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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151)화 (151/154)

151화 - 151화

화창한 날이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프라비체의 검은 저택 앞.

이블린과 라파엘은 대문 앞에서 마왕성과도 같은 검은 저택을 올려다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프로포즈를 끝냈으니 이제 이블린과 라파엘이 상대해야 할 건 최종 보스였다.

오늘은 이블린이 가족들에게 라파엘을 소개해 주는 날이었다.

“떨지 마, 라파엘.”

이블린은 평소보다 몇 배는 힘을 주고 온 라파엘의 팔짱을 끼고 그를 격려했다.

라파엘은 그녀에게 프로포즈할 때보다 더한 긴장감을 띤 얼굴로 내게 물었다.

“저를 미워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들께 잘 보여야 하는 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는데도요?”

“내가 있잖아.”

굳었던 라파엘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졌다.

굳었다고 해도 사실 그리 티 나지는 않았다. 원체 표정 관리에 능한 남자니까.

부모님의 반대가 그리 오래갈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혹시 모르니까 이블린은 또 다른 선택지를 제시했다.

“여차하면 네 영지로 튀고 결혼식 올리자.”

“예?”

“농담이야.”

“……진담인 줄 알았습니다.”

이미 가출 전적이 있기 때문일까. 라파엘은 심장이 한순간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괜히 해 본 말은 아닌데…….’

사실 이블린도 아예 농담은 아니었다. 진심이 1% 정도 섞였다.

괜히 찔린 이블린은 세모눈을 뜨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라파엘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무리 나라도 또 가출하지는 않아.”

“후후.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 같은데.”

“설마요.”

라파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의심을 거두진 않았군. 이블린은 하는 수 없이 가출 계획을 넣어 두고 저택에 발을 내디뎠다.

“왔군.”

저택에 들어서자 보인 것은 헨리의 보기 드문 엄숙한 얼굴이었다. 그는 지팡이까지 짚은 채 턱을 꼿꼿하게 치켜들고 가슴을 편 상태로 라파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라파엘은 잠시 당황했지만 금방 표정을 수습하고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프라비체 공작 부군.”

“그래, 오랜만이네. 파그라시움 공작.”

헨리가 앙칼지게 대답했다.

보통 결혼할 사람을 소개시켜 준다고 해서 안주인이 이렇게까지 마중을 나오지는 않는다.

헨리가 얌전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한 이블린은 황당함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 왜 나와 있어?”

“감히 내 딸과 결혼하겠다고 저택을 찾아온 작자를 아빠가 쉽게 들여보낼 리 없잖니.”

이 아저씨가 주책이야, 정말!

이블린은 속으로 작게 투덜대고는 그의 등을 떠밀었다.

“안 들여보내면 뭐 어쩌려고! 내가 창피해서 못 살아, 진짜. 빨리 들어가!”

“자, 잠깐만! 아직 관례가……!”

“관례는 무슨 관례!”

이블린의 떠밈에 헨리는 반항 한 번 못 하고 얌전히 응접실로 송환되었다.

“왔구나.”

오르페시아가 환한 얼굴로 이블린을 맞이해 주었다. 이블린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족들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새삼 이렇게 보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네.’

기선제압이라도 하려는 건지, 단단히 깃털을 세우고 꾸민 공작새 무리 같았다.

그중에서 으뜸은 헨리임은 말할 것도 없다.

“헨리, 이리 와.”

“응, 여보…….”

타라의 부름에 헨리는 터덜터덜 그녀의 옆자리로 돌아갔다.

의기소침하게 늘어진 헨리의 어깨를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타라가 혀를 차며 이블린을 맞이해 주었다.

“엄마는 말렸다, 이블린. 먼저 마중 나가는 건 주책이라고. 그런데 네 아빠가 워낙 고집이 세야 말이지.”

“…….”

타라는 먼저 변명함으로써 이블린의 질책을 피해 갔다. 이블린의 화살은 자연스레 프라비체 노부부에게 돌아갔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안 말리고 뭐했어?”

“우리가 뭐라 하며 말리냐. 우리도 똑같이 했는데.”

“심지어 우리 때는 문밖에서부터 진을 쳤단다, 아가야.”

