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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152)화 (152/154)

152화 - 152화

이블린의 부탁에도 헨리는 이블린을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블린은 헨리의 손에 제 이마를 갖다 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아빠가 싫어서 나가려는 게 아니야. 불행해지러 가는 것도 아니고.”

“…….”

“나 진짜 행복하게 살 자신 있어. 우는소리도 안 할 거고.”

“…….”

그 말에 헨리의 손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뿐, 이블린과 시선을 마주하지는 않았다.

아, 역시 조금 일렀나. 라파엘에게는 미안하지만 역시 조금 시간을 두는 게 좋겠다고 말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이블린이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이블린.”

“어, 어?”

헨리가 이블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여전히 고개를 수그린 채 말했다.

“나는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

설마 결혼 좀 하겠다고 날 호적에서 파 버리려고?

헨리가 그럴 리는 없지만, 설마 하는 불안이 샘솟았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든 순간, 이블린의 허무맹랑한 불안은 안개 걷히듯 사라졌다.

“너에게 우는 걸 참으라고 말하면서 키운 적이 없어.”

“아.”

그쪽이었어? 하고 안도하길 잠시, 이블린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렇다는 건?”

“공작이 널 울리는 일이 있다면 그게 무슨 사소한 이유가 되었든 전부 아빠한테 일러바쳐. 언제든 집으로 돌아와도 좋아. 그게 조건이야.”

“아빠…….”

“아빠는, 아직 널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네 앞길에 방해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렇게 말하는 헨리의 얼굴은 괴로워 보였다.

헨리는 항상 그랬다. 그는 이블린에게 늘 이길 수 없었다. 그건 자신 때문에 이블린이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이블린은 그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맨날 내 멋대로 하게 해 줬으니까 이번만큼은 반대해도 할 말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결국 헨리는, 이블린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또 굽혀 주었다.

그 마음이 고맙고 미안해서 이블린은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그 마음을 먼저 알고, 헨리가 팔을 벌리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자주 친정에 놀러 오겠다고 약속해 주겠니?”

“……당연하지.”

이블린은 망설임 없이 헨리의 품에 안겼다. 헨리는 이블린을 숨이 막히도록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자주 놀러 와 주기만 한다면, 아빠는 그걸로 만족해. 아니, 사실 너무 행복해서 그곳에서 나오고 싶지 않아서…… 우리집이 불편해서 놀러 오지 않아도 아빠는 그거면 돼. 네가 행복하기만 한다면…….”

헨리의 말에서 짜디짠 눈물맛이 났다. 그 탓에 이블린의 그녀의 눈에도 살짝 눈물이 고였다.

“내가 우리집을 왜 불편해 해. 그리고 결혼한다고 우리가 남이 되는 게 아니잖아. 자주 올게.”

그러자 헨리가 조심히 이블린을 떼어 내고 물었다.

“한 달에 몇 번?”

안 와도 만족한다며? 부담스러운 눈빛에 이블린은 어이가 없다가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 달에 한 번.”

그 대답에 헨리는 실망한 티를 감추지 못했다. 이블린이 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쩔 수 없잖아. 옆집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힘들다.

파그라시움 공작령이 안정을 찾으려면 아직 한참 멀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오래 있다 갈게. 최대한.”

이블린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에 헨리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말아 물고, 이블린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얽었다.

헨리의 허락에 다른 가족들도 한결 누그러진 기세를 보였다. 다른 가족들이라고 해 봐야 남은 강경 반대파는 아실과 더글러스뿐이었기에, 기실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아실과 더글러스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블린이 저렇게 좋아하니 이 감동에 찬물을 끼얹지는 않기로 했다.

“아버지가 허락하시고 이블린이 원한다면야…….”

“……한 달에 한 번 올라오는 거, 잊지 마라.”

“응!”

이블린은 형제들에게 활짝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가 라파엘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엄한 목소리로 불렀다.

“공작.”

“예, 공작 부군.”

“내 딸을…… 잘 부탁하네.”

“물론입니다.”

“그리고…….”

헨리는 차마 내뱉기 싫은 말을 억지로 뱉듯, 얼굴을 찡그리다가 홱 고개를 돌리고 마지못해 말했다.

“……이블린이 올 때 자네도 같이 오도록 해.”

그의 말에 라파엘의 눈이 점차 커졌다.

놀란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이블린 혼자 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이블린을 위해서니까…….’

물론 당연히 말은 그렇게 하긴 했지만, 헨리 역시 이블린이 라파엘을 달고 놀러 오는 게 달가운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그들을 떼어놓고 싶지 않았기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헨리는 이블린에게 더 이상 못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언짢음이 뚝뚝 묻어나는 헨리의 얼굴에 라파엘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아니면 저는 처가살이도 좋은데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고.”

라파엘과 같이 살다가는 자신이 서열에서 밀려나게 될 것 같았는지 헨리는 곧바로 거절했다.

아실과 더글러스가 이블린과 라파엘에게 다가왔다.

“결혼식이 제일 큰 고비인 거 알고 있지?”

“아실.”

“이블린은 내 동생이라지만 까탈스럽기 짝이 없지.”

