가위 바위…… 악!”

“윽.”

누군가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는 두 형제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더 볼 것도 없이 이 손맛은 타라였다.

“어머니!”

살면서 머리통을 맞아 본 횟수가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아실이 눈물을 글썽이며 타라를 불렀다.

그러나 타라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흘길 뿐이었다. 보다 못한 헨리가 나서 라파엘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네, 공작. 내 모자란 아들놈들이 결혼식 날 신랑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군.”

“괜찮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라파엘은 정말로 괜찮았다. 이미 더한 신종 괴롭힘을 받은 직후라 저 두 사람의 괴롭힘은 괴롭힘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뒤에서 오르페시아와 피에르가 마저 두 형제를 혼내는 꼴이 속 시원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라파엘이 후후, 미소 지었다.

타라가 다가와서 물었다.

“하객들은 모였나?”

“예. 모두 도착했습니다.”

“그럼 바로 식을 시작하도록 하지. 자네도 준비해.”

타라가 용건만 간결하게 말하고 식장 안에 발을 내딛자, 라파엘은 다급히 타라를 불러 세웠다.

“저, 공작님. 이블린은…….”

본래 결혼식이 시작하기 전, 신랑과 신부는 입구에서 같이 대기한다.

그런데 이블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라파엘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나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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