“그뿐이니? 사흘 동안 인사하러 왔는데 마지막 날에서야 겨우 집에 인사하러 들어올 수 있었지.”

하하.

뭐가 자랑인지.

오르페시아와 피에르는 추억에 젖은 상태로 웃었고, 이블린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라파엘에게만 들릴 만큼 조용히 사과했다.

“미안해. 우리 가족 좀 주책맞지.”

“화목해 보이고 좋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많이 사랑 받고 계셔서 더 좋아요.”

그 말에 이블린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이 꼴을 보고도 포장 하나는 끝내주게 잘해 주다니, 최고의 예비 새신랑이었다.

“아무튼 앉으렴. 이왕 들어온 거 이야기 좀 해 봐야지.”

결혼을 허락받는 이 자리에는 금희도 함께였다. 금희는 헨리의 옆에 찰싹 붙어 그를 위로 중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라파엘은 입을 열었다.

“이블린과…….”

파지직. 고작 이블린의 이름을 입에 담았을 뿐인데 아실과 더글러스가 눈빛으로 라파엘의 머리통을 뚫어 버릴 기세로 노려보았다.

라파엘은 퍽 곤란하다는 듯 슬쩍 웃더니, 보란 듯이 이블린의 손을 잡고 말을 이었다.

“이블린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나는 허락 못……!”

“가만, 아실.”

날뛰려는 아실을 제압한 건 더글러스였다. 물론 그 역시 라파엘을 곱게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가족들의 시선에 라파엘이 쫓겨날 것만 같아, 이블린은 다급히 끼어들었다.

“들었다시피 결혼 허락 받으려고 왔는데, 내 결혼 반대하는 사람?”

이블린의 질문에 피에르와 오르페시아를 제외한 모두가 손을 들었다. 의외의 사람이 손을 들지 않자 이블린은 놀랐다.

“할머니는 반대 안 해?”

“생각해 보니 괜찮을 것 같구나.”

즉위식 때까지는 결사반대를 외치고, 아까는 헨리를 말리지 않았으면서?

그 순간, 피에르가 몰래 이블린에게 윙크를 보냈다.

……아무래도 피에르가 오르페시아를 구워 삶은 것 같았다.

‘할아버지, 짱!’

이블린은 답례로 엄지와 검지로 작게 하트를 만들어 피에르에게 보냈다. 물론 K-하트를 피에르가 제대로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갸웃하는 피에르를 뒤로하고 이블린은 가족들에게 찬찬히 물었다.

“왜 반대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봐.”

순식간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이 자리는 결혼 허락의 장이 아니라 재판장 같았다.

그리고 판사는 프라비체 일가가 아니라 이블린이었다.

그녀의 발언 허가에 가족들은 앞다투어 손을 올렸고, 이블린은 그중 가장 만만한 아실을 집었다.

“아실, 말해 봐.”

“암흑가 운영하는 놈은 못 믿어!”

“암흑가 해체했대. 다음, 더글러스.”

“……그냥 이유 없이 마음에 안 든다.”

“나도 그냥 이유 없이 기각. 다음.”

“프레데리카와 사돈지간이 되는 게 싫구나.”

음, 일리 있어. 나도 그건 싫었으니까. 이블린은 그렇게 작게 끄덕였다.

그런데 그 답은 이미 나왔다. 이블린이 라파엘에게 물었다.

“라파엘, 네 엄마 누구야?”

라파엘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전 모친이 없습니다.”

“그런 엄마 없대. 다음.”

순식간에 패륜아를 자처한 라파엘의 표정은 구린 구석 하나 없다는 듯 당당했고, 그를 보는 세 사람의 표정은 황당했다.

차라리 선황제의 장례라도 치르고 그런 거짓말을 해라.

이제 남은 건 헨리였다.

이블린이 헨리와 시선을 마주하고 물었다.

“아빠는 왜 싫어?”

“…….”

이블린은 헨리가 무어라 하며 얼굴을 붉힐지 다 예상을 하며 만반의 준비를 해 왔다.

그런데…….

“……흐읍.”

“왜, 왜 울어?”

헨리는 다짜고짜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이블린의 예상에 없었다.