“뭐, 인마?”

아실과 더글러스는 라파엘에게 마지막 견제를 놓으러 온 것이었다.

“무조건 최고 중의 최고로만 준비하지 않으면 내가 가만 안 둬.”

“이블린이 결혼 힘들다고 우는소리가 들린다면…….”

더글러스가 말을 흐렸다.

이블린이 피식, 웃었다.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뻔했다.

라파엘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유치한 견제를 하는 그들을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단언했다.

“이블린의 취향은 제가 다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자님들.”

아실과 더글러스가 라파엘을 겁주었지만 라파엘은 기 싸움에서 밀릴 사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라파엘 역시 그들 못지않게, 어쩌면 더 이블린을 사랑한다고 단언할 수 있었으므로.

그 말이 두 사람의 신경을 거슬렸는지, 라파엘의 도발에 넘어간 아실과 더글러스는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블린이 제일 마음에 들어 하는 디자이너가 누군지는 알아?”

“기간티아 마담이죠. 하지만 저와 다닌 최근에는 기간티아 마담보다 아이리스 마담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요.”

“……이블린이 제일 좋아하는 식장 분위기는 아나?”

“저희 영지를 꽤 마음에 드셔 하는 것 같기에 파그라시움 영지에서 식을 올릴 생각입니다.”

“그 촌구석에서!?”

“왜. 난 좋은데. 공기 좋고 정원도 예쁘더라.”

“이블린!”

이블린의 지원으로 라파엘은 프라비체 형제의 괴롭힘을 여유롭게 받아치고 있었고, 아실과 더글러스는 서럽고 서운해 미쳐 버리겠다는 얼굴로 울먹였다.

“언제는 촌구석에서 사람이 어떻게 사냐며!”

“그건 옛날이고! 그리고 뭐! 그게 무슨 촌구석이야! 수도랑 가깝더만!”

“프라비체 영지에 비하면 촌구석이다.”

“르샹트랑 프라비체만 도시야? 다른 영지 사람들한테 돌 맞는 발언이야, 그거!”

프라비체 남매는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드물게 아실과 이블린이 말싸움을 한다는 것만 빼면 언제나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헨리는 저도 모르게 훌쩍였고, 그 곁에 피에르가 다가갔다.

“이제야 딸 보내는 내 심정을 알겠나?”

“장인어른…….”

헨리가 추한 모습을 감추려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그에게 늘 엄했던 피에르는 오늘만큼은 공감과 위로를 보냈다.

“뭐, 나는 타라를 보낸 건 아니지. 자네를 데릴사위로 들였으니까. 결혼하고서도 한동안 이 집에 눌러앉았으니 자네보단 마음 편한 상황이었어.”

“딸이 품을 떠나는데, 쓸쓸함의 경중이 어디 있겠습니까.”

헨리는 손수건 밑에서 작게 훌쩍였다. 어느새 타라와 오르페시아도 그의 곁에 모였다.

“난 헨리 당신이 끝까지 반대할 줄 알았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의외구나. 우리에게 당한 만큼 파그라시움 공작에게 화풀이를 할 줄 알았는데.”

찔리는 게 많은 피에르는 허허 웃으며 오르페시아의 은근한 시선을 피했다.

헨리는 벌게진 눈으로, 아직도 형제들과 투닥대고 있는 이블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이블린이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요.”

하지만 딸이 품을 벗어나, 자신은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남자의 품에 안겨 세상을 다 가진 듯 웃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조금 많이,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헨리가 말끝을 흐렸다.

“우리 앞에서는, 저렇게 웃지 않았으면서…….”

온갖 보석을 선물해도, 수도에서 유행하는 드레스 전부를 모아 갖다 줘도 저런 얼굴은 하지 않을 것이다.

헨리가 줄 수 있는 것으로는 이블린의 저런 미소를 끌어낼 수 없다.

타라는 헨리의 머리에 가볍게 제 머리를 부딪치고는 현답을 내놓았다.

“반려를 대하는 얼굴과 가족을 대하는 얼굴이 다른 건 당연하지.”

타라의 대답에 헨리는 납득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타라도 내심 아쉬운지 섭섭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머니 아버지도 가고, 이블린도 가게 되면…… 저택이 조용해지겠네.”

“그러게…….”

헨리 역시 타라의 어깨에 기대어 중얼거렸다.

이블린.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우리 딸. 이 저택에서 가장 시끄럽고, 사고도 많이 치고, 탈도 많았던 아이. 그럼에도 너무너무 사랑하는 우리 아이.

몇 달 후 이블린이 자리를 비울 때쯤이면 이 저택은 숨 막히도록 고요해지리라.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이블린은 라파엘과 함께 자주 놀러 올 테니까. 단지 매일 이어지던 일상이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어든 것뿐이다.

“……역시 허락하지 말 걸 그랬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헨리의 읊조림에 타라는 낮게 웃으며 면박을 주었다.

아예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헨리도 따라서 웃었다.

헨리가 오르페시아 부부에게 인정받았던 것처럼, 자신도 라파엘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그들이 맺어짐에 감사함을 느낄 날은 머지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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