아까의 근엄한 모습은 어디 가고, 이블린이 이렇게 결혼을 입에 담으니 드디어 닥친 현실을 못 견디겠는지 헨리는 사정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블린은 정신없이 눈을 깜빡이며 타라에게 물었다.

“아, 아빠 왜 울어?”

답은 피에르가 주었다.

“다 그런 거란다, 아가야. 할아비도 그랬어.”

“우리집 남자들이 좀 눈물샘이 무르지.”

어찌나 귀찮은지. 타라도 한숨을 푹 쉬며 맞장구쳤다.

그래도 아직 초장인데, 눈물 흘리는 건 너무 빠르지 않아?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블린은 당황스럽고 황당했지만 나름 헨리를 이해해 보려 노력하고자 물었다.

“아빠는 내가 결혼하는 게 그렇게 싫어?”

“네 나이에 결혼은, 훌쩍, 너무 이르잖니!”

기다렸다는 듯 헨리가 손수건을 꽉 쥐며 통곡했다. 살다 살다 헨리가 이렇게 눈물콧물 다 쥐어짜 내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무엇보다 가족들 중 가장 자신을 생각해 주는 이유에 이블린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이, 이르긴 뭐가 일러. 물론 아직 스무 살이니까 쪼끔 이른 감은 있지만 그래도 성인이고…….”

이블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빠는!”

헨리가 먹먹한 목소리로 갑작스레 소리쳤다.

그에 모든 이목이 헨리에게 집중되었다.

평소 그렇게나 무서워하던 오르페시아 부부의 눈총도 부정에 울고 있는 헨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아빠는, 네가 좀 더 아빠랑 함께 살아 줬으면 좋겠어…….”

헨리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빠는 아직, 네게 못 해 준 게 너무…… 많아.”

“…….”

말을 끝마친 헨리는 한참 동안 제 손등에, 언젠가 이블린이 준 장갑 위에 눈물을 방울방울 떨구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고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아빠한테 아직도 화가 나서, 이렇게 이르게 집을 나가려 하는 거니? 아직도 우리집이 불편해서?”

“…….”

“그렇다면 아빠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신경 쓰도록 할게. 그러니까 벌써 이 집을 떠나려고 하지 말아 주렴, 이블린…….”

이블린은 지금 자신의 아비가 어떤 심정으로 울고 있는지 이해가 갔다.

이블린이 진짜 이블린이 아니라는 것을 들킨 날, 그녀가 도망쳤을 때.

다시 돌아온 이블린을 가장 매몰차게 대했던 건 헨리였고, 결국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그녀를 결국 받아 주고 미안함에 가장 펑펑 울던 것도 헨리였다.

그리고 지금 그는, 이 자리에 있는 이블린이 결국 진짜 이블린이었다는 걸 은연중에 알아차린 상태였다.

‘내가 일찍 죽을 건 아빠도 각오하고 있었댔지.’

그렇지만 진짜 딸이 애먼 곳에서 고생을 하고 올 줄은 몰랐을 거다. 거기다 기억은 잃었어도 겨우 돌아왔건만, 그렇게 따르던 아비에게 존재를 거부당했다.

스스로 이블린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 자부하면서도 결국 제 딸을 알아보지 못하고 상처 주었다. 그건 헨리에게 있어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을 죄책감이었다.

“이블린, 너는 아주 오랜 시간 떠나 있었잖니……. 조금만 더 이 집에서 편안하게 있다가 가면 안 될까……?”

헨리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미안함에 이블린에게 조금이라도 더 무언가를 해 주고 싶어 하곤 했었다.

물질적으로든 심적으로든, 더 풍족시켜 주고 안정시켜 주고 싶다며.

게다가 헨리 역시 결혼을 하며 타지로 온 입장이다.

‘아빠는 또 내가 어디론가 떠나는 게 싫은 거겠지……. 또 고생할까 봐.’

그런 헨리의 마음을 이해한 이블린은 섣불리 말을 건넬 수 없었다.

하지만 헨리가 이렇게나 자신을 떠나보내기 싫어함을, 미안함을, 사랑함을 고백했다.

그랬기에 이블린도 무작정 떼쓰고 싶지 않았다.

“아빠.”

이블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헨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앞에 쭈그려 앉아 헨리의 손을 잡았다.

“아빠. 나 